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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감정의 끝, 배덕 욕구, 놀이의 순환

 어제 새벽 6시까지 롤했다.

 그리고 바로 지웠다.

 

 정말 잠들고 싶었는데, 

 그럼에도 롤을 꾸역꾸역 하는 것이 나에게 하나의 도전처럼 느껴져서 계속 했다.

 

 그렇게 롤을 새벽 6시까지 한 끝에 느껴진 감정은 어떤 즐거움도, 화남도 아니었다. 

 내가 이 짓을 왜 했는지 자문자답 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어리석음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수로 열어놓은 창문 덕에 활개치던 모기쉑들의 난타공연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일부로라도 롤을 늦게까지 했던 까닭은, 장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시뮬라시옹을 극한으로 적용하면 그것의 허실을 알 수 있다."

 

 나는 나에게 롤이란 게임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인지,

 방학 중 몇날 며칠이고 계속 행해야 하는 것이었는지 스스로 되물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방학 중에 적어도 토익은 ~~하고 CAD를 ~~하고 엑셀을 ~~하고 매트랩을 ~~하고 C언어를 ~~해야겠다."고 계획했던 어떤 모든 것들도 이루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죄책감 역시 하나의 시뮬라크르로부터 비롯된 허상뿐인 감정임은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롤에 빠져있으면서도 실상 그것으로부터 하나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까닭에 나는 일부로 잠을 참아가면서까지 롤을 했고,

 그 결과 롤은 내가 온 인생을 바쳐서 열정적으로 같이 이끌어나갈 친구같은 존재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롤은 나에게 있어서 취미도 되지 못하는, 살면서 잠깐 지나갔을 뿐인 전봇대만도 못한 존재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전봇대 근처만을 서성이며 중학교 때부터 8년 넘게 지냈던 터라, 나는 시각이 협소해졌었구나 후회한다.

 

 

 롤은 이제 와서 나의 인생에서 더이상 유의미함을 공급해주지 못한다.

 롤의 높은 티어는 친구가 모두 사라진 지금 현 상황에서 나에게 어떠한 가상의 정체성도 부여해주지 못한다.

 골드건 플레건 다이아건 마스터건 그 어떤 티어도 지금 내가 달성한다 한들, 

 정작 만나는 면면들은 그러한 티어에 걸맞는 플레이를 보여아하는 랭겜 속의 야만인들뿐이다.

 

 내가 어떤 회사 면접을 가서 스스로 롤 챌린저 티어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대단히 몰상식함을 보여주는 근거가 될 뿐, 백수들의 로망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게임에 대한 극한의 탐닉은 사회적 유용성 속에서 반발감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게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닐지라도, 자기계발이라는 어떤 사회적 밈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을 배제한 다른 행위, 수단들은 그 가치가 폄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영국 1600년대 말에 있었던 청교도 혁명 속에서 자위가 불법으로 지정되었던 그 한 때,

 자위라는 행위는 그전에도, 그리고 그 당시에도, 그 후에도 당연스럽게 욕망에 이끌려서 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 행위에 대한 부정적 사회적 인식이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그 한 때만큼은 자위는 나쁜 것이었다.

 자위에 대한 어떤 선악은 그 행위에 대한 근본적 탐구에 의한 공동체적 합의 및 결론에 의해 도출되는 것 이상으로,

 그저 그때에, 자위에 대한 공동체의 인식을 조작하는 것으로 선악이 도출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조작은 그것이 공동체의 일부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공동체의 전체 의견인지 알 수 없다.

 조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의미를 배제한 그 자체의 의미로서 역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밈은 진정으로 추상이지만, 그것이 실제 인류 태동부터 존재했던 실제 물질, 마음인 것처럼 둔갑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시뮬라크르이기도 하다.

 실상 그러한 마음가짐, 인류의 태초 마음, 성선설, 성악설과 같은 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것들임에도 그것들의 존재성을 주장하는 것에는 조작된 대중인식으로 인한 것일 뿐이다.

 

 

 게임이 현재 2020년을 앞둔 지금 가지는 사회적 밈 상의 의미는 좋지 않다.

 게임으로 인해 물리치료, 재활 훈련, 지적 창의적 활동, 발명, 발견 등의 대단한 업적을 이룬다고 해도,

 보편적인 사회적 인식이 게임이라는 단어 하나에 온갖 부정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모든 선(善)례들을 무시해야하는 당위성을 사람들은 인식하게 된다.

 

 

 게임 중에는 물리치료 용도도 있을 것이고, 의학 용도도 있을 것이고, 운전 면허 연습 용도도 있을 것이고 여러 용도가 있을 것이지만 그나마 유의미하게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메이플스토리, 롤, 리니지 등의 게임이 점유율이 높다.

 그런 와중에 메이플과 롤, 리니지 안에서 보여지는 익명성(이라고 착각하는) 하의 사람들이 보이는 추태 때문에, 게임에 대한 선례들은 무시되고, 그것이 당연해진다.

 게임을 긍정하는 것은 롤 안에서 패드립을 하며 조상 욕을 들먹이는 사람들에 대한 긍정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게임을 긍정하는 사람들이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성급한 일반화 오류가 맞다. 허나 어떤 논리의 오류가 항상 참, 거짓을 판별하는 도구가 되지는 않는다.

 오류가 있음에도 참인 것이 있고, 오류가 없음에도 거짓인 경우가 있다.

 둘째, 공동체는 밈으로 묶인다는 관점에서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부류들을 분류하지 않고 '게임에 대해 긍정적임'이라는 밈 하의 사람들을 모두 한 통 속에 묶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게임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재활 치료를 하고, 운전 면허 연습을 한다는 것까지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게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한다. 이 관점의 차이는 서로 간에 '게임에 대한 긍정적임, 부정적임'이라는 단순한 밈에 대한 분류만으로 사람들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 선결적이라는 점으로부터 비롯된다.

 말인 즉슨, 일반화가 필수적으로 대동되는 게임에 대한 인식의 변증법 속에서 사람들은 테제, 안티테제에 대한 인식만을 확고히 하며 타협이 없는 상태로 신테제로 나아가고자 하는 협의점(그리고 이는 다양한 밈에 대한 분류로 나뉘어진 공동체들 사이에서 도출될 가능성이 있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게임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적임, 무조건 부정적임으로 이미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있는 와중에 서로를 그런 점을 들어 욕하는 것은 모순되어 있다.

 누구도 롤 안에서 패드립하는 사람들을 긍정하고 싶어하진 않고, 누구도 여타 다른 게임들을 통해 재활 치료라든지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게임들까지 규제해야한다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 와중에 롤이 그 '게임'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하는 만큼, 게임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은 롤을 하면서 보이는 사람들의 감정적 행위들, 극단적 행위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롤 안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극단적 야만성은 비단 익명성이라는 추상 하에 숨겨진 것이 아니다.

 익명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필자가 올린 옛 글들 중에 하나로 설명하였으니 이하 생략하겠다.

 말인 즉슨, 롤이 익명성에 가려진 하나의 게임일 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현 10~20~30대 세대가 아닌, 새로이 롤을 접하게 될 세대들에게는 롤 안에서 보이는 야만적 태도들이 하나의 당연한 태도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린 사람들이 보이는 이상 행동들은 그 행동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어떠한지에 대한 고민없이 스스로의 감정에 이끌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선악의 판단은 행위에 대한 구별, 판단이 아닌 공동체의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 인식을 답습하는 새로운 세대가 롤 안에서 보이는 기성 세대들의 야만적 태도를 체험한다면, 그 새로운 세대들은 롤 안에서 보이는 야만성을 그대로 답습할 당위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위의 반복은 게임 속에서 보이는 야만적 행위의 확산을 일으킨다. 심지어 그때에는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를 언급하는 사람들마저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미 게임에서 야만적 행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니.

 

 나는 이것을 '배덕 욕구'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배덕 욕구는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성악설 등의 2000년 넘은 구닥다리 사고방식 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위에서 설명한 경위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공동체가 열심히 권유하는 도덕관념과 대비되는 인터넷 상의 일탈 행위들은 그러한 행위들이 선제적으로 이루어졌던 먼젓번 세대의 결과물이다.

 마치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것까지가 하나의 합리적 행위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신대륙을 쫓아 탐험하는 것 이상으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덩어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까지를 자신의 모험의 끝으로 지정했던 것과 같다.(당연히 콜롬버스 역시 옛날의 먼젓번 세대들로부터 그 야만성을 답습하였을 것이다.) 먼젓번 세대가 일궈놓은 탐험물, 뉴턴이 말했던 '거인'의 행위들 속에는, 어떤 선악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먼젓번 세대가 '당연스럽게' 행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선악은 결과론적인 편향으로 이뤄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롤을 극한으로 해서 롤에 질릴대로 질린 나머지 롤이 내 인생의 취미가 되지는 못한다는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글이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계속 느끼는 바로는,

 

 롤이라는 추상으로부터 내가 얻었던 모든 것들은 학창시절의 인간관계이고, 티어 자랑이고 뭐고 간에 결국,

 '감정 변화'이 네 글자 외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추상은 오로지 감정이라는 물질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 역할을 끝낸다.

 추상이 밥 먹여주지 못하고, 추상만으로 물질 창조 당연히 할 수 없고, 추상은 아무런 사회적 의의가 없다.

 하지만 감정변화만을 야기한다는 것으로 추상과 물질의 접점이 존재한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롤은 감정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놀이의 특성 중 경쟁놀이, 우연놀이, 역할놀이, 그리고 펜타킬 등을 통한 '현기증'이 모두 포함된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과금이라는 물질적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탓에 많은 사람들의 유행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게임 안의 수많은 야만성들로부터 사람들은 분노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 야만성을 목도하는 것을 굳이 무시하면서 게임을 긍정하는 밈을 확산시키기도 한다.

 이 모순성은 롤의 놀이의 특성이 한 가지가 아닌, 4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에 유혹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롤 속에서 협곡을 플레이하며 경쟁놀이, 역할놀이, 현기증을 누리다가 우연이라는 요소로 인해 '팀운'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되면, 칼바람을 통해 우연놀이, 역할놀이 등을 배제한 채로 경쟁놀이, 현기증만을 누릴 수 있다.

 한편, 롤토체스의 추가로 인해 역할놀이는 배제하면서도 경쟁놀이, 우연놀이, 현기증 등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정도 되면 롤은 소환사의 협곡이라는 대표적 플레이 뿐이 아닌, 정말 다양한 놀이 등을 갖춘 '플랫폼'이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소환사 협곡이 질리면 칼바람, 롤토체스를 하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탐닉'의 상한선을 없애버린다.

 

 이는 탐닉의 상한선을 없앤다. 한 번 한 번 모두 다 다른 놀이들이기 때문에.

 

 내가 이 굴레를 굳이 끊을 필요는 없다. 언제고 롤을 지우면 또 생각이 나서 다시 하러 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명확한 사회적 유용성이 요구되는 직업 행위를 해야할 때가 왔을 때에도,

 이 놀이의 굴레에 갖혀서 아무런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정적으로 실패한 인생이다.

 굳이 롤만을 대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 재활 치료를 위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놀이의 특성은 일탈성에 있다. 그러나 놀이에 빠져 일상이 곧 일탈이 되고, 일탈이 곧 일상이 되면,

 

 자살을 이따금씩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