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깨달은 것은, 불안감이 가지는 무의미함에 대한 것이었다.
"취업에 대한 불안감, 그 취업을 성사시키지 못할 요소인 학점, 인턴 경험, 동아리 경험, 프로젝트 경험 등이 부족한 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것을 뒤집기 위했어야 할 하나의 또 다른 요소인 학벌, 수능 성적, 그리고 그 고등학교 성적을 다시 메꾸기 위했어야 했을 중고등학생 때의 수험 생활 ...."
이 모든 불안감은 그 시초가 확연하고, 논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불안감은 나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위의 여타 다른 불안감은, 안좋은 결말에 대한 선제적 판단의 활용도구로서 의미있다고 착각되고 있지만,
그 선결적 판단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이 인생을 미리 살아보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 전지자로부터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들 중의 한 부분부분들을 이토록이나 불안해하면서 맞이하려고 할까?
소설 속 인물들처럼 확실하게 앞으로의 해피엔딩을 기약하고자 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감정은 필연적으로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코르티솔, 세로토닌 등등의 물질들과, 심지어 그 이전 단계인, RNA 전사 인자의 후생유전학적 유전 또한 연관되어 발생한다.
그 와중에, 감정의 기복, 기쁨과 슬픔, 행복함과 우울은 당연히 실존하는 감정이다.
그것이 어떤 과학적, 환원주의적 해석 하에 단지 '몇 g의 물질'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봤자, 그 감정의 기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안'이라는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허울'뿐인 감정은, 실존하지 않아야 함에도 실존하는 것처럼 착각된다.
나는 지금, 이 불안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유'된다고 하였다.
말인 즉, 위에서 내가 한 질문, "나는 먼저 살아본 것도 아닌데, 왜 불안할까?"라는 질문의 해답은
바로, 내 주위의 사람이 대신 '상상해서 만들어놓은 답안'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그 답안을 따라갈 필요도, 그 답안을 따를 수밖에 없을 운명적 당위성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그대로 믿기까지 한다. '불안'이라는 허상을 '타인의 상상, 현실'로부터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타인이 만들어놓은 내 불안의 해답'에는, 타인의 상상뿐 아니라, 타인의 현실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2019년 하반기 취업 시장은 작년, 재작년에 비하여 실질적으로 대단히 얼어붙었고,
이 사실을 OOO 곡해하든, 실제로 취업 시장이 그러한 것을 포장할 순 없다.
실제로 대학생들이 느끼는 취업 시장은 예년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 자신이 가지는 취업 시장에 대한 불안감을, 타인으로부터 찾아선 안 된다.
왜냐하면, 설령 타인의 현실로부터 내 불안을 해석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곧이 곧대로 나의 현실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고, 하다못해 소설적인 것으로, 지나친 낙관론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게 보라.
어디까지나, 성인이 된 이상, 판단은 자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찍이, 나는 유아기,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가 되는 과정을 서술한 적이 있다.
이때, 유아기와 청년기에서는, 오로지 자기정체성이 타인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로그래밍된 기계를 사람이라고 볼 수 없듯이, 사람은 그 타인으로부터 전적으로 형성된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영향을 또 준다. 이때, 이 영향을 주는 단계에서 사람은 주체적인 판단을 한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 등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항상, 적어도 나라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왕족이 필요하다고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던 반면, 그것을 억누를 정도의 부르주아 계층의 개인적 욕구가 실존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주체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오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그 가정조차 믿지 못하여 스스로 이인증에 걸릴 정도로 나 자신을 길가의 자갈과 똑같이 볼 정도로 낮추었는데,
오늘 내가 가지는 생각을 해석하기 위해선 그 가정을 꼭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인정해야만 내가 편해짐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사람의 주체적 판단 하에, 사람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까진 하지 않겠다. 다만,
타인의 상상이든, 현실이든, 그것이 내 안에서 불안을 야기하는 것에 대해,
그 불안이 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시, 보다 쉽게 말하자면, 내 주변의 상황들, 타인의 조언들로부터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대변하는 듯한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세로토닌의 분비 부족, 에피네프린의 재흡수 부족 등의 일로 일어나는 '기분 나쁨', '우울' 등의 감정과 동일한 것이다. 말인 즉,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그것을 새삼스레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불안'이 '우울'과 다른 영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불안'은 꼭 타인에게 심각하게 전염된다. 우울도 마찬가지이지만, 우울은 하물며 당사자에게도, 어떤 기쁜 일이 생기면 사라질만한 단순한 감정이다.
그러나 '불안'은 프랑스 혁명 등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집단 공유감'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훌륭하든, 훌륭하지 못하든, 실질적으로 현 사회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말인 즉, 나의 개인적 불안은, 타인으로부터 해석되어, 타인에게 전가되고, 공동체적으로 변화를 야기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필연적으로 좋고 나쁨의 결과론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사회 변화는 경제 성장, 복지 증대, 수세 증가, 일자리 창출과 연관되어 있되,
꼭 사회 변화가 그것들의 + 변화를 야기하는지, - 변화를 야기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다못해 역사가, 과학철학자 역시 어떤 역사의 흐름은 방향성이 없이, 단지 누적, 축적의 결과물에 의한 것일 뿐임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나 한 명의 불안이 가지는 무의미함은 어찌나 불확정적이고 무의미한가?
그러니, 불안은 무의미한 것이다.
여기서 무의미함은, 사회 변화를 꼭 창출시키고자 하는 나의 목적이 없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그저 나 혼자 벌어먹고 살 돈만 버는 월급쟁이만 되면 좋겠다는 실리적 관점 때문에 그리 해석되는 것이다.
불안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입시 학원이나, 입시 시장이나, 입학사정관 등은 앞으로 있을 취업 시장의 어떠한 연관성도 없이,
그저 자아정체성을 타인에게 주입받기만 할 성장기의 사람들에게 불안을 주입하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다.
취업 시장은 아직 경험하지 못해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위의 양상은 똑같을 것이다. 취업하기 위한 면접, 자소서 학원, 중소기업 인턴 등이 불안을 이용할 것이며,
취업 외의 부분에서 돈을 벌기 위한 사람의 욕구를 자극하는, 주식 오르는 종목 족집게 강의, 펀드 매니저, 은행가 찌라시 등의 '불안'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업 등이 있을 것이고, 이 불안의 전파를 총괄하기 위한 '정치'도 있을 것이다.
실상 그 '정치'의 태동(=불안)과 실제 공무는 사실 별 관련이 없음에도.
다만, 사람들이 공무원에 집착하면서, 공무까지 '불안'의 요소가 심화되고 있음은, 그리스의 양상과 똑같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난 불안하다고 생각하진 않되, 사회의 불안이 증가되고 있음은 관측할 수 있다.
설령, 우리나라가 그리스처럼 되어도, 시민 개개인은 해외로 떠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계속 우리나라 내적인 불안을 계속 가지고 사는 이유는, 그 불안에 예속됨이 당연하다듯이 타인들로부터 학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지금 당장 취업 시장이 어려워 먹고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나의 불안은,
무의미함만 알면, 편해진다는 것을 나는 여기에 적고 싶었다.
불안해봤자, 실제로 달라질 건 없다.
기분이 좋으면, 타인에게도 기분 좋을만한 무언가를 전가시킬 수 있다.
기분이 나쁘면, 타인에게 그것을 전가시킬 수도 있으되, 그것은 단지 밥 한 끼 먹으면 사라질 수도 있을 한순간의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전가시켜봤자, 나아질 방법이 없다. 왜냐면, 불안은 단 한 가지의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해당 집단 머릿수만큼이나 불안의 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만인의 불안을 해결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천국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하다.
그렇다면, 불안을 애써 무시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유사 천국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사이비 종교와 마찬가지인 것 아니냐고 되묻는 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등을 믿으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사회는 계속 좋든 나쁘든 변화한다.
출산율이 오르든 낮든, 사회는 무조건 변화한다. 그 끝에 국가라는 주체가 그저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될지라도, 무조건 변화한다. 단지 불안 때문에.
그러니 불안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고 먼저 생각하는 한 사람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사회는 필시 정체되겠지.
그럼에도, 그 정체는 반드시 깨지게 되어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에겐 불안을 유입시키기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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