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mptiness

우물 밖만을 바라보다 우물 안 올챙이적 시절을 외면하고 있나?

 나는 우물이라는 심볼에 집중할 필요없이,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내가 어느 누구와 연결되며 내 세상을 넓혀나갔는지를 봐야한다.

 

 기본적으로 내 세상의 첫 시작은 내 가족의 테두리 안이었으며,

 내 가족을 벗어나 학교에 가며  나의 세상은 그들 또래의 세상과 겹쳐져 어우러진다.

 조화롭든, 조화롭지 못하든 나의 세상은 넓어진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내 세상은 단지 학교에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의 테두리 안에 그 종착역인 대학을 와서 나는 죽음으로 생을 끝내야 했던가?

 아니다.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죽어야 했음이 아니다.

 학교 다음의 세상은 도저히, 내 시야에 담을 수 없을만큼 너무나 넓기도 하였기에,

 오히려 나는 내 세상을 학교 안에만 좁혔던 것이었으리라.

 

 나는 학교가 끝이었던 세상을 벗어나 내 이름, 내 얼굴, 내 언어를 이루는 그 근간을 바라보아야 했음이다.

 내 세상은 내가 쓰는 언어 이 자체에 있던 것이며,

 그 언어가 말해주는 모든 것은 지금 당장에 나는 '책임'을 져야할 성인이 되었음을 비추고 있었음이라.

 

 나는 '책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지 못한 채로 어디까지 부모의 품 안에서 젖과 꿀만을 바라보는 식충이가 아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세상을 대단히 많이 확장시켜왔다고 자평한다.

 

 그런데, 그 확장 끝에 나에게 남은 것은 타의적 편집증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전개된 모든 내 미래의 청사진과 내 인격, 내 태도, 내 언어활동은 내가 결론지은 나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였던 듯 싶다.

 그러나, 군대에서 익히 배웠듯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이는 누구에게나 견제를 받고, 어우러짐이 없으며, 그 조직을 와해시킬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처럼, 나의 특이함은 타인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하였던 것 같다.

 

 타인들이 모두 좋아할만한 공통분모를 표상하는 인간은 신밖에 존재할 수 없다.

 선별적으로 뭉쳐진 타인들에게 자신의 소신을 일정하게 들이대는 것은 나의 고립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선별적으로 뭉쳐진 '타인들'이라는 집합은 그 자체로 이미 같은 거죽, 같은 언어, 같은 교육을 받아온 한민족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단지 같은 유전적 이끌림, 같은 개인적 취향(그것은 꼭 사회화와 관련이 없을 수 있다)에 의해 저 스스로 모인 것이었으리라.

 그렇기에, 모두가 다 하나의 민족을 표상한다는 교과서의 서술은 세계화에 도리어 어울리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우물안 개구리 양성밖에 더 되지 못하였던 듯 싶다.

 나는 그것을 성인이 되어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고, 오늘에 생각정리를 하다 발견했을 뿐이리라.

 

 

 차설, 

 내가 그렇게 우물 밖을 동경하여 나의 그릇을 키워나가다보니, 내 자신의 문화적인 선천적 한계를 자꾸만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선천적 한계, 가정사라든지, 돈이라든지 하는 그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적 깨달음과 소신, 신념만으로 아름다워지지 못한다.

 나는 나의 아름다움을 일깨웠을지라도, 타인이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나는 타인에 의해 편집증으로 판정된다.

 나는 졸지에 편집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우스운 점은, 나는 편집증이라는 단어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기뻤다.

 나는 나의 아름다움이 나만의 독보적인 것이라 자위하기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니 슬프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실은 나의 아름다움은 망상장애이고, 타인이 인정하는 정신병이라 평가받을 수 있다하니,

 나는 8년 간의 내면 확장이 편집증으로 어떻게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는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뻤다.

 

 그 정도로, 나는 혼자 여기 내 방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넓어졌던 내 세상은 망상장애이고, 아직까지 내 몸은 여기 8평에서 못 벗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지난 8년간 딱히 없었다고 자평해왔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내 방에서 야간에 출근을 하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내가 대체 무슨..

 

 내가 대체 무슨 정신적 깨달음이겠거니 무슨 유튜브니 무슨 뭐니 하는 것들의 허울을 여실히 느끼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우물 밖을 일찍이 동경하였으나, 이 우물의 크기를 내가 잘못 쟀던 듯 싶다.

 우물 밖을 나갈 수 있었던 건 인터넷을 헤엄치던 내 캐릭터뿐, 내 몸뚱아리는 아직도 8평에 잠겨있었다.

 

 내가 얼마나 깨끗이 살아왔고, 얼마나 문제 일으키지 않으려고 참아왔는지를 여기에 뱉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변할 수 없는 선천적인 한계를 언제까지고 내가 죽을 때까지 직시해야함을 나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치스러운 얘기를 타인에게도 보여주는 까닭은, 누군가 정신병이라 이야기했던 그이의 머릿속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