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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유행의 대상에는 선악이 없다.

 

 

 

 

본 동영상은 '리더쉽 댄싱 가이'라는 영상으로서,

"리더쉽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동영상이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물어보냐면 무수히 많이 열거될 것이다.

리더쉽은 그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으로서, 미디어 매체에 나오는 리더쉽을 발휘하는 어떤 인간상은 시뮬라크르일 뿐이기 때문이다.

 

리더쉽을 가진 사람은 꼭 정장을 입고 팀 프로젝트를 앞장서서 진두지휘하고 어쩌구 성과를 내는 그런 사람으로서의 이미지가 어찌 보면 당연한데, 리더쉽은 그러한 인간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언어적 도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리더쉽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기 먼젓번에 리더쉽을 가진 것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없었을리도 만무하다.

리더쉽이란 언어적 도구가 유행한 까닭에는 그러한 것이 유행할 필요성,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화된 사회 속에서 소규모의 팀프로젝트들로 나뉘어진 공동체들 간의 공존과 대립 사이에서,

그 공동체들의 수장들이 모두 정형화된 어떤 리더의 모습을 공유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공동체들이 서로 간의 무작위적 예측 불가능한 집단적 행동들을 통해 분열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리더쉽은 이러한 양상 속에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이다.

리더쉽의 전형적인 면모 중 하나인 '성과주의적 면모'가 없었다면, 단지 감정적인 이유를 들어 다른 공동체를 방해하고 권리를 침해하는 무작위적 행위들 또한 집단적으로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와중에 위의 동영상은 리더쉽이란 단어에 대해 새로운 영감을 줄 뿐인 것이다.

위의 동영상처럼 리더쉽을 가진 사람으로서 행해야 하는 것은 가장 '먼저' '따라하기 쉬운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거나 수모를 당할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하고, 적어도 3인의 군중을 형성할 수 있도록 애초에 first follower를 발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위의 동영상이 파격적인 '리더쉽의 면모'을 내걸었다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리더로서의 행위가 꼭 어떤 기업 내, 학교 내의 팀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영역을 벗어난 탈일상적인 영역에서 또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의 동영상 속에서 야기된 결과는 '축제'다.

잔디 위에서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탈일상 속의 휴양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탈일상성을 더해주는 '집단적 춤, 놀이 행위'가 추가되기 위해선 먼젓번에 친구들을 대동하여야 할 것이고, 말을 맞춰야 할 것이고, 심지어 춤을 같이 춰달라고 하기 위해선 돈도 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깨부시는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한 명 있었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잔디 위의 휴양은 심지어 축제로까지 발전되었다. 이제 이 시점이 되면 정신나갔던 그 먼젓번의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닌 사람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되기 위해선, 잔디 위의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행동, 돌발행동을 자행함으로써 얻게되는 자신의 수모, 수치 및 사회적 맥락 등을 이겨내고 광란의 춤에 동조할 수 있었어야 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한 선례가 되었던 제일 먼젓번의 정신나간 사람은 이제 '리더쉽'의 표본으로서 추앙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결과론적인 편향인지..

'리더쉽'이 얼마나 허상에 잠겨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제일 먼저 광란의 춤에 도전한 사람에게 그 어떠한 사람도 호응하지 않았다면 그저 미친 사람으로 사회적 맥락 하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다.(이를 보고 내레이션은 first follower가 대단히 중요하다 하였다.)

그러나 위의 동영상 속에선 그렇지 않았기에 리더쉽의 표본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리더쉽이란 유명무실한 형상에 대한 시뮬라크르를 제공하는 단초가 되어주었다.

 

이제 제일 먼저 춤을 추었던 정신나간 사람은 시뮬라크르 속에서 진정한, 탈일상적인 의미의 리더가 된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결과론적인 편향이 아닐 수 있을까?

 

 

차설, 오늘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위의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는' 행위의 유행에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위의 잔디 위가 애초에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면?

1)사람들은 이미 많이 들어가서 휴양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사회적 맥락(유행)으로 이해하고 규칙을 어기고 잔디 위에 들어가는 것을 보다 유혹적으로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규칙은 또한 사회적 맥락(유행)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만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잔디 위에서 이미 휴양을 즐기고 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억압할 수단을 종용하지 않는 이상 잔디 위에 들어가지 말라는 규칙은 종래에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1) 상황에서, 급기야 어떤 정신나간 사람 한 명이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면 사람들은 이에 동조할까?

 

(1) 동조할 것이다. 위의 동영상처럼 적어도 first follower가 등장한다면 사람들의 동조를 통해 마찬가지로 집단적 광란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잔디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어떤 한 사람만이 막춤을 추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도 그것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배덕적인 행위를 하는 상태에서 더 큰 배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 사람들이 심리적 부담을 느낄 것이기 때문으로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다.

 

(3) 동조하지 않다가 동조할 것이다. 사람들은 (2)번처럼 이미 배덕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더 한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득에 도움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할 것이지만, 정신나간 한 사람의 두배로 배덕적인 행위(춤)를 관찰하고 또한, 그 사람이 어떠한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한 층 더 배덕적인 행위에 대한 욕구(배덕 욕구-이는 내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를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올라가선 안 되는 잔디 위에 올라가선 급기야 집단적 광란의 춤을 출 것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배덕 욕구는 정신나간 춤을 추는 그 먼젓번의 사람과 동시에, 혹은 그 이전에 입장하였던 사람들은 느끼기 힘들 것이다. 이미 잔디 위를 올라갔다는 금기를 어긴 것에 대한 부담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교육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만일 잔디 근처를 지나가던, 잔디 위를 올라갈 생각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올라가선 안 되는 잔디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급기야 노래도 들리고 어떤 한 사람이 춤까지 추고 있다면, 그러한 광경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이 되면, 이 잘못된 행위(잔디에 올라가서 춤)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개체가 적어도 한 명 이상 존재할 것이다.

이때 배덕욕구는 꼭 나쁜 행위를 하고 싶은 욕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무작위적 행위 중 하나를 바라는 것은 이미 생리적 욕구와 다름 없이 선악을 떠나 그저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대상이 어떠한 금기였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잔디 위에는 올라가도 되지만,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위의 과정이 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물론 전제조건은 제일 먼젓번에 춤을 추었던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장기간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겠다.(예컨대 그 금기가 꼭 유명무실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실제 위 동영상 속의 장소이든, 실제 우리가 걸어가는 집 주변의 길거리이든 춤을 춰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없다.

그러나 위 동영상에서는 사람들이 광란적인 춤에 동조했음은 눈으로 관측된다.

한편, 현실 길거리 위에서 혹은 위 동영상과 비슷한 풍경의 어떤 공원 위에서의 춤에는 동조할 사람이 과연 있을지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이 차이는, 사람들의 '유행'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어떤 행위, 가치관 등의 '유행'에는 꼭 선악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인식이다.

 

 

위 동영상에서 잔디 위의 사람들이 광란의 춤에 빠진 것은, 제일 먼젓번에 그 춤을 춘 사람이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first follower 의 존재 유무를 위 동영상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평가하는데,

그것은 결과론적인 편향일 뿐이다.

제일 먼젓번에 정신나간 춤을 추는 사람이 자신에게 동조할 어떤 사람을 찾을 것으로 함부로 예상할 수는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예상은 이것이다.

 

 "이 노래에 온 몸으로 호응하고 싶은 개체가 분명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적어도 한 명 이상 섞여있을 것이다." 

 

이는 easy to follow 중의 하나인 '춤'으로 표현된다.

이때 first follower가 얼마나 '춤'을 따라하기 쉬웠는지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젓번에 정신나간 춤을 춘 사람이 그 어떠한 유무형의 제재도 받지 않아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형의 제재는 경찰이 와서 심문하는 것이고, 무형의 제재는 춤을 추는 사람이 마치 금기를 행하는 것처럼 표정이 이상하거나 몸이 굳어있는 경우를 말한다. 요컨대 심리적 제재가 관측되어도 사람들은 그것에 follow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재'의 단계가 해결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에게 '제재'로써 어떤 행위를 방해할만한 수단이 없다고 판단이 들면,

그 어떤 정신나간 행위라도 사람은 집단적으로 추진하고 행동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러한 결과가 야기되는 까닭은,

 

사람들의 인식 상 '선악'이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가치판단 자체가 선악의 구분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금기'로 여기는 행위에 대해, 그것의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발견할 시 그 행위는 충분히 유행할 필연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때 사람들은 해당 행위의 '유행'에 대해 결과론적으로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이것이 '악'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며 선악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체별로 무작위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 수십억 명 중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 '금기' 행위를 자행할 개연성, 필연성을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자살은 가장 선악을 판별하기 당혹스러운 것들 중에서도 단연 1등을 차지한다.

그 어떤 형태의 제재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적 사상만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지 않고 자유주의적 면모를 탑재한 시민이 존재하는 현대 기준에서,

자살을 통한 어떤 유무형의 제재가 존재한다고 인식할 수 있는 그 한계는,

무형의 제재밖엔 없다. 요컨대 자살을 통해 자신이 느낄 감정적인 문제(고통) 외에는 그 어떤 제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자살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의식적인 형벌을 내려줄 수가 없다. 이미 의식을 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이라는 키워드는 사람들에게 불가사의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금기로 여기되고 터부시된다.

 

그러나 과하게 급진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내 생각에는, 자살은 성교육처럼 교육받을 필요성, 살면서 한 번쯤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고민거리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으로 자살에 대해 단정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 단정은 꼭 선악에 집중될 필요가 없다. 꼭 자살자들의 유서들을 교과서에 실을 필요도 없다. 담담하게 일 년 내에 이루어진 그 행위의 횟수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유형의 제재가 된다.

어째서 자살 행위를 한 사람들의 숫자가 유형의 제재가 될 수 있느냐 하면,

그 사람들의 인생은 그저 '자살자 몇 명'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교육의 방향성은 '환원주의'에 대한 심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 상황 속에서 사람이 가지는 유의미함은 고등학교 1학년 화학 교과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단백질과 수분, 신경절을 나아가는 자극의 정체인 칼륨 이온과 나트륨 이온, 이온 펌프 등의 묘사들을 보면, 사람은 꼭 정말 그 물질들이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21세기에는 불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바로 잡아주는 중학교 도덕 교과서가 있고,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가 있다. 이것들은 "모름지기 플라톤은 다 허상이라 했고, 칸트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고, 누구는 무엇무엇을 말했다."고 암기하는 식으로밖에 교육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내용들은 굳이 암기를 하지 않더라도 각자 개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가치관 양성의 표본이 되어준다.

요컨대, 그러한 교과서들을 통해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물질로 구성되었다는 과학적 사실 이상으로, '이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존재라고 스스로 자기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자살자의 수가 기록된 교과서를 사람들이 바라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저 몇 년도에 몇 명이 자살했고 그 자살 추이는 어떻게 된다는 것만을 통계적으로 바라보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 그 한 명 한 명 사람들의 '자살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인생들을 한 번이라도 고려해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정말 충격을 받고 자살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살 행위는 여태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통째로 날려버리기 때문일 뿐더러, 그 결과로 자신의 삶이 치욕적이게도 숫자 1로 변환되어 교과서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과오가 TV 9시 뉴스에 방영되는 것과 그 양상이 같다.

 

그러나 현재 그렇지 못하고, 자살이 터부시되고 있다. 그 모습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1)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에게 자살시도는 수능을 잘 보기 위한 일종의 진입장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학원 어쩌구 유명 선생들이 하는 레파토리가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왕따를 당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까 너무 무섭더라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ㅡ죽을 생각으로 공부를 하자..!"

 

이 얼마나 진부한 레파토리일까?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수능을 앞둔 사람들에겐, "죽을 생각으로 공부? 그거 좋다. 나도 서울대 갈 수 있다 가즈아" 하고 스스로의 과오를 덮어주는 만능 '가치관적' 망각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되려 자살을 종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살 시도가 대체 어떻게 인생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는가?

자살은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야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자살은 그 자체로 결말이기 때문이다.

자살 시도는 자살과 다르다. '죽을만큼'이라는 언어적 도구만큼 자신에게 환상을 가져다주는 것은 또 없다.

드라마나 소설 혹은 상상 속에서 바라보는, 옥상에 올라가 지면을 바라보며 "너무 무섭다. 죽을만큼 공부하자"고 자기암시를 거는 스스로의 모습은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그러한 상상은 상상일 뿐이다.

 

'자살 시도'라는 단어 속에는 자신이 '자살'이라는 결말을 생각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기 위한 우울증적인, 자기파괴적인 자기암시일 뿐이다. 설령 그러한 가치관 속에서 사회적 부를 성취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자살은 이제 '오늘의 운세', '행운'과 다름없는 글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사람에게 '자살'은 만능 가치관적 망각제의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 시도'를 생각하며 자신의 '죽을 만큼'을 종용하는 태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살 시도'를 극단적으로 들먹이지 않더라도, '노력'이라든지, 그냥 '시도'라는 단어로써 대체할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새벽 5시라 너무 졸려서 여기까지 씀.

 

주제 : '유행'에는 좋은 것이 유행해야 한다는 인식, 나쁜 것은 유행하면 안 된다는 인식과는 별개로 선악이라는 기준점이 없다. 왜냐면, 선악 역시 유행의 대상이었을 뿐인 정신적인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식, 행위의 유행은 선악과는 구분지어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어떤 범죄 행위 및 방법들이 유행하고 유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단순히 그것이 금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금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드라마, 영화 등에서 시뮬라크르들로써 그것들이 자주 비춰지고, 그러한 범죄가 '선역'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게도, 극중 진행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중세 십자군 전쟁 지휘관이라면 사람을 살육하고 난도질하는 것은 장대한 서사시 속에서 '업적'으로 등재된다. 그러나 현실에선 사람 간의 손찌검 및 모욕만으로도 일단 경찰 심문부터 받고 들어간다. 이는 가상과 현실에 대한 구분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해당 범죄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감정이입하는 대상이 '선역'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여 행해지는 필연적이고도 '이유있는' 행위일 뿐인 것이다.

한편 주인공이 대놓고 악역이고, 그 행위 역시 잔혹하며, 그러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없다면, 그 영화는 정말로 관객의 가치관 상 현실과 가상의 구분에 대해 명확히 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 용도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할 것이다.

 

가상과 현실이라는 구분은 그 역시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어떤 세대에 있어서는 가상과 현실이 혼재되어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이에 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가상과 현실은 앞으로도 영원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신권정치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왕권이 신으로부터 내려져왔다는 그 상상의 일로 인해 나라 운영이 좌우되는 것이 관측될 수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미 역사적으로 가상과 현실은 그 구분을 공동체에서 지정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라는 인식은 역시 가상이거나 현실일 수 있고, 인간은 어떤 태초의 단백질 화합물의 발생으로부터 비롯된 진화론적 우연의 집합체라는 것 역시 가상이거나 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칼 포퍼적인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시뮬라크르를 기준으로 후자가 '현실'인 것으로 교육되는 것이다.

 

이와중에 가상 속에서의 '유행' 역시, 추상 속에서의 '유행' 역시 현실로 대입되는 일이 어떤 세대에서는 발생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세대는 그러한 '유행'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현실적인 이미지로 주입받은 세대에서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어떤 금기 행위가 유난히 유행할 수도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어떤 세대에 대해, 그러한 세대의 '유행'을 막기 위해서는 해당 행위의 '선악'의 구분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유행'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 혹은 만들어 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