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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사람은 끝도 없이 추악해질 수 있다

 추함과 더러움과 잔인함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결정체는 바로 자기자신이다.

 반면에 아름다움과 선함과 이타주의적인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것 역시 자신 속에 있다(그러나 그것들은 강제로 환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추악한 모습을 지닌 악마와 한없이 선량한 천사의 모든 모습들은 그 글을 남기거나 말로 전파시킨 인간 행태의 한 양상일 뿐임은 유치원생도 알고 있다.

 사람의 추악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사회와 개인이 양립하기 위해 개개인은 사회의 룰에 맞추어 자신의 추악함을 숨기고 선함을 취사선택할 뿐이다.

 "선함 그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기에 따라야 한다"고 배우지 않는 이상 사회가 원하는 형태의 '선함'은 어린이가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선함'을 재단하여 마음대로 '선함'을 베풀게 되면, 어느순간 사회가 원하는 형태의 '선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는 곧 '악함'과 다를 바 없게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선함'은 단지 사회에서 약속된 어떤 유형의 행동 양상일 뿐이지, 그 자체가 원천적으로 사람의 태동과 결을 같이 하지는 않는다. 

 성선설과 성악설 등의 지극히 단순한 상상, 관념들이 마치 선인의 지혜처럼 보이는 까닭은 단지, 인간의 악행을 이해하기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성선설에 따르면 악행은 그것을 악하다고 교육받지 못해서 행하는 것이고, 성악설에 따르면 악행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할까. 실은 사람은 선도 악도 아닌 무지함 그 자체이다. 아예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무작위성을 지닌 존재이다. 무작위적으로 행동한 끝에 결과론적으로 유의미한 것들만 언어 표현으로 합의되었을 뿐, 실은 '악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조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상상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무작위성을 배제하고 행동할 수도 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악행'으로도 표현되지 않는 악행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자신이 실은 어느것이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존재(동시에 anomy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 바로 '말로 표현되지 않았던 악행'들이 형태를 지니고 등장할 것이고, 동시에 '말로 표현되지 않았던 선행'들도 등장할 것이다. 인간의 악행과 선행은 그저 그런 수준에서 논의될 뿐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선행과 악행은 그저 언젠가 사회가(선대의 개인이) 지정해주었던, 상상해보았던 것들일 뿐이고, 정말로 상상하지 못한 무작위성 하의 인간 상상, 행동 그 속에 끝도 없는 악행, 추함과 아름다움, 선행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나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로 추악해질 수도 있고,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로 선행을 베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추함, 악행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악함은 언제나 사람을 잠재적으로 고통스럽게 한다.

 왜냐, 자신이 생각한 악행을 누군가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한없이 추악함을 스스로의 내면에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악행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안에서 나온 것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