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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우울의 근본적 해결책, 중독 증상의 해결, "왜 내 인생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있는가"에 대한 개인적 답변

 1. 대화의 본질

- 상담은 그 자체로는 그저 "친구와의 대화" 내지 "돈을 주어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고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화의 상대방을 나누는 기준은, 돈을 냈으면 '카운셀러', 돈을 안 냈으면 '친구'로 단순하게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관계는 무관계에 준한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어떤 글을 보거나 말을 들을 때, 돈을 받지 않았을 지라도, 그것들을 보거나 듣는 것이 '정형화되지 않은 이익'이 될 것이라 본다면, 그것은 '돈'(정형화된 이익)을 받고 글을 봐주거나, 말을 들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결과론적으로 어떤 '이익'이 생기기 때문에 글이나 대화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가벼운* 우울증, 강박증, 불안, 중독 증상의 본질(물리적 타격에 의한 장기 손상, 명확한 염색체 손상에 의한 유전을 제외한 일반적인 경우에만 적용 가능)

- 필자는 라이센스가 없기 때문에, 이런 정신증에 대한 원인을 세세하게 찾아 얘기하는 것은 불법이기도 하고, 근거가 빈약하여 무의미한 주장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러한 병에 준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8년동안 체감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에 의하면, 이런 '일상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 같으면서도 슬며시 일상을 파괴해나가는 정신증'(우울, 강박, 불안)의 종류들에 대해 주의해야 할 점은, *병원에 가서 치료하지 않고* 스스로 원인을 찾아서 그걸 잘라내면 해결이 되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실패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 왜냐면, 필자는 '원인'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잘라낸 끝에도 해당 *가벼운* 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한 병적인 감정들을 유지하게끔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원인을 계속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관성적으로'라고 대체해도 되는 표현이다. 다만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이해하기에 쉬운 표현이 전자이기에 그리 표현하였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우울, 강박, 불안 이런 감정들은 타인이 체내로 어떤 물질을 주입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말 뿌리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만 가지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명상을 하든, 기도를 하든, 상담을 받든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반복될 뿐이다.

- 그럼 어떻게 해야하냐, 정신적인 불안, 강박, 우울 등이 일상생활을 위협할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단순한 방법은 유물론적인 해결책뿐이다. 게임이나, 드라마, 음악, 종교, 친구와의 놀이 등의 기타 모든 것들, 즉, '실제로 체내에 합성물질을 유도하는 음식물, 약, 영양제를 먹는 행위'를 제외한 것들은 단지 한순간의, 시효성 있는 '해결 시도'일 뿐이며, 이들은 짧은 시효를 가진 '일상 마약'이라고 새로 정의되어도 좋은, 단순한 것들이다.

-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확히 어떤 비타민을 지니고 있다는 음식, 의약, 건강보조식품 섭취 등을 제외하고 순전히 취미 활동, 대화 등의 '피우거나, 바르거나, 먹지 않는 형태의 가상의 진정제'는 그 시효가 짧아 '일상'을 유지할만한 핵심이 되지 못하며, 만일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단지, 진정제의 역할을 하기엔 너무나 짧은 '취미 생활'을 반복하는 것이 체내 칼로리를 반복적으로 소모시켜 음식, 의약, 건강보조식품 등을 섭취하였기 때문에 '일상'이 유지된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즉, 전후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 이때 '일상'이란,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고, 직장에 가서 돈 버는 행위를 하고, 취미 생활로 스트레스를 풀고 하는 일련의 사이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게, '일상'은 '자고 일어나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보편적인 일상'이라 착각하던 것은 실상 짧은 시효를 가진 '일상 마약'에 준하는 것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는 것일 뿐이다. 게임 중독이나, 어느 것에 중독된다는 것은 이 '일상 마약'을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실존하는 '음식', '의약', '건강보조식품' 등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중독의 해결은 몹시 단순한 것이나, 이를 상담이라든지, 누구 아무개 친구라든지, 어떤 게임이라든지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결을 보려고 하면, 궁극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사라지면 금단 증상이 생기거나 정신증이 재발하기 때문이다. 

-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자각하고 있다면)를 해결하려면, 

1) 잠 자는 시간만을 규칙적으로 해야한다. 이 '잠자는 시간'은 '잠에 들기 시작하는 시각' 및 '잠을 유지하는 시간'이다. 잠에 들기 시작하는 시각을 정하고, REM 수면에 의지를 갖고 빠지지 못하는 이상 그저 눈만 감고 있어도 그 행위를 '잠자는 행위'인 것으로 인정하고 의식을 잃지 않고 또렷하여도 계속 눈만이라도 감고 있어야 한다. 실제 객관적으로 '잠'이 맞기도 하다.

- 자신의 모든 일상을 단순화하여 딱 한 가지, 잠자는 시간, 시각만 해결할 수 있다면 적어도 정신증, 중독증 때문에 받는 고통을 적어도 절반 이상은 경감시킬 수 있다. 다만 이는 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적으로, 적어도 자신이 '정신증, 중독증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기간'만큼 규칙적인 잠을 자야한다. 그렇게 자는게 힘들 수 있다. 예컨대, 시험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든지, 프로젝트 납기를 지켜야하는 와중이라 지금 무조건 안 자고 일 하거나 공부해야하는 상황이면 당연히 '일상'에 영향이 갈 수 있다. 그러나 커피를 4잔 이상 마셔서 '일상'을 파괴하면 안 된다. 이때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당장 밀린 업무나 얼마 남지 않은 시험때문에, 당장 '일상'이 파괴되어 훗날 업무나 시험이 끝난 뒤, 잠을 잘 못자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여 정신증이나 중독증에 고통받는 것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하면, 지금 업무나 시험에서 고득점하여 그 성과로 돈을 더 받아 업무나 시험이 끝난 뒤의 고통을 '영양가있는 식단', '의약품', '건강보조식품' 등으로 메꿀 수 있겠는가?

-더 쉽게 말하면, 지금 밀린 업무나 시험 때문에 자기가 잘려서 커리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당연히 밤새는 게 맞고, 대신 그것이 끝난 이후에는 음식에 돈을 더 써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2번째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2)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식단을 유지하거나, 의약품, 건강보조식품 등을 먹는다.

- 다양한 영양소를 식단으로 섭취하거나, 병원에 가서 약을 받거나, 믿거나 말거나인 건강보조식품을 먹는다. 위약 효과(플라시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약이다. 그 물건이 아예 사람이 못 먹을 것으로 제조된 것이 아닌 이상(민간요법으로 똥을 먹지 않는 이상), 체내 물질을 합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유도 물질(정확히 합성 개요가 밝혀진 물질이면 좋겠지만)만 섭취하면 된다. 또한, 특히 건강보조식품은 광고성 마케팅이 많기 때문에 다소 주의를 요하면서 '오랜 기간 유명한 것' 위주로 확인해야 한다.

3) 위 두 가지만 지켜도 되고, 한 가지 추가할 점은, 어딘가에 의존하여 자신의 정신증, 중독증 해결의지를 맡겨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묶어놓은 정신적 지주가 사라진다면 스스로 방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반드시 그 정신적 지주는 시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조건 사라질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의약품이나 건강보조식품도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먹게 하는 병원이나, 제약회사들은 나보다는 오래 갈 것이 분명하다..

-참고하자면, 필자는 작년 7월부터 올해 5월까지 아토피가 전신으로 심하게 번져 하루에 잠도 3시간밖에 못 자고(가려워서 일어나게 된다), 색소 침착으로 고통받는 처지에 이르렀는데, 글쎄 그 *핵심 원인*은 어떤 유전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세로토닌의 부족' 때문이었다. 세로토닌의 합성이 저해되어 분비가 잘 안 일어나거나, 또는 재흡수가 과하게 활성화되어(어린 시절부터 강한 자극을 받아 뇌가 이렇게 된 경우) 세로토닌이 잔류하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8년동안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어도 단 하나도 호전이 안 되어왔는데, 단지 '먹는 것' 하나로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방금, OO를 먹고 깨달았다.

 

3. 왜 내 인생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존재할까? '운'은 뭐지? 왜 우리가 계획한대로만 되지 않는 걸까?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내 인생'과 '운'의 정체만 눈치채면 된다.

내 인생은, '실존하는 나'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은 내 주변 사람, 내가 다니는 장소, 내 주변의 사물들로만 구성되어있다. 나는 '실존하는 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 내가 서있는 장소, 내 주변의 사물들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공사상과,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로부터 참고하자면, '나'를 대표하는 어떤 이미지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고유의 것이 아니라, 실상 사회가 부여한 가상의 이미지라는 것이 주요하다. 우리가 교육받은 '나의 어릴 때부터의 자아정체성'이란 것도 그저 그러한 '교육'에 의한 가상의 이미지를 주입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상의 이미지는 나만의 진짜 고유한 것의 가치를 뛰어넘는다. 나만의 진짜 고유한 것은, 내 몸뿐이다. DNA, RNA 전사, 리보솜의 단백질 합성, 그 결과물로 구성된 '나'뿐이다(오해할 수도 있지만, '나'의 진짜 가치가 물 70%로 구성된 단백질 덩어리라는 것에 지나지 않긴 하지만, '나'에는 그 이상의 가치, 사회가 지정해준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것은, 꼭 고깃 덩어리 이상의 것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즉, '내 인생' = '수분 70%의 단백질 덩어리' + '사회가 지정해주는 이미지')

-양자역학적 관점에서는, 더 간단하다. 빛이 있기 때문에 '나'가 관측될 뿐으로, 빛이 전 우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애초에 이 우주 전체에도 의미가 없다. 관측도 안 될 뿐더러, 애초에 그것을 바라볼 '나'도 파동이 되어 그저 진동하며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시스템의 미소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운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 그자체'(내가 생각하기 싫어했던 것) 혹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에 의해 유도된 것'(내가 생각하기 싫어했던 것에 의한 결과)이다.

이때 다시 환기해야하는 것은,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순전히 타인, 장소, 사물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맡을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운'의 정체가 무엇이냐면, 내가 아직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맡지 못한 것이 '운'이다. 즉, '운'은 형체를 가지고 있다. '운'은 불가시한 어떤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단지 내가 자극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운은 내가 모르는 어떤 타인, 장소, 사물인 것이고, 당연히 정형화된 것이 아니지만 그 표현 양식은 '운'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자의 서로 다른 '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심상을 공유하고자 해왔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운' =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맡지 못한 모든 것의 여집합' = '내가 모르는 타인, 장소, 사물'

그렇기 때문에, "운이 왜 존재하는 걸까?"라고 묻는 것은 하등 의미가 없다. 운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가 왜 존재하는 건지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인류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 우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운도, 인간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기원은 우주의 시작, 빅뱅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모인 원자들의 결합이 오늘날의 옆집 사람을 만들었을 것이다. 즉, 거창하게 "운이란 무엇인교?", "우주란 무엇인교?" 궁금해 할 필요도 없이, 내가 옆집에 사는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이 '운'인 것이다.

 

이때, "운이 좋았다. 나빴다" 이러한 표현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컨대, '운' 자체는 '내가 모르는 타인, 장소 사물'인데, 그것의 좋고 나쁨을 어떻게 평가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운의 작용'까지를 보편적으로 '운'이라고 퉁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옆집 사람을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운'의 정체는 '옆집 사람'으로 한정된다. 이때, 옆집 사람이 갑자기 금은보화를 갖다줄 수도 있고, 소음공해를 갖다줄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모르던 것'(옆집 사람)과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여기까지를 보편적으로 '운'이라 한다는 것이고, 이때 운을 평가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운의 작용'이 끝난 뒤, 다시 말해 결과론적으로 '운'의 정체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자기합리화 및 인지부조화 등으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옆집 사람이 소음공해를 갖다준다면, "아 옆집사람 이상한 사람 들어왔네."하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던 것'(=자기가 모르던 것)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운'과의 작용(옆집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옆집사람을 선택하는 것)에서 주체적인 판단 및 행동이 가능했다고 판단하면 "운이 좋았다.", 그렇지 못하면 "운이 나빴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모든 것은 온전히 '나'의 판단임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운'을 마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제 본 만화를 예시로 들겠다.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진 검사가 적의 낌새를 눈치채고 칼로 공기를 삭하고 갈랐다. 그랬더니 어두운 곳의 암살자 3명이 손을 번쩍 들고 "무게감이 다르구나.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겠다. 항복이다." 하였더니, 검사가 "어이쿠, 시체가 말을 하네" 하였다. "아니, 무어라고?" 손만이 허공을 향한 채로 암살자 3명의 목이 뎅강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를 그림을 가져오면 좋은데, 혹시 모를 저작권 때문에 곤란하여 말로 설명하겠다.

1) 암살자가 손을 든 상태에서, 목만이 저절로 잘린 까닭은 그야말로, 알 수 없는 기술을 가진 검사가 검을 휙하고 휘둘렀을 때 이미 암살자의 목이 잘려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만화적 가정 하에, 시간차 공격+검기를 날렸다고 볼 수 있다).

2) 암살자가 손을 든 상태에서, 목만이 저절로 잘린 까닭은, 검사는 사실 칼만 든 마법사였고, 그가 어떤 몬스터 3마리를 어두운 곳의 뒤편에서 소환시켜, 각자 암살자 3명의 목만을 자르게 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검사(겸 마법사)가 한 "어이쿠, 시체가 말을 하네?"는 암살자들을 당황시키게 하기 위함이고, 또한 소환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신호였을 것이다.

3) 암살자가 손을 든 상태에서, 목만이 저절로 잘린 까닭은, 검사의 동료인 도적 3명이 어두운 곳의 뒤편에서 나와 각자 암살자 3명의 목만을 잘랐기 때문이다. 이때 검사가 한 "어이쿠, 시체가 말을 하네?"는 암살자들을 당황시키게 하기 위함이거나 동료들에게 적 발견 신호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이때 주요한 것은 '개연성'과 '현실성'(이를 비약적으로 '핍진성'이라 할 수 있다)의 대립이다. "개연성을 본다"는 것은 전에 나온 단서들을 종합하여 결과적으로 "~이러이러하게 될 것이다. 혹은 된 것이다"고 '일의 논리적인 연결, 이어짐'을 보는 것이고(논리적이지 않아도, 등장인물을 1인칭화시키면 '감정적으로' 개연성을 강제로 시청자에게 주입시킬 수 있다), '현실성'은 '현실의 물리 법칙을 따르는 것' 혹은,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 경험들'과 비교하여 "이 일은 일어날 확률이 현실에서 높다."고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위의 만화 사례에서, 1번(검사가 검기 날림)은 개연성은 있다. 왜냐하면, 검사 자신이 "시체가 말을 하네?"라고 한 것부터 이미 의도를 가지고 공기중을 검으로 갈랐다는 증거가 되며, 역으로, 공기중을 갈랐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암살자의 목이 저절로 잘리는 것의 복선이 된다. 또한, 암살자가 손을 하늘로 뻗치고 있는 와중에 목만이 잘렸다는 것은, 검사가 암살자의 항복 태세, 발언 이후에 검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암살자를 베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된다. 그럴 경우 손까지 같이 잘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위의 사례 시작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술을 가진 검사'라고 했으므로, 검의 크기보다 더 큰 검기를 가진 채로, 암살자가 항복 의사를 전한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암살자의 목만을 노려 찌르기 했을 수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검을 휘두름' 이것은 만화에서 표현되지 않았으므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무조건, 앞에 제시된 단서들로부터 결과가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의 현실성은 0이라 보아도 된다. 하지만 그 자체로 판타지이기 때문에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 오락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2번, 3번의 경우 암살자의 뒤에서 소환물이나 동료가 암살자의 목을 잘랐을 경우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현실성은 1번보다 있지만(2번은 '소환'이라는 마법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3번보다 떨어지지만), 개연성은 0이다. 왜냐하면, '검사'라는 분명한 표현이 있었고, 위에 표현된 부분만으로는 '동료'나 '소환물'의 존재가 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부분 이전의 에피소드에서 '검사의 동료'가 단 한 번이라도 나왔다면 개연성이 미세하게 증가하게 된다.

 

 이처럼, '개연성'과 '현실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 즉, '운'에 대해 준비하는 자세가 된다.

요컨대,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주로 범하는 우는 '개연성'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팀 프로젝트가 제시되었을 때, 단순히 "주차별로 무엇을 조사하고, 최종 보고서 작성은 총무 누가 언제까지 하자."라고 정하는 것은 개연성만을 정한 것이다. "주차별로 무엇을 조사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고서 당연히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니 때가 되면 작성하겠고, 그 주체는 '총무'라는 가상의 대상으로 한정시켜 책임자 짓고 일감 처리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개연성도 있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여 향후 문제에 대한 AS처리까지 고려를 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총무를 누가 할 것인지 정하는 것이 공평해야 하는데 그 수단은 어떻게 할 것인지, 만일 책임이 총무에게만 있고, 일감도 총무에게만 있으면 그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만일 총무가 일을 안 해서 보고서 자체를 작성 안 하고 잠수를 하면 어떻게 할지, 아니면 조원들이 총무를 위해 주차별로 조사를 해야 했는데 노느라 바빠서 안 하면 어떻게 할지, 주차별로 무엇 하자고 다 정하고 다 진행하는 와중인데 갑자기 위약금을 받고(?) 제출 일자가 앞당겨지는 손해를 받으면 어떻게 할지, 보고서 제출 준비가 늦어질 시, 납기 초과분에 대한 패널티에 상응하는 각 조원 및 총무에 대한 업무 가중치, 보상 가중치, 독자적인 패널티 등은 어떻게 할지 등의 '현실성' 판단도 겸해야 한다.

 요컨대, '내가 모르는 것'이 '운'이 되기 보단, 사회생활에서 자주 만나는 것은 실상 '내가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이 '운'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만큼은 설마 아니겠지, 하고 생각은 좀 하기가 싫네."하는 것이 '운'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 '운'이 좋다는 것은 곧 "내가 설마 했는데 다행이네, 괜찮네" 하고 생각하기 싫은 게 안 일어나는 경우인 것이고, '운'이 나빴다 하는 것은 곧 "내가 설마설마 했는데, 어? 설마설마 했다고."하고 생각하기 싫은 게 일어나는 경우인 것이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 '개연성'에 더해 '현실성'에 대한 담보를 준비하는 것이 '운'에 대한 방지책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