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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대중에 대한 오해, 자살 방지책

  나는 줄곧 한 명의 분탕질에 대해 그것이 집단적인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집단 환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나는 줄곧 나를 하나의 집단 안에 속해있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속해있는 집단에서 어떻게 저런 몰상식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질문을 할 적이면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지으며 이해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지금에 이해하기를, 집단은 분명 개개인을 매개하는 가상의 이미지이고, 단지 몰상식한 사람 한 명 한 명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몰상식한 개인이 집단을 대표할 수 없다. 개인은 개인대로 존재하고 집단은 집단대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집단의 대표 역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장은 직위 해제된 이후에는 그저 늙은 이 한 명밖에 더 되지 못하고, 날고 기는 사람들을 압도하며 부끄럼 모르고 솟아오르는 권력 역시 '자리'에만 국한될 뿐 사람을 향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에겐 나만이 관측될 뿐이다. 집단이라는 환각 하에 그 집단 내에서의 유용성을 평가받을 때,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 집단 내에서의 무형의 자리에 올라갈 뿐, 나쁜 평가를 받으면 다른 집단으로 이주하게 될 뿐이다.

 자살은 이 과정에서 관측된다. 자신이 오로지 하나의 주된 집단에만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집단에서 내쳐지면 자신의 존엄함 역시 끝마친다고 인식하게 된 결말이 곧 자살인 것이다. 요컨대 개인은 집단이라는 가상의 이미지 이전에 실존하지만, 집단이라는 가상의 이미지가 없으면 정신적 고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살을 막을 방도는 바로 스스로의 집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집단은 1인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인 집단으로 스스로를 내재화시키기 위해서는 대단히 긴 고행 끝에 스스로를 타자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타자화는 곧 우울증을 동반한다. 현실적으로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없는 사람이 태반인 현 상황에서 스스로 1인 집단을 시도하는 행위는 현실(타인과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자신)과 이상(혼자만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자신)의 괴리로 인하여 우울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인 집단은 명목상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실효성은 없다. 자살과 동떨어지지 못하는 해결책이다. 

 스스로의 집단을 만들어낼 때 주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과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는 타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사한 문화를 상정할 수 없는 타인을 같은 집단 내로 포용하기 위한 대중의 준비는 아직 되지 못하였다. 이론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꼭 현실에 와 탁상공론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현실적으로 집단이라는 이미지 자체는 결국 '자신과 유사한 또래'와 지내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밖에 일궈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집단 내에 문화적 평등을 유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3세대쯤 지날 시 인구절벽의 실존적 위험으로 인해 한 집단 내의 문화적 평등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겠다)

 스스로 집단을 상정하는 데에 요구되는 것은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듯한" 모습만 이미지로 연기할 수 있으면 된다. 그것은 기계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어떠한 과정을 거치든 스스로 자신만의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면 어떤 사회에서 내쳐질지라도 자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고난이라도 스스로를 지탱하는 자신만의 집단을 상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