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에 동영상과 사진을 업로드한다는 발상 및 실행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으면,
오늘날에 사람들이 인터넷 속에서 자신의 낙을 찾는 일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를 하면서 실제 인간관계에 대한 형성 노력을 기울일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고,
마치 마약이라도 하는 것처럼 컴퓨터 속에 중독된 것으로 착각하는, 어떤 증상을 보이는 은둔 백수, 폐인, 히키코모리들을 일부 양상하게 된 현 상황은,
인터넷 속에 단순히 실제 현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료된다.
어떻게 이 단순한 사실이 그러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의 추상을 나타내는 수단인 글, 언어 등에서 보다 벗어나,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현실을 모방한 시뮬라크르를 인터넷 상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터넷 상의 추상들은 그 자체로는 추상이지만 실존하는 것, 물질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의 성격을 지닌다.
엄밀히 말해 그 사진과 동영상들에 어떠한 조작도 없으리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정상이어야 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 그저 업로드된 사진과 동영상은 컴퓨터의 데이터 상으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곧 사진과 동영상이 우리 머릿속의 상상처럼 얼마든지 추상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는 의미로서 사진과 동영상은 그 자체로는 추상이지만 실물을 표상하는 시뮬라크르로 바라볼 수 있게한다는 것이다.
이 시뮬라크르로 인해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인터넷을 접하는 모든 수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 속에서 어떤 가상의 인간관계를 맺고, 현실상의 성취를 가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고, 가상으로 여행하고, 가상으로 연인도 만들고(?) 추상의 영역에 있던 것을 시각화, 청각화하여 얼마든지(아직 미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느끼고 체험하고 즐거워하고 한편으로 분노하기도 하면서 인간관계, 현실적 체험 속의 삼라만상으로부터 얻는 추상적 감정들을 대신 느낀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이 판단이 문제였다.
현실상의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가상이 눈 앞에 있다는 판단은 전방위적으로 의도되어 조작된 것일 뿐이다.
지금 필자인 내가 원고지 위에 소설을 쓰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여기 인터넷에다가 굳이 매일같이 무언가 올릴 글을 생각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내가 무언가 추상과 물질적인 것들을 얻는 계기가 마련될 수 없는지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다.
이 행위는 지금에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노린다는 기묘한 현실과 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지금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개인이 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숭고하게 조작해서 받아들일 수 있어도,
그러한 기저 심리는 네이버 파워블로거의 명성을 따라잡고 싶다는 욕망 또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실물, 물질을 주는 것처럼 곡해된 까닭에, 인터넷에 자신의 생업을 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상 당연하다. 직업이 가지는 의미는 그 이상으로 숭고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의 극단적 시행이 곧 현실 파악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리라고 보았던 것처럼,
한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전향을 희망한다고 할 때 실제 일어날 일로는 실상 국가경쟁력 쇠퇴밖에는 없을 것이라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별안간 인터넷이 시뮬라크르의 도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터넷과 함께 생애의 70~80%를 보내왔다.
그리고 이 인터넷 사용이 앞으로 생애의 100%는 될 수 없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90%를 상회할 정도로 인터넷 이용률을 올린 채로 죽어갈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제 인터넷은 개인 생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앞으로 태어날 어떤 세대의 개인들은 인터넷 이용률 100%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
이 현상은 당연히 산업혁명과는 다른, IT혁명이라고 콕 집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현대 사회의 기술 발전으로 인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지구온난화가 돌연 전 인류의 문제로 떠오른 것과는 달리, IT혁명 이후의 대중의 인터넷 중독은 단지 개인의 인터넷 중독으로 순화되고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 중독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이다. 단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대 단위별로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어째서 인터넷에 과몰입하는 것 하나만으로 중독이라고 보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미 인터넷에 의존하고 강박적으로 몰입하는 것은 시간의 단위로써 표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디론가 가야할 길을 알기 위해 인터넷으로 지도를 보고, 길찾기를 누르고, 네비를 찍는 이 단순한 의존 수준으로도 이미 인터넷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길찾기라는 행위를 통해 변화하는 개인의 추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길찾기를 누르고 지각하지 않고 행선지에 도착하면, 그 길을 지나오는 과정은 단순히 인터넷의 길찾기를 시행한 자신의 시뮬라크르밖에 되지 못한다. 이로부터 얻는 깨달음은 없다. 망각하게 된다.
이미 이런 의존을 인터넷 중독이라고 감히 발언하지 못하고 온전히 게임만을 중독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행간의 시선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중독인 사람들 모두가 누가누가 더 중독인지 겨루는 오십보백보의 상황과 다름없다.
전자 전기 제어와 관련없이 오직 역학적 운동 및 연소 등으로 동작하는 기계만을 이용하는 것이 인터넷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까?
인터넷 하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이미 인터넷 중독은 새로운 산업혁명의 당연한 증상일 뿐 아니라, 시뮬라크르가 본격적으로 인류의 문화를 압도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그 끝에는 획일화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애가 일치하는 사회 및 시대가 올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떤 시뮬라크르의 극한이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도 되지 못한 때가 될 때 일어날 것이다.
말인 즉슨, 인터넷의 중독이 너무나 당연해졌음에도, 오십보백보로 중독을 논하는 현대를 지나 이제는 '인터넷 중독'이라는 단어가 아예 사라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모두가 같은 생애를 지내게 될 것이다.
모두가 나처럼 살 것이고,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먹고 자고 입으며 생활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어떤 부족사회도, 국가도 이루어내지 못한 결속을 가진 공동체를 의미하는가?
아니다. 사람들은 정확히 동일한 생애를 지내면서도, 자신의 의도 속에 자신의 삶이 놓여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생애 형식이 정확히 동일하다 해도, 그 공통점으로 미루어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의도 속에서 분명히 살아가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터넷에 놓여있을 어떤 사상, 가치관들은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말인 즉슨, 자신의 의지, 의도, 가치관, 주관이 분명 존재한다고 여기면서도, 정확히 다른 사람들과 일치하는 생애를 지내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 중독이 중독이 아니게 되었을 때, 인터넷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졌을 때, 그런 식으로 일상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유도되는 것이 너무나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 이제 인터넷은 추상, 시뮬라크르의 영역을 지나 물질의 영역으로 인식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 동일한 현실 생애 속에서 인터넷 속의 자신의 모습들만은 다르게 꾸미고자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애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믿을 것이다. 사람들의 정체성이 이제는 인터넷 속에 예속되어가는 것이다.
보다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 2019년에 현실은 분명 인터넷 밖에 있다. 인터넷 밖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하며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쌓고 살아가면서 인터넷은 덤으로 취미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하나의 직업이 대두됨으로써 왠지 모르게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들이 분명 20010년 이전 아프리카 TV BJ라는 직종들로부터 이어진 연장선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르게 여기고 있다.
여기서 다르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아프리카 TV BJ가 가졌던 부정적 이미지가 현재의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대한 이미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여긴다는 것이다.
옛날 2000년대 중반에서의 버디버디 캠화면 등에서 나아간 아프리카 TV, 그리고 2010년대 말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그 이미지 자체가 실상 동일한 것이며 다른 추상으로 바라볼 수 없이 정확히 동일함에도,
2000년대 중반 버디버디 캠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이는 것이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가상의 직업(마치 소설가의 필명처럼)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 중독의 심화가 한 개인의 영역이 아닌, 대중의 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넷 중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가 맡게 되는 것이다.
2019년의 현재 인터넷 중독이 심화된 공동체 속에서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대한 어떤 충격이 존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몇몇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대한 수익은 지상파 방송사와 별 다름이 없게 되기도 하였으며, 인도는 아예 유튜브를 방송사가 활용하여 1억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소한 충격은 아직 현실상의 직업 구인에서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현실상의 직업 구인 문화를 답습하는 현 세대 20~30대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앞으로 2020년대, 2030년대를 꾸려나갈 세대의 입장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정말 "안 할 이유가 없는" 직종이 될 것이다. 누구나 너나 할 것 없이 시도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연속적인 상황 속에서 인터넷 중독은 심화되어갈 것이고, 그것은 세대의 단위로 심화될 것이다.
그리고 2019년대, 아직 현실상의 직업 구인 양상이 다양했던 것과는 달리,
앞으로의 직업 구인 양상 및 한 세대의 장래희망, 생애는 비슷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상의 자신의 모습들은 지금보다 더 다양해질 것이며, 인터넷 속의 직업들이 하나 둘 더 늘어나는 것으로써 현실 상의 직업 다양성을 모방하는 양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 현실 상에서 존재하였던 개인들 생애의 다양성과 반대로, 미래의 대중이 가지게 될 정체성은 인터넷에 있으므로,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개인들 생애의 다양성으로 대체되고, 현실 상의 획일화된 생애를 대중이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2020년대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분명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2030년대, 2040년대, 나아가 2070년대가 되면 실제 일어날만한 일이 될 것이다.
현실 상의 개인들이 획일화되는 만큼, 인터넷 상의 개인들의 차이로부터 자위하며 시뮬라크르 속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단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도출된 생각이 아니다. 생애의 70~80%에 달하는 인터넷 중독이 이러한 예상을 야기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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