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씻고, 밥 먹으면서 상상한 가설에 대해 적고자 한다.
다음 가설을 생각한지는 1시간밖에 안 되었으므로, 신빙성은 없다.
이 가설(사실은 상상)을 이야기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1.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 것은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음식을 먹는 등의 행위를 통해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등의 행위를 포함한다.
2.고통을 느낀 당장은 도파민의 분비로 인하여 그 체감 정도가 작지만, 시간이 지나게 되면 고통은 커진다.(원래의 고통이 느껴진다.)
3.외부 위험 혹은 병리적 위험이 존재할 때, 그것들에 대한 방어기제로써 사람은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의 수준에 따라(고통에 대한 방어기제로써)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은 고통-진통의 기저 중 하나일 것이다.
4.이때 '위험'의 종류는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 종류에 무관하게 사람에게 고통을 전가시킬만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5.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볼 때 거울신경을 통해 고통을 공감할 수 있다. 선천적 장애로 인하여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할 경우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6.공포는 단순히 괴물, 귀신, 좀비 등의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으로부터 올 수도 있지만, 코즈믹 호러 등을 위시한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혹은 '보이지 않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부터 야기될 수도 있다.
7.멀미는 시각정보와 신체(진동)의 움직임이 일치하지 않을 때 야기되는 현상으로,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차를 조종하는 운전자가 되면 멀미가 일어날 확률이 극히 줄어들지만, 가만히 있는 승객 입장에서는 멀미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8.피실험자에게 어떤 문제를 물었을 때, 피실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틀린 답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피실험자는 명백하게 정답으로 인식한 것을 무시하고, 대중과 덩달아 틀린 답을 이야기할 확률이 높다.(인지부조화 실험)
이는 문제 정답 여부와 관계없이,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틀린 답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그 답의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말인 즉, 대중이 고른 '틀린 답'은, (1)틀린 답을 고르지 않으면 큰일나는 상황(암묵적인 룰, 불문율 등)을 암시한다든지, (2)피실험자 스스로 정답과 오답을 혼동시키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피실험자의 학습 정도에 무관한게, 대중의 의식 수준에 의해 해당 집단 전체의 답이 결정된다.)
이는 인지부조화 현상 때문이다. 단순히 내가 알고있는 것과 다르게 주변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내가 받아들이게 된다는 추상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실제로, 인지부조화에 의해 어떤 대상이 결과론적으로 실제 가치보다도 더 높게 책정된다는 것이 요점이다.
9.(상상) 인지부조화 실험에서, 피실험자 한 명에게 해당 실험 사실을 알리되, 실험 시작부터 배치한 '틀린 답을 외치는 조연들'은 고정시키고, 생판 실험에 대해 알지못하는 또다른 대중들을 지속적으로 투입시키면, 그리고 그 대중들이 틀린 답을 덩달아 모두 외침과 동시에 추가로 외부인들이 계속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피실험자는 정답을 말할 수 있을까?
지속적으로 틀린 답을 외치는 무한히 많은 사람이 주변에 계속 모이고 있을 때, 그 한 명의 피실험자는 실험 여부를 떠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4÷2(2+2)=?
이 문제의 답이 1/2인지, 8인지는 2(2+2)로 묶어서 볼 건지, (2+2)를 따로 떼어서 볼 건지에 따라 다르다(고 상상해보자)
그런데, 이 문제의 답을 8이라 하는 사람 한 명을 피실험자로서 광장에 앉혀놓고, 주변에 1/2이라 이야기하라 시킨 조연들을 15명 앉혀놓은 뒤, 광장 전체에 해당 문제를 널리 약 1시간동안 광고하여, 광장내 분위기가 1/2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피실험자에게 답을 묻는 방송화면을 전국적으로 띄운다면 어떨까?
사실 이런 상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지부조화 자체만으로 스트레스를 받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설(상상) :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위험 요소에 대해 고통을 장기간 느끼는 사람은 공포를 느끼고, 해당 위험과 공포로부터 도출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인지부조화를 없애기 위해) 자신 혹은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평소 익명 커뮤니티 내에서 대단히 무의미한 논제로 부모욕을 하고, 심지어 살인협박까지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도출되었다.
1.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위험 요소란? : 사실 해당 위험 요소가 실재하면, 위 가설대로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문제는, 위험 요소가 실존하지 않는, 단순한 루머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열불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때 위험 요소는 사실 위험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단지 그 소재를 가지고 사람들과 논쟁하여 스트레스를 받을 수만 있으면 된다.(맥거핀)
예컨대,
ある日、私は森に迷ってしまった。
어느 날, 나는 숲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夜になりお腹も減ってきた。
밤이 되어 배도 고파졌다.
そんな中、一軒のお店を見つけた。
그런 가운데, 한 식당을 찾아냈다.
「ここはとあるレストラン」
「여기는 어떤 레스토랑」
変な名前の店だ。
이상한 이름의 식당이다.
私は人気メニューの「ナポリタン」を注文する。
나는 인기 메뉴인 「나폴리탄」을 주문한다.
数分後、ナポリタンがくる。私は食べる。
몇 분 후, 나폴리탄이 온다. 나는 먹는다.
……なんか変だ。しょっぱい。変にしょっぱい。頭が痛い。
……어쩐지 이상하다. 짜다. 이상하게 짜다. 머리가 아프다.
私は苦情を言った。
나는 불평을 늘어 놓았다.
店長:「すいません作り直します。御代も結構です。」
점장:「죄송합니다. 다시 만들겠습니다. 돈은 안 내셔도 됩니다.」
数分後、ナポリタンがくる。私は食べる。今度は平気みたいだ。
몇 분 후, 나폴리탄이 온다. 나는 먹는다. 이번에는 멀쩡해 보인다.
私は店をでる。
나는 식당을 나온다.
しばらくして、私は気づいてしまった……
잠시 후, 나는 눈치채고 말았다……
ここはとあるレストラン……
여기는 어떤 레스토랑……
人気メニューは……ナポリタン……
인기 메뉴는……나폴리탄……
이런 개소리를 주제로, 갑자기 교양과목 교수가 "나폴리탄이 무엇인가? 나폴리탄의 정체에 대해 학생들 과반수 이상이 동일한 답안을 내놓을 시에만 답으로 인정함."이렇게 과제를 낸다면 어떨까?
전혀 위험 요소라고 할 수도 없는 '생뚱맞은 과제의 과제 점수, 배점' 이런 것으로 인하여 학생들은 충분히 서로 간에 다소간의 논쟁을 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미소한 스트레스를 야기할 것이다. 그나마 이 경우는 건설적인 논쟁이다.
....여러 가지 '무의미한 논쟁'의 예를 들어 스트레스를 논하고자 했는데, 쓰다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하 내용을 다 지웠다.
2. 고통을 장기간 느끼는 사람은 공포를 느끼고, 해당 위험과 공포로부터 도출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인지부조화를 없애기 위해) 자신 혹은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어떤 위험 요소가 장기간 관측(혹은 상상)될시,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 혹은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관측함으로서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시각화하여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이 오늘 가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인지부조화'가 여기에 도입되어야 한다.
말인 즉, '정신적 고통'을 장기간 받은 사람은 뇌과학적으로는 '신체적 고통'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이것을 체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신체적 고통'을 (추가로) 느낌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체감하려 한다는 것이다.
(?) 왜 정신적 고통이 신체적 고통을 야기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정신적 고통'은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뇌과학적으로 무슨 신경전달물질의 분비 이상, 재흡수 이상, 호르몬 분비 이상을 떠나서 오감으로 체감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그 정신적 고통이 실존하는 위험요소에서 유래한 것이든,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인한 것이든 무관하게, 정신적 고통 자체는 체감하기가 힘든 것이다.
왜냐, 그것은 '공감'의 한계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의, 혹은 다른 동물들의 신체적 고통을 보면서 거울 신경을 통해 신체적으로 고통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정신적 고통의 공감은 대단히 체감하기 힘들다.
실제로는 타인의 정신적 고통을 체감한다는 것은, '그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신체적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울고, 머리를 부여잡거나 뜯으며, 자해를 하거나 손톱을 물어뜯고 바닥을 할퀴고 하는 일련의 발작적인 행동은, 그러한 행동을 자행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기보단, 오롯이 시각, 청각적인 고통을 타인에게 전도(공감)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자기자신이라면, 단지 시각, 청각에 미각, 후각, 촉각(통각 포함)이 추가될 뿐으로, 마찬가지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보여지는 자신의 이상 행동으로부터 신체적 고통이 도출되지 않는 이상 정신적 고통을 분출, 해소, 표현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는 자기자신'은 이미 뇌에서 해당 정신적 고통에 준하는 신체적 고통을 전기자극으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오감으로부터 인식되는, 즉, 외부자극으로부터 인식되는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하지 못하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추가로 자신으로부터 신체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관측함으로서 거울 신경을 통해 신체적 고통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때 '시각화'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단어로, '청각화'로 바꿔도 되고, 여러 단어로 바꾸어도 될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시각화되지 않기 때문에 얻어지는 공포'이다. 즉, 어두운 골목길이나, 어두운 밀실의 구석진 곳의 '무언가', 아니면 위에 쓰인 '나폴리탄 음식'처럼, 이해할 수 없거나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으나 분명 존재하고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서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분명 정신적 고통은 실존하지만, 그것을 시각화하고 표현하기가 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인지부조화(분명 있는데요. 안 보입니다)로 추가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장기화될 경우 정신적 고통의 해소를 위해 그에 준하는 신체적 고통을 관측하고자 이상행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또 요점은 이것이다. 신체적 고통은 굳이 자기의 것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이다.
타인에게 날리는 독설, 욕설, 부모욕, 살해협박, 공갈 등은 타인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타인에게 공포를 느끼게 해서 무엇이 좋은가?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위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타인의 고통으로 해소한다는 이야기는 바로 위의 과정 때문일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저녁 먹다가 한 상상의 가설이므로 신빙성은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타인의 고통'이란 신체적 고통만을 뜻한다.
(?)아니, 욕설밖에 안 했는데 어떻게 그게 신체적 고통으로 이어지는가? 논리의 비약 아닌가?
여기서 중요한 점은, 거울 신경이다. 이는 사실 사람의 공감 능력이 환원론적으로 어떤 기관에 대응되고 있다는 의미로 붙인 용어일뿐으로, 실상 중요한 건 사람의 상상력이다.
바로, 욕설을 내뱉는 사람은, 해당 욕설을 들은 사람이 받을 정신적 고통, 그리고 그로부터 (위의 가설처럼 그대로) 이어질 신체적 고통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으로부터 (욕설을 내뱉은)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그에 부합되는 시각적 정보(욕설을 들은 사람이 광광 울어버릴 경우)로부터 그이의 신체적 고통을 [추상화로 그려서] 상상해서 자신의 (인지부조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람이 우는 걸 가지고 그 사람이 무슨 신체적 고통을 야기할지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상상력이,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에 한하여 스토킹, 지속적인 욕설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연예인에 대한 악플이 있다. 악플러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다소 정신이상자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악플러는 자신이 악플러인지 모른다. 그보다 악플러는 스스로를 '억울한 사람'이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악플러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대중에 속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구한 운명은 사회적 분위기의 궤를 같이 한다.
말인 즉, 현대 사회 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아무개의 소원은 단지 일주일에 치킨 3마리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 돈을 가지는 것이었으나, 연애에 실패하거나,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거나, 주식이 5년동안 박스권에 머무르거나, 코인 떡락하거나 하는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살아가는 소시민들 한 명 한 명과,
날때부터 금수저인 아무개의 ...(금수저 인생 스토리1), (2), (3)을 지낸 사람 한 명 한 명과 다름이 없다.
개중에서도, 특히나 공감능력이 부족할 경우, 자신에게 놓인 정신적 고통을 시각화하기 위해 연예인에게 정말 억척스럽게 계속 악플을 다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의해 너무나 잘 보이기 때문이다.
악플을 장기간 달아 연예인이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 언론에 찍히면, 악플러들은 그제서야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왜냐, 그렇게나 유명한 연예인이 신체적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 비대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내 자신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일까.하고 여기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악플러는 자신의 악플이 해당 연예인에게 확실하게 전달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며,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타인의 신체적 고통으로 해소한다는 방법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악플러는 태어날 때부터 악플러가 아니라는 것이다.
흙수저든 금수저든 자신이 기구한 운명에 놓여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에게 힘든 일이 있다고 분명 반드시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연예인은 기사에서 항상 행복하게 보여(지기를 강요받고 있으니), 그러한 존재의 신체적 고통을 관측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고통의 비대함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섭게 들릴 수도 있으나, 자신의 정신적 고통이 심각하면 심할수록, 장기화되면 될수록 그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할 대상은 자신을 뛰어넘어, 일반 연예인도 뛰어넘어 세계구급의 아무개를 향할 수도 있으며, 단순히 악플만을 남기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는 단순히 '정신이상'으로만 단정지어진다)
(?)아니,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하려는 사람이라면, 저 멀리 사는 연예인을 볼 것이 아니라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들, 친구나 가족, 친척을 향할 수도 있지 않나?
그것이 무서운 점이다. 대단히 무서운 점이다.
일반적인 사람의 경우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법적 효력 내지는 사회적 파장을 지니는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고 가정하고 싶다.) 그런데,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대단히 부족할 경우, 즉, 영화나 소설에서의 캐릭터의 신체적 고통 호소를 공감하기 힘들 정도로 공감능력이 부족할 경우,(어떤 미디어 매체로도 정신적 고통을 해소할 수 없을 경우)
자신의 정신적 고통 호소를 위해 (술기운을 빌려) 가족에게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보통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단어 하나로 대치시킬 수는 없다. 단지 울게 만들거나, 무릎을 꿇게 만든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상기한 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또한,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하는 대상은 '자기자신'인 경우가 훨씬 많다. 보통 정상적이라면, 자신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표상을 울음으로서 표현한다.(다만, 이것이 심각해질 경우 자해를 하여 꼭 피를 봐야만 정신적 고통과 대치되는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이해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극히 부족한 경우, 가족에게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표출하는 경우가 생긴다. 말인 즉, 가족을 대상으로 신체적 고통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혹은 친구나 친척에게. 그러나 대개 가족을 대상으로 많이 한다. 왜냐, 가족은 친구나 친척보다도 더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만으로 자신의 (비대해졌다 생각하는) 정신적 고통을 자주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 그러한 경우, 맨정신에서의 자신의 정신적 고통으로 그러한 손찌검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인데도, 단지 술기운을 빌려서 미필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벌이는 것이다. 관건은 맨정신에서의 정신적 고통에 있다.
다만, 그 정신적 고통의 유래가 실존하는 위험 요소인지, 가상의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단지 술만 먹지 않는다고 하여 폭력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술은 단지 미필적 수단으로, 술을 먹지 않아도 폭력이 발생함은 이미 유치원생 사이에서도 폭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치원생이 폭력을 자행할 정신적 고통과 성인이 가족에게 폭력을 자행할 정신적 고통이 과연 비교대상인가?
그것은 사회화의 정도에 따라 정신적 고통이 도출될만한 위험 요소의 구분이 다를 뿐으로, 트리거는 언제든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폭력이 일어났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유치원생과 성인이 '타인의 신체적 고통'을 관측함으로서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어떤 수준의 폭력이 일어났든지간에 유치원생과 성인이 선택한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방법은 원론적으로 같은 것이다.
(?)커뮤니티 상에서 보이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전쟁은 대체 무슨 위험 요소로 발생하는 것이며, 어떻게 신체적 고통을 시각화한다는 것인가?
앞서 예시로 든 나폴리탄 괴담처럼, 인터넷 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제로도, 아무 의미없는 주제로도 단지 '상대방과 나의 의견이 다른 것'이 이루어짐에 더해, '상대방과 나의 이견을 각각 지지하는 대중이 존재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에게 스트레스를 전가시킬 수 있는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말인 즉, 상대방과 나의 의견이 다른 현상 자체는 당연한 것이며, 이것 자체로는 전혀 논쟁거리가 될 수 없으나, 수많은 커뮤니티에서는 게시글 혹은 댓글의 '추천기능' 및 '대댓글' 기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곱씹어봐도 개소리같은 것으로 보이는 글이 추천수 100일 때, 그것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일단 개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똑같은 개소리가 1:1 익명 채팅방에서 나타났다면, 그것에 대해 반박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박할 필요도 못느끼고 나갈 것이다. 혹은, 논쟁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쌍욕, 부모욕, 살해협박은 전혀 일어날 의미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스트레스 요인'(=위험 요인)이 발생하면, 그것에 따른 스트레스 해소로 '신체적 고통의 시각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적어도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채팅만으로는 시각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A:소새끼 말새끼 이놈아~! (추천: 100 비추:1)
B:아유 말씀 너무 무섭습니다. 저 지금 광광 울부짖은 뒤 쭈그리고 앉아 머리 감싸고 눈물 뚝뚝 흘리고 있습니다.
하고 답장하지 않는 이상, 절대 커뮤니티 상에서 상대방의, 혹은 자신의 신체적 고통에 대한 시각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하다못해 소설상으로의 신체적 고통에 대한 시각화(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티 상에서의 언쟁은 필연적으로 소모전으로밖에 끝날 수 없으며,
만일 위의 농담같은 문답으로도 B가 실제로 자살했다 해도 A는 답장없는 B에 대해 계속 높은 추천수를 받으며 죽어라고 욕을 해댈 것이다.
여기까지 개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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