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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나'의 부재(자아정체성 2)

 나는 이미 일찍이 '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선 '나'의 이미지는 곧 사회 공동체가 지정해준 것임을 역설하고 있었다.

 

 다만 그 글에선 '나'라는 언어 기호에 대한 인식의 한계만을 서술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 글에서도 '나'는 이 티스토리를 운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나라 말을 쓰는 어딘가의 아무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이 글을 혹시 보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 역시 '나'라는 지칭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나'라는 언어 기호가 지칭하는 알맹이(사람)가 다른데 어떻게 '나'는 중첩되어 사용될 수 있는가?

 

 당연히 이러한 아이디어는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김존슨 씨이든, 이 글을 보는 돈찰스 씨이든,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나'는 하나의 지시대명사로서 이름 대신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나'라는 언어 기호를 누구든지 공통되게 사용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분명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재반박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대명사'라는 언어 표현에 얽매여 자신의 인식을 한정짓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고 첨언할 수는 있겠다.

 

(후술할 글의 모든 맥락에서 '지시대명사'는 대상의 종류를 불문하고 그러한 형상을 가진 것으로 시각적으로, 보편적 인식 상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전제한다. 예컨대 단어 표현인 '호랑이'도 갖가지 많은 호랑이 개체들의 특수성을 배제한 채 '하나의 표현'으로 지칭되고 있으므로 '호랑이' 역시 지시대명사로 일단 보자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넓은 의미로 일부로 곡해한 것이므로 본 글의 맥락을 읽기 위해선 이를 먼저 보면 좋을 것이다.)

 

 

 

 대명사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언어 표현 그 자체에 어떤 의구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고대인이 숲 속에서 현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언어 표현인 '호랑이'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보았다고 상상했을 때,

그 고대인은 주변 부족민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하여 그 무언가를 꼭 형상화하여 표현해야했을 것이다.

그 무언가는 꼭 우리나라말로 '호랑이'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박수를 세게 5번 침으로써 위급함을 표현했을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기호가 꼭 주변 부족민들에게 언어로 '호랑이'를 표현하는 것과 대등하게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호랑이가 1년 전에 본 호랑이 '호순이'였든, 2년 전에 봐서 서로 안면을 트고 잡아먹지 않도록 구두계약을 나눈 '호동이'이든, 개체별의 차이를 두고 이름을 짓는 것은 이 상황에서 중요하지가 않다.

발견되었던 '호랑이'가 '호순이'였다면 혹시 몰라 잡아 먹힐 수도 있을 것이고, '호동이'였다면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니 주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제일 먼저 '호랑이'를 발견한 고대인과 그 부족민에게 필요한 것은 '호랑이' 그 자체의 위험성에 필적할만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이 문단에서 제일 첫 문장인 '언어 표현 그 자체에 어떤 의구심'이라는 대목은, 이 호랑이의 개체 차이를 언어 표현으로는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다시피 상상의 시나리오 속에서도, 호랑이의 개체 차이를 구태여 언어 표현으로 남기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자연스레 호랑이 A, 호랑이 B의 구분도 필요없이 '호랑이'가 모든 '호랑이 형상을 한' 모든 개체에 대하여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때 '호랑이'의 언어 기호를 '나'로 바꾸어 보면 좋을 것이다.

'나'는 혹시 몰라 범법자일 수도 있고, 마더 테레사와 같은 봉사 정신 투철한 종교인일 수도 있으며, 아무개 국회의원의 자식일 수도 있고, 서울역 노숙자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를 처음 보았을 때 필요한 인식은 무엇일까? 

 

1) 배타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나'들은 서로 '나'를 바라보며 위에 이야기한 고대인과 '호랑이'의 관계처럼, '나'가 정상적인 한국 사람으로서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였다면 먼젓번의 '호랑이'에 상응하는 '위험성'만을 '나'에 대한 주변인들은 인식하게 된다. 말인 즉, 서로 간의 불신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나'는 꼭 '나'를 지칭할 수 있을 만큼의 '형상'만 갖추면 된다.

 

이는 아이러니하지만 대단히 효율적인 인식 방법이다. 대단히 짧은 휴리스틱이기도 한데, '좋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눈치라도 채기 위하여 적어도, 

(1) 드라마에서 '왕자님'으로 나온 사람과 비슷할 정도로 훤칠하고 잘 생기거나 '공주님'처럼 예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2) 경찰서 수배지에 나타난 얼굴이 아닌 사람이어야 '좋은 사람'이다.

---등의 자신만의 휴리스틱을 사용하는 것이다.

 

 

2) '나'가 과연 '대화가 가능한' 대상인지 본다.

이는 시도하기 어렵지만 그 효과는 탁월한 방법으로서, 인간을 해치는 대상인지 판별할 수 있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만일 대화가 가능하다면, 사회적 밈을 공유하는 사람일 것이며, 이는 곧 자신의 공동체로서 포섭될 수 있을만 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자신의 공동체와 동일한 수준의 유무형의 사회적 제재 및 책임 등을 이해할 수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며, 따라서 대화가 가능함은 곧 해당 객체에겐 야만성이 없음을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이때 대화는 꼭 혀, 목청, 입술 등 뿐 아니라 바디 랭귀지 또한 포함될 수 있음을 첨언하겠다.

 

 

 

이 두 가지 판별법(휴리스틱)가 곧 '나'를 보았을 때의 가질 수 있는 인식이며, 이 두 가지는 각각 'DNA로부터 비롯된 근원적 닮음'과 '사회 공동체 속에서 개체별로 교육받는 사회적 밈 하의 소통 가능성'을 의미한다.

 

요컨대, '나'들은 서로 소통하기 위해, '나'가 되기 위해 성립되어야 할 외적 조건들(첫번째 판별법)이 필요하거나, 혹은 '나'와 소통하기 위한 사회적 밈의 전달이 가능할만한 이성, 지성의 존재 유무(두번째 판별법)가 필요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판별법은 사실 여태껏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이미 편지를 쓰는 것이 꼭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편지를 쓰는 것이 앵무새에게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이는 당연히, 언어를 기술하고 문장을 배합할 지성이 있는 동물이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를 맞이한 오늘날의 '나'들에게 이 두 가지 판별법이 혼재되지 않고 있음에 주의하라.

 

예컨대, 심심이와의 카톡은 어떠한가?

단지 사람들의 매크로적인 답변을 하는 '심심이'라는 프로그램은 인공지능이라 하기에도 조금 거시기한 것이 사실일 정도이지만, 축적되는 데이터의 양에 따라 '심심이'와의 카톡은 정말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딥러닝 인공지능의 결과물은 꼭 그림, 바둑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나'들은 기계가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대신 할 수 있으리라고만 예상하는 것인가?

 

다시 돌아와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칭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근본은 무엇인가?

상술하였듯,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꼭 인간 외에는 없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런데 인공지능 등으로 언어의 활용을 모방할 수 있다면 과연 언어의 활용이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제한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꾸밈이 없는 채팅방에서 혼자 채팅을 쳤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이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적어도 과거에는 '인간'이 답장을 하였다고 간단히 예측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프로그래밍 되었을 뿐인 대답이었다면 어떠한가?

적어도 '인공지능'이라는 키워드 하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채팅이 꼭 인간과의 채팅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근거가 사라진 것이라 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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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와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일단 무엇을 서술하려 했냐면, 과거에 이미 적었던 것을 요약해서 적으려 하였다.

 

무슨 내용이었나?

'나'라는 대명사가 아무에게나 활용될 수 있음을 의심하였다.

 

어째서?

'나'라는 대명사 하에 김철수, 나영희 등의 이름을 가진 개체별 차이가 실존함에도 사람들은 '나'라는 언어 표현으로 스스로를 묶는 것이 괴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고실험 상, '나'가 '호랑이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보고 빨리 위협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하기 위해선 '호랑이'에 필적할만한 위험성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 표현, 곧 대명사를 활용해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고실험을 해보니, 과거의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 표현 상, 대명사의 존재는 필연적이었으며, 이 대명사로 하여금 서로 간을 빠르게 인식하고 편리하게 언어생활하고 있음을 관측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고 실험 상, 사람은 다른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 두 가지 휴리스틱을 활용하는데, 하나는 시각적 정보를 통한 익숙함을 느끼는 지에 대한 자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대상의 지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화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인공지능 등의 등장으로 절대적인 영역인 줄 알았던 인간 지성이 복제되고 모방될 수 있음을 사람들은 깨우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에 서술한 두번째 휴리스틱은 이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특별한 판별법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상술한 바, 첫번째 휴리스틱, 외관 상의 익숙함 하에서는, 실존하는 위협 등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얻기에는 부족하다. 바로 '인간적인' 모습은 꼭 외관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가 꼭 범죄를 일으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외모만으로 그 사람의 행실을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큰 위험성이 따르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슴도치가 귀엽다고 하여 그 고심도치를 한움큼 쥐어감을 심산으로 손을 뻗으면 당연히 가시에 찔린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이 있다 하여 사람을 살해할 정도의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예쁜 사람이 있다 하여 사람을 토막낼 수 있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태껏 진정 '인간적인' 특성을 고려할 때 이 첫번째 휴리스틱은 그야말로, 기본으로 전제하는 것일 뿐이었다.

요컨대, '인간적인' 특성을 고려할 때 꼭 '인간'으로서의 생체 기관 위치를 일단 고려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적인'이라는 표현으로 표상되는 '도덕성'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다시피, '인간적인' 특성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 기저로서 첫번째 휴리스틱는 그 성능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두번째 휴리스틱, '대화'가 꼭 '인간'으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대화'가 통하면 '도덕성'도 교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그 '대화'마저 모방될만한 것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때 의구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어떤 것이 '인간다움'이며, '도덕성'인가?

요컨대, 인공지능이 한없이 도덕적인 채팅을 칠 수 있으며, 심지어 역대 모든 판례들과 헌법서 등을 저장하여 모든 범죄 사안들에 대하여 어떤 판사보다도 중립적이고 가치 편향적이지 않은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면,(그리고 이것이 실제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 프로젝트라면)

'인간적인' 특성이라 함은 꼭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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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판단 상 과거의 '나'는 '인간적인' 특성이 고유의 것이 아닌, 꼭 모방할 수 있는 것임에 집중하여, 그것이 꼭 실은 없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요컨대, '인간성'은 사회 공동체 내에서 학습되고 교육되어 스스로 존엄성, 인권 등의 가치판단을 다루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신적 유행'이 아닌가 한 것이다. 이 '정신적 유행'은 꼭 '정신적 유행상품'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 사회 공동체에서 유통되는 정신, 가치관 중 하나가 곧 '인간성'이 아닐까 판단한 것이다.

당연히도, 이 가치관이 유통되고 인기를 끌지 않는 사회 공동체 속에서는 첫번째 휴리스틱, 즉 '외관'에만 집중하여 공동체에 대상을 포섭할지 아니면 배제시킬지를 결정할 것이다. 이는 얼핏 '비인간적'이며, 무식하게 보일 것이지만, 실제로는 소규모 공동체(예컨대 가족 및 학급, 반, 동아리 등)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따돌림, 왕따의 원인 양상이다.

단지 외관 상 해당 공동체 내의 '나'가 될 수 없는 배제된 대상물을 선정하는 소규모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판단을 적고, 이를 발전시켜 나간 것이 전에 썼던 글 '자아정체성'이다.

 

다시 요컨대, '고유함'을 특성 중 하나로 하던 '인간성'이 실은 형체도 없는 인공지능이 모방할 수 있을만한 것이므로, 또, 그 결과 '인간성'은 고유하지 않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므로, '인간성', 말인 즉 도덕성 등은 인간의 태생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님을 의미하게 된다.

 

이전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성으로 글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렇다면, '인간성'이 의무교육 등으로 구매할 수 있는 정신적 판매 상품이었다고 한다면, 인간의 태생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던 '인간성'이 실은 그 태생과 관련없는 것이라 한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의 태생과 관련되어 있는 '자아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온전한 가치관 등이 담긴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 공동체가 '유도'한 정신적 도매 상품이 아닌가?"

 

보다 자세한 것은 이전의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이제 오늘의 글을 다시금 서술하길, '나'라는 대명사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위의 휴리스틱 얘기와 연관지어 볼 때, 지시대명사의 활용은 대단히 흥미로운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인과 호랑이의 예시에서, 호랑이의 외관을 통한 구분이 호랑이의 위험성을 공유하기 위한 표현 상 무의미함을 일찍이 이야기하였다. 이때의 주안점은 단지 '생존의 위험성'이었으므로, 그 대상의 개체별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그 개체의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호랑이'라는 표현만으로 충분하였다.

 

다만, 이것이 '나'와 '너'의 만남인 경우에는 어떨까?

상기하였듯, 두 가지의 휴리스틱 상 '나'와 '너'는 서로 간의 외관을 바라보고, 대화를 해볼 터인데, 이것은 '생존의 위험성'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적어도 '호랑이'보다는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호랑이와 대화 시도를 한다면, 문답무용으로 호랑이는 이빨부터 들이댈 것이다.

다만 혹여나 가방 속에 칼을 숨겨놓은 '너'를 '나'가 만났을지라도, '나'는 일단 외관 상 같은 인간으로 보이는 '너'에 대해 당연히 대화를 먼저 해봄직함은 당연하다. 혹시나 '너'의 변심으로 '나'는 칼에 찔리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역시, 문답무용으로 '너'가 칼을 찌르러 들어온다면, 이 경우 '너'는 호랑이와 동일한 수준의 '생존의 위험성'을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서, 이 경우 비명소리로서 주변인들에게 생존의 위험을 알리게 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입장이 반대였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역시 문답무용으로 찌르러 간다면, '너'도 소리를 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기묘한 점은, 생존의 위험을 느끼는 언어 표현 상, '호랑이'는 호랑이로 표현되고, '상어'는 상어로 표현되지만, '살인자'는 살인자로 표현되지 않고 비명 소리로 치환된다는 것이 기묘하다.)

 

이러한 걱정을 길가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이성을 지레 짐작하는데,

(그것은 앞서 서술하였듯, 인공지능의 모방으로 인하여 인간 이성의 위대함, 고유함 등은 꼭 특출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일단 이는 차치하고.)

 

중요한 점은, 이때 '나'라는 대명사의 활용에는 꼭 유도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개체별의 차이를 하나의 언어 표현으로 묶어놓기 위해선, 해당 개체들을 일반화시키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으리라 가정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자'를 상상한다고 했을 때,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꼭 책상에만, 식탁에만 쓰이는 것이 의자인 것은 아니다. 길가 위의 공터에서도 돌무더기 속에서 의자를 발견할 수 있고,

심지어 요가공은 둥글둥글하고 외관상 도저히 앉을 수도 없을 것 같지만 푹신하여 어떻게든 잠시라도 의자의 역할을 할 수는 있다.

이는 개체별 차이를 막론하고 그 쓰임("의자는 앉을 수 있는 것")

 

 

 

 

 

 

000000 8/21 23:33 수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