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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성인의 죄책감의 발현, 강박증과 유아기 정서불안 및 분리불안 간의 관계

 는 무엇일까?

 

 

 일기처럼 한 번 적어보기를,

 

 금일 내가 깨달은 것은 죄책감과 책임감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나, 둘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죄책감은 어떤 인과관계 상, 자신이 일으킨 어떤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

실은 그것은 어떤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한 긍정적 감정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긍정과 부정은 오로지 상대적인 것이기에, 자신이 보기에 부정적인 결과도 타인으로서는 감개무량하게 긍정적인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시험 문제를 딱 1개 틀린 사례가 있었다. 이 경우, 해당 학생은 점수를 알게 되자 곧바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자신이 분명 만점을 받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을 향해 "그 생각 수능 볼 때까지 과연 이어질 수 있겠냐?" 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건설적인 사고방식이라 보기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분명 내색하진 않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해봄직한 냉소라 할 수 있다.

 

 차설, 죄책감은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라고 축약할 수 있다. 언어 표현상, '죄'라는 단어가 들어가기에 이는 겉보기에 상당히 부정적이지만, 상기 설명한 근거를 통해 긍정과 부정의 경계를 임의로 정하는 대신, 긍정과 부정을 모두 혼합함으로써 객관화된 정의를 내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때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책임감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엔 어떠한 개인의 감정, 정서가 포함되지 않는다. 이는 명백히 죄책감과 다른 것인데, 죄책감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보복이든, 낙선이든, 개인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수준 낮은 승리이든)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감정을 가지는 것인 반면, 책임감은 보편적으로 인식되기에, 사람들의 개인적 감정을 초월하는, 객관화된 사회적 시선(강제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책임감은 개인의 감정으로 인한 회피, 무시가 불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이제 책임감과 죄책감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반면 구별되어야 할 필요성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죄책감은 유아기 분리불안 등의 말로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아기부터 애정결핍 등의 증상으로 인해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곡해한 나머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자기 주관적인 해석 이상으로 타인의 해석에 가치를 두고 평가하는 양상(죄책감의 발현)은 꼭 유아기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발달한 존댓말은 그 자체로 타인의 시선 및 죄책감 등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킨다. 신분이 없는 사회일지언정 자기 자본을 통해 나름의 계층을 구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이'라는 선형적으로 증가할뿐인 또 하나의 '계급'은, 얼핏 당연하면서도, 유별나게 꼭 '계급'의 구분이 되는 주요 파라미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경우, 해외의 경우보다도 유별나게 발달한 존댓말은 겉보기에 '예의와 도덕을 중시'하는 사회인 것처럼 보이게 시뮬라크르로써 존재하는 반면, 그 부작용으로 인하여 전반적인 사회 시민들의 죄책감을 어려서부터 학습시키는 요인이 되게 한다.

 

 

한편, 책임감은 사회화 과정중에 습득되는 보편적인 인식, 폭넓게 말하자면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식을 의미한다.

말인 즉, 책임감은 굳이 '어른'으로서의 누군가가 꼭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 아닐 수 있다. 예컨대 범죄자는 어른이고 어린 아이고 모두 될 수 있는 반사회적 행위의 결과물, 낙인이다. 이 맥락에서 어른의 '책임감'이랄 것은 유별나게 관측되지 않는다. 요컨대 책임감은 꼭 '사회화' 과정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나이를 먹어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철들어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철든다'는 것은 실은 존재하지 않는, 관용적 어구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에 서술된 강박증이라는 것은 대체 이 본문의 맥락과 무슨 상관인가?

성인의 강박증의 수많은 원인들 중 하나는 바로 죄책감과 책임감의 인지부조화때문이다.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필기하는 한 아이가,

정작 집에 와서는 풀어져서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며 몇 시간이고 낭비하고, 벼락치기를 하게 되는 양상 등을 혹시라도 본 경우가 있다면, 이는 그 원인이 단연 죄책감과 책임감의 곡해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공부를 해야한다는 강박은 곧, 이전에 시험 점수를 낮게 보았던 경험(실패)로 인하여 발생될 가능성이 있는데,

대개 그 감정은 해소되기 마련이나, 그 '실패'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인식'하게 되면,

자신의 학생으로서의 책임감과 실패에 대한 죄책감이 병합되어 스스로에게 강박적 인식을 명령하게 되는 것이다.

 

상위 10%의 수능성적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으며 20%의 수능성적을 받으며 강박증으로 고통받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강박증의 정도에 따라 강박성 성격장애로 발전하여 우울증을 동반한 OO 시도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한편 그 아이의 존재는 대단히 많은 아이러니함을 품고 있는데, 그 아이의 가치관에 따르면 나머지 80%의 수능성적을 받을 인구는 이미 자살하고 남았어야 하는 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말인 즉, 강박증을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것의 중한 정도에 따라 대단히 왜곡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그 인식과는 다르다. 여기서 발생하는 인지부조화가 다시 강박증 환자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책임감 상 "학생으로서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알면 해결된다.

말인 즉, 책임감은 단지 인과 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은 공부를 해서 상대평가로 성적을 나누며, 이 결과가 향후의 생계에서 유의미하든, 무의미하든 경력으로서 기재된다는 점을 말미암아 해당 집단의 구성원들은 내색을 하든, 안 하든, 공부를 잘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인식만을 가지는 것으로 끝날 뿐이라는 것이다.

책임감은 어떤 행동의 당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만일 당위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의 요구'이다.

예컨대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지 않을 경우 발생할 보복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감정적인 소모, 즉, 죄책감을 필히 달고 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인식의 부조화는 '현실'상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를 낸다'는 통계 등을 통해 더욱 심화되는데, 그 통계들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감'과 '죄책감'을 혼동하기를 바라는 아무개의 개인적 주관에 따른 편집이라는 것을 알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