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이기적인 이유
(1) 시장의 자원은 유한하다.
(2) 비둘기집의 원리로 인하여 유한한 자원 대비 수요(요컨대 인구 수 혹은 규모의 경제에 요구되는 재료 양)가 클 경우, 유한한 자원 일부를 대상으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집단 내에서의 오해가 발생한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이다. 처음부터 자원을 쟁취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편, 땅콩 하나만으로도 경쟁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 이때 전자의 경우는 금수저, 후자의 경우는 흙수저라 한다. 금수저의 경우 흙수저의 수요에 대해 체감하기 힘들고, 또한 흙수저는 금수저가 금수저로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수요에 대해 체감하기 힘들다. 비둘기 집의 원리에 따라, 자원에 대해 경쟁이 일어나는 일은 모든 자원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원 중에서도 일부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수저는 흙수저의 수요에 대해 금수저로서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규모를 상상하고, 흙수저는 금수저에게 흙수저로서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규모를 요구한다. 이를 도덕적 잣대를 덧붙여 '언더도그마'라고 칭한다. 언더도그마를 이용하는 흙수저도 있고, 그를 경계하는 금수저도 있으나, 중요한 점은 언더도그마를 이용하는 흙수저를 경계하는 흙수저도 있다는 점이다. 말인 즉, 자원 경쟁의 규모를 서로 간에 이해하지 못하는 계층끼리 서로 '일반화된' 오해를 가질 뿐, 실은 범죄를 통해 자원을 쟁취하려 하는 사람은 수저에 관계없이 그저 범법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계층 간의 오해로 인해 단지 수저만으로도 일반화된, 잠재적 범죄자가 되는 일련의 양상이 존재함은 주지할만한 일이다.
(3) 이때, 자원에 대한 경쟁에 있어서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에게 패한다.
-사실 이타주의는 선행에 대한 은유이며, 이기주의는 악행에 대한 은유인 것은 꼭 아니다. 이타주의,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사람의 행동 양상을 다양하게 나열할 수도 있지만, 사실 대중에게 있어서 그런 자세한 분류는 이해하기 귀찮은 대상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로 설명하겠다. 이타주의는 '범죄가 아닐 때' 헌신적인 행동인 것이고, 이기주의는 '범죄가 아닐 때' 합리적인 선택을 의미할 뿐이다. 말인 즉, 범죄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사람은 이기적임과 동시에 이타주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는 특별히 '집단이기주의'로 불리우는데, 사람이 '개인주의'에 대해 분명히 학습하였음에도 특정 집단에 헌신적일 수 있는 까닭은 그 집단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득이 되거나, 혹은 그 집단 단위로 끼칠 수 있는 해를 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을 해나가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는 범죄가 아닐 때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는 싫었지만 지난 시간동안 경험한 바로 사람들은 다분히 이를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치 칸트의 이상을 그대로 표현한 인격체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에게 자원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또는 있는 자원을 또한 뺏길 수도 있다(만일 범죄가 아니라면). 만일 범죄를 저지를 심산인 이기적인 사람을 만난다면 눈 뜨고 코 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인 즉, 맹목적인 이타주의, 최고선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전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원을 나누고 베푼 끝에 자신에게 남은 일말의 자원 역시 다른 사람(다분히 자기 주장만으로 "부족하다"고 느낀 사람)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이타주의는 무조건적으로 이기주의, 심지어 이기주의가 굳이 아닌 사람에게도 자원을 빼앗기는 전략이 된다.
(4) 하지만 이타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채로 이기주의를 권장하는 사회는 새로운 자원을 쟁취하기보다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원을 쟁취하는 기류가 더 유행하기 때문에, 한 사회 내에서의 전체적인 자원 규모는 (개개인에 있어서) 하향 평준화가 일어나고, 결국 타집단에 의해 집단 전체의 자원을 빼앗기고 만다. 따라서 집단의 관점에서, 개인의 관점에서 적절한 비율의 이타적 행동이 요구된다.
(5) 자연 상태에서 만연한 이기주의를 자제시키고, 이타주의를 각인시키기 위해선 절대자가 요구된다(굳이 절대자를 내세우려 하지 않아도 공동체가 형성되면, 공동체의 영합을 위해 저들끼리 알아서 심리적 규약을 만들게 된다. 그때 절대자는 사람으로도, 신으로도, 집단으로도, 법전 등의 형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 ㄱ. 절대자를 개인으로 할 경우 : 대개 종교를 통해 이타주의는 비유적으로 쉽게 대중에게 각인되며, 전파된다. 무조건적인 이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회적 이미지들은 종교와 관련된 것이 유독 많은데, 이는 종교에서 믿는 신 앞에 인간 개개인은 무력한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절대자가 존재함을 믿는다면, 인간 개개인이 서로를 대상으로 벌이는 경쟁 역시 절대자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판단도 합리적이게 된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 사이에서의 이기적 행동은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고통, 고난, 고행 등의 예시를 들어 대중에게 전파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모든 것의 시초는 절대자의 존재를 개인(인간과 유사한 외연을 지닌)에 한정시켜 개인에게 (절대자와 관련된 삽화를 통해) 카타르시스 및 고양감, 헌신감을 필두로 한 '공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 있다. 말인 즉, 개인이 절대자에 대한 삽화를 지니지 않으면 무작위적인 이기주의가 양산된다는 것이며, 반대로 절대자에 대한 삽화를 지니면 이타주의적 행동이 예상 가능한 수준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어떤 아무개가 스스로를 절대자로 하는 종교를 만들 경우, 다시금 사회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ㄱ은 범용성은 높으나 되려 그것을 이용하는 이기주의자도 발생할 수 있음은 주지할만한 사항이다.
- ㄴ. 절대자를 집단으로 할 경우 : 자세한 예시는 역사책에 다량 나와 있다. 요약하자면, 개인이 절대자의 삽화를 집단으로 인식하면, 개개인은 집단 규모의 거대한 자아정체성을 공유하며, 이에 따라 타 집단(외집단)에 대한 배타심이 발생할 경우(이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경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다), 개개인은 외집단에 대한 배타심을 곧 자기 집단(내집단) 구성원들에 대한 이타심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다. 이는 (ㄱ. 절대자를 개인으로 할 경우)와 다소 다른 맥락이나 유사한 결과로서, 외집단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내집단의 구성원들과 경쟁하면, 결국 내집단 통째로 외집단에 의해 무조건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라 개개인은 인식하게 되고, 결국 내집단의 구성원들과 서로 경쟁하는 것은 무위로 돌아간다고 인식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으로, 다양한 사유로 인해 외집단에 대한 배타심을 유도할 수 없는 경우가 현대에 들어 발생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내집단 구성원들에 대해 작위적인 이타심을 심어줄 수 있다. 요컨대 절대자 역할을 하는 집단 전체의 강요가 곧 외적인 이타심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위가 작위적이나, 사회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개인 모두에게 정확히 동일한 규모의, 절대적 집단에 대한 삽화를 그려 넣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비용, 시간이 든다는 점은 현실적 여건상 어려운 일임은 주지할만하다.
- 결국 사람은 이기적인 행동을 베이스로 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이타주의를 섞어서 행할 수 있게끔 대내외적인 규모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이기적인 행동을 종종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합리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뿐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별 수 없다. 사람에겐 심리적 마지노 선이 있다.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내가 굳이 이해시킬 필요도 없는 그런 공유 영역이 있다. 그러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기주의는 몇몇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어도 또 몇몇 사람은 이해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타주의는 아무리 선행일지라도 몇몇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자기 주관이 정확히 100% 타인에게 공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다른 해석: "사람은 이기적이다."라고 전제할 수 있는 까닭은 자연 선택의 과정에서 TFT 전략을 자기 주도 하에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TFT 전략은 나에게 잘 대해준 사람에겐 선행을 베풀고, 나를 배신한 사람에겐 벌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전략은 인공지능 대회를 통해 제한적인 조건에서 가장 생존 가능성이 높은 전략으로 뽑혔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 전략을 사용할 수 없는 까닭은, 단지 인공지능을 제한적인, 수학적 조건, 단순화된 모델 하에서 TFT 전략이 유효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유 말고도, 현실적으로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 벌을 내릴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현실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개인별로 권력의 규모가 다른데 어떻게 공통적으로 벌을 줄 수 있겠는가? 특히나 '융통성'이 존재하는 인간 군집에는 정확히 규약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이 끼어들 수도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대회에서 2등이었던 '이기주의' 전략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낸 것은 별 수 없는 일이다.
- 다른 해석(2) : 근래 들어 보았던 어떤 뉴스에서, 아무개가 주장하기를, "실험 결과, 사람들은 판단 시간이 짧을 때에는 이타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으나, 판단 시간이 길 때에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하였다. 말인 즉, 사람의 기본 성향이 어떻고 관계없이, 단지 어떤 안건에 대하여 그 안건을 처리하는 데에 요구되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타적인 선택을 하며, 반대로 안건 처리에 요구되는 시간이 길수록 (자신만의 잡념에 빠져) 이기주의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결국 개개인에게 이타주의를 교육시키는 제일 좋은 방법은 어떤 안건이든 빠르게, 더 빠르게 처리하게끔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2.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 당연히 의식이 사라져 아무런 인식도 할 수 없게 되겠지만, 만일 만화나 드라마, 영화처럼 영혼이 있을 수 있다면, (지구 위에 가장 많은 곤충들, 나아가 박테리아, 바이러스들은 왜 인간으로는 전생하지 못한 것인지 차치하고서라도) 단순히 사람은 죽으면 살아 생전 했어야 할 일들을 마저 하게 되지 않을까 하였다. 죽으면 끝인 게 아니라, 다시 자신이 해야할 일에 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이 당연히 쓸모없는 생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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