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가 화를 냄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일이듯,
아무개가 선행을 하는 것은 꼭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왜 이 생각이 불편하냐면, 도덕관념은 마치 성선설과 같이 작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의 이미지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선행을 베풀고 나누며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잔인하며 악행을 매번 행한다고 믿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
나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과 악행을 이루는 사람이 동일하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선행을 베풀 것으로 기대되는 아무개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악행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아무개에 대한 나의 의심과 정확히 동일한 크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합리적인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중고등학교 도덕책에는 이것이 쓰여있지 않은데, 이러한 인식은 마치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단지 그보다 허무맹랑할 뿐인 도덕관으로만 덧칠한다면, 해당 공동체를 그리 하도록 유도하는 아무개 집단은 그대로 와해될 것이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포인트를 잘못 짚은 것이다.
공동체가 가상의 이미지라는 것을 인식하기 보다, 나 개인이 가지는 도덕 심상이 더욱이 가상에 가깝다고 인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는 일평생 사법처리를 받을 죄를 짓지는 않았다. 나는 단지 게으름에 의해 수능을 놓친 것 등에 대한 스스로의 자책감 외에는 죄가 없다.
하물며 나는 하루 식비를 2~3천원으로 제한한다. 그 정도로 나는 범죄와 연이 없는 소탈한 삶을 살고 있기에, 오히려 깨달을 수 있다.
내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듯이, 내가 선행을 베풀지 않을 수도 있다.
타인이 내게 범죄를 저지르지 않듯이, 그만큼 타인은 내게 선행을 베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행동력이라고 임의로 단정짓겠다.
악행과 선행에 요구되는 행동력은 똑같다.
악행을 하든, 선행을 하든 사람은 스위치를 누르듯 인격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행동력을 소모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악행과 선행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라는 것의 본모습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악행을 함을 막기 위해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까?
그것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집단이 자아를 형성하면, 그 집단 역시 개인보다도 거대한 행동력으로 악행과 선행을 취사선택한다. 이때 집단의 자아란, 해당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 공유감을 느낌을 의미한다. 개인이 사라지고, 집단을 위한 원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단을 제어하기 위해선 보다 큰 집단이, 보다 큰 강제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어 보았자, 악행은 사라지지 않고, 그만큼 선행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악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한, 그 악행을 사람들이 자제하는 만큼이나 선행을 베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선행은 꼭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람의 범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죽을 때까지 자기 머리 속의 천국만을 그리고 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인간이 낳은 죄는 꼭 사라지지 않음을 명시해야겠다. 어떠한 기도, 어떠한 처절한 몸부림에서도 죄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며, 그 영향으로 하여금 죄는 다시 잉태될 뿐이다. 왜냐하면, 죄는 누구나가 자행할 수 있을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선행 역시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냐면,
선행과 악행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가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야기하는 사회심리적 효과는 통계적으로 분명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행동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 임의로 선행과 악행으로 구분될 뿐이다.
인간이 선행과 악행을 아무렇게나 자행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외하고,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의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분명한 이유없이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행동의 결과가 선행인지, 악행인지는 공동체가, 타인이 지정해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 만큼이나, 인간 개인은 사자 한 마리, 잉어 한 마리, 상어 한 마리, 코끼리 한 마리만큼의 예상 불가능함이 존재한다.
내가 코끼리의 생각은 알 수 없으되, 그들의 행동양식을 미루어보아 사람의 판단 상 어찌어찌할 것이라는 예상만 가능하다.
이는 꼭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람도 사람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타인이 선행을 베푸는 것이 꼭 당연한 것이 아닌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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