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내용과 상관無>
0) 불안은 현실적인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출될 수도, 현실적이지 않은 망상의 결과물로부터 도출되기도 한다.
1) 불안은 그저 개인이 가지는 심리이다. 각종 신경전달물질 등의 분비로 인해 야기되는 신경 자극의 양상이다.
2) 불안을 호소하는 개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불안 및 불만을 표출한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소통을 통해, 그림을 통해, 음악을 통해, 분노를 통해, 보복을 통해서 그리 한다.
3) 불안은 그러한 표출을 통해 시각화, 촉각화, 청각화된다(불안이 미각화, 후각화되었다는 것은 체험한 적이 없다).
4) 불안의 표현물이 공동체를 누빈 뒤, 타인이 그것을 체험하여 화자에 준하는 불안을 공감했을 때, 그 불안은 도처에 공유된다.
5) 불안이 공동체적으로 공유될 때, 그 불안의 원인은 잠재적으로 공동체 내에 실존하는 무언가로 인식된다. 이때 불안의 원인이 현실적인 것이든, 가상의 것이든 관계없이 공동체가 공유함에 따라 실존하게 됨을 주지해야 한다.
6) 공동체 내에서 불안,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은 해당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 불안을 잊을 때까지 실존하는 것에 준한다.
7) 어떤 공동체 내의 불안은 다른 공동체의 판별 혹은 묵인 하에 확산되거나, 소화된다.
8) 불안이 확산될 경우, 실제 타 공동체에서 불안의 원인이 없을지라도 타 공동체에도 불안은 전염된다.
9) 불안이 소화될 경우, 기존 불안이 공유되었던 공동체 내에서 불안은 사라질 수 있어도 그 불안의 원인이 실존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여전히 주안점이 되지 못한다. 불안의 태동과 별개로, 불안이라는 심리만 공유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10) 결과적으로, 타 공동체의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불안은 공동체 내에서 실제 현실과 관계없이 공유될 수 있다. 따라서 불안의 원인이 실제 존재하였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불안이 공유되었다는 것만 관측된다.
*왜 불안의 원인이 실존하지도 않는 것인데 불안만 존재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까?
> 이는 마치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르다고 이야기만 하는 양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실존하는 것과 별개로 감정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지만 포만감과는 별개로 '불안'은 실제와 별개로 움직인다.
> 왜냐면, 불안은 '현실'과 별개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가상의 이미지=<시뮬라크르'로부터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뮬라크르는 현실의 존재를 압도하는 가상의 이미지를 일컫는 말이다. 잘 정돈된 정장 혹은 드레스를 입은 시신과 좀비를 닮은 인체 모형을 같이 놓았을 때,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일단 인체 모형을 징그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때 좀비를 더 무서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매체에서 더 활발히, 자주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 그렇다. 단지 매체에서 나온 것이든(시뮬라크르), 아니면 경험적이든(현실), 그것이 선입견에 입각한 것이든 아니든(불안을 호소하는 화자의 객관성) 간에 관계없이, 불안은 간단히 공유된다. 그리고 그 불안이 오로지 공유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 불안은 왜 공유될까? 이는 일반적으로, 현대 문명의 발달로 죽음의 위협에 당장 직면한 사람들이 줄었기 때문이다. 만일 총과 칼이 사람에 앞서 횡행하는 시대라면, 당장 TV나 스마트폰, 컴퓨터를 통해 가상의 것(예컨대 좀비)으로부터 불안을 느낄 여유도 없다. 당장 옆집 사람이 총을 들고 올지 말지부터 걱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군대를 직접 갔다 오지 않는 이상, 실제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사안은 맵고 짠 음식으로 인한 당뇨, 대장암, 흡연으로 인한 폐암, 수면 부족으로 인한 성인병, 부적절한 식생활로 인한 비만 외에 혹시 모를 저격으로 인한 불안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총이나 칼로 인한 사고보다, 혹시 몰라 비행기 사고를 걱정해서 비행기를 못 타는 사람 정도가 아닌 이상, 시각적으로 피가 튀는 등 굉장히 잔혹한 위협을 경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평화롭고 잘 정돈된 사회일수록 좀비와 같이 현실적이지 않은, 망상에 가까운 개인의 일탈 행위 등에 더 불안을 공유한다. 현재 혹시 모를 개인의 일탈 행위에 대해 아무개들이 불안을 공유하는 양상을 보면 대단히 당혹스러운데, 개인의 일탈이 정말 기관단총이나 권총을 들고 갑작스럽게 난입하고 그러는 정도의 수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대단히 사소한 것, 혹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개인의 몇몇 경우를 공동체 전체에 대입해서 불안을 과대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과대해석된 5천만 명 분의 1명 정도의 일탈이 5천만 명 전체에 공유되면,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불안은 시각화되고, 그것으로 공동체는 '혹시 모를 불안'을 '개인의 일탈'로 확실하게 점 찍어 안도한다.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불안으로 선택하는 것보다, 일단 과장했어도, 현실에 일어난 일을 일반화할 때 어느정도 개연성을 갖추고 '불안'을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안은 심지어, 실제 생명의 위협에 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당사자들이 아닌 이상, 공동체 내 잉여 인력들에게는 단지 그날 그날 '잠을 자지 않게끔 긴장하게 하는' 단순한 불안 뉴스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 불안이 있어야 신체 활동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 즉, 불안은 '정신적 포식'이라 해도 좋다. 불안이 있어야 적어도 사람은 잠에서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안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어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가끔 실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등의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그 모든것은 인간이 실존하지 않는 것에도 공감할 수 있는 지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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