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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상대를 바라봄이 아니라 감정을 표출함이다.

 수많은 정보가 담긴 대학 교재에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 책으로부터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소설책을 읽더라도, 필자의 필력이 어떠하든 가독성에 의해 얼마든지 글의 느낌은 달라진다.

 말인 즉, 글이 담긴 책 자체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을 수가 없다.

 책이 감정을 말해주지는 못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도 중학교 교과서에 의인화, 의인화 하다보니 별 시뮬라크르에도 인간적인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왜냐, 사람은 정보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정보의 진위 여부에도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이 좋아할 수 있다.

 

 

 이는 인간에게도 통용된다.

 발언자가 어떠한 의도로 어떤 의미없는 말을 꺼낸다해도, 청취자의 입장에서, 시청자의 입장에서 발언자를 향한 일말의 감정은 오로지 주관적인 것이다.

 발언자의 의도, 발언의 진위 여부 등은 꼭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오로지 발언자의 얼굴 표정, 목소리 톤, 말의 빠르기 등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청취자, 시청자의 주관만 남아있을 뿐이다.

 

 발언자의 의도라고 불리울 수 있는 모든 것들엔 형체가 없다.

 설령 발언자 자기 자신이 어떠한 의도로 어떤 것을 이야기했다고 할지라도, 거기엔 100%의 진위여부를 가릴 명확한 무언가가 존재하진 않는다.

 왜냐, 자기 자신마저도 자신의 기억을 왜곡할 수 있고, 기억 못할 수도 있고, 타인에 의해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도'라는 단어는 내가 보기엔 사라져도 될만한 단어이다.

 사람의 행태, 감정을 어떻게든 언어적 수식에 끼워맞추기 위해, 자신의 논리적 이해에 스스로 자위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이다.

 

 그것은 이제 시뮬라크르와 다름이 없다. 왜냐, 상기한 본문의 생각을 그대로 믿는다면, 타인을 바라보는 모든 자신의 줏대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순간, 자기 자신 역시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주관으로서의 존재밖에 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마저 가상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판단은 옳다.

 

 

 

 이를 실생활에 보다 접목시켜 본다면 이렇게 서술할 수 있다.

 유튜브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영상이 올라왔음에도 보게 되는 경우,

 그런 영상은 대체 왜 올라온 것이며, 왜 보는 것이며, 왜 어떤 경우 조회수도 폭발적인 것일까?

 

 언어와 비언어적 표현의 궤도를 벗어난 또다른 '언어', 그러나 '언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이다.

 그 아무 의미없는 영상을 바라보면서 생각해낸 자신의 의문, 그리고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답답한 마음에 만들어낸 자신 나름의 대답, 그리고 그것의 표출 등의 일련의 과정은 모두 자신이 조작해내는 정보이며 가상의 이미지이다.

 그 영상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주변,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실상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음을, '본래의 것'은 없고 오로지 '이미지'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는 비단 그런 무의미한 영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정보가 담긴 교육용 영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용 영상이라고 했음에도 그것은 실상 무의미하거나 틀린 정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보를 가지고 재해석하고 자위하고 나름대로 활용하는 일부 족속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것은 옳은 정보가 된다.

 혹은, 단지 정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게 아니라, 그 정보를 알려주는 잘생기거나 예쁜 화자를 바라보는 것일 수 도 있다.

 그렇게나, 사람은 이미지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시각장애인이라 한다면, 청각 정보에 이끌릴 것이다. 사람이 자극에 이끌리는 데에 있어서 자극에 대한 정보는 꼭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극이 역치를 넘어설 수 있는지만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