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mptiness

나의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니, 오늘에 행복하면 내일에 불행하고, 오늘에 불행하면 내일 행복할 것이다.

 나의 청소년기 20년이 불행하다면 나의 노년 40~50년이 행복할까

 나의 청소년기 20년이 행복하다면 나의 노년은 불행으로 가득찰까

 

 나의 인생이 제로섬 게임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나를 괴로움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구나

 행복과 불행의 합이 일정하다는 것을 zero sum 이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나의 작태는,

 혹자가 이야기하길,

 

 "철이 들었구나."하였다.

 

 

 내가 배가 불러 고통스러운 것이다. 

 내가 배가 부르지 못하고 지난 번처럼 이틀을 굶었다면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야기를 할 겨를도 없이, 할 틈도 없이 그저 눈 앞에 주어진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을 것이다. 그야 생쌀이라도 씹어먹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니..

 

 나는 오늘 배가 부르다. 너무나 배가 부르다. 나는 그 사실이 고약하고 서글프다.

 왜 나는 배가 부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까. 왜 더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왜 더 좋은 장소에서 더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람과 밥을 먹고 싶어할까 왜 내가 스스로를 내 머릿속의 '바람직함'과 비교하며 나를 보잘 것 없는 이라 깎아내리는 것일까

 

 나의 어리석음을 양식으로 삼는 나의 불완전함은 오늘에 불행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함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렷다.

 나의 행복은 무릇 지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오는 것일 뿐, 불행이란 것은 눈 앞에, 그보다 피부로 체감되는 것이기에 더없이 슬픈 것이다. 

 인간은 자극의 한계로 인해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행복하자면 불행을 꿈꾸고, 불행하다면 행복을 꿈꾼다.

 오늘같이 배가 부른 날엔 불행을 꿈꾸지.

 

 내가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나를 갉아먹어야 할 것이다.

 나를 옭아매는 나를 관찰하며 스스로 고통스러울지라도 계속하여 관찰해야 한다.

 아토피로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변한 지금이라도, 나는 계속 관찰하며 나의 불행을, 나의 행복을 계속해서 관찰해야 한다.

 언젠가 나아질 거란 생각, 언젠간 되돌아올 거란 생각은, 하면 좋은 것.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 이미지에 불과하니 안타깝다. 그것에 얽매여 스스로 자기합리화할 수밖에 없는 나는 얼마나 어엿비 여길만한 존재이던가

 

 안타까움에 목이 긁어져온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오늘에 행복하면 내일이 불행할 것이고, 내 오늘에 불행하면 내일 행복할 것이리라. 나는 이 사실을 알아버렸으니 앞으로 개운하게 행복할 수 없다.

 

 개운할 수 없다. 항상 ...

 

 나를 옭아매는 모든 것을 관찰해라.

 

 

 

 

-아래는 내 관찰 목록 ver.1

"사회는 개인에게 많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게 후회할 일인 걸 알지만 그걸 말해줄 타이밍이 아닌 걸 알기에 침묵할 뿐.."

"난 지난 10년동안 무엇이 달라졌지? 나는 어제와 무엇이 달라졌지?"

"군대에서 배운 건 단지, 음료수 하나로 달라질 정도로 OO의 값이 싸다는 것과, 어리숙할 땐 메모라도 해야 한다는 것."

'물경력'

"너는 이 생각 못 해봤을 것이오, 알려줘야겠소. 하는 우월심리로 그걸 이야기하는 건 우월심리이며 괜한 오지랖이다..

살아온, 주어진 환경이 각기 다른 걸 왜 자신의 편협한 시각만으로 단정짓고 있나. 지금 하는 이 생각도 단지 나의 좁은 시선일 뿐이니.."

"마치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양 우월감 느끼는가?"

"세상은 넓다. 내 위로도 많지만 내 아래로도 깊다. 누구에게든 왜곡된 선입견을 갖지 않고 존중해달라. 나는 나에게 돈을 기부해달라 한 적 없다. 나를 비판하거나 칭찬해달라 한 적도 없다. 단지 같이 힘내자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당신이 나에게 관심 없던 만큼, 나 또한 당신에게 관심 없으니 욕을 할 바엔 그저 지나가달라.."

"도덕적 우월감 등으로 자신의 무언가를 성심성의껏 저렴하게 내놓았을 때, 어느순간 그것이 표준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어 오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 자신의 호의는 순전히 호의로 그치지 않고 공동체 내의 표준이 되어 스스로의 작태뿐 아니라 타인의 행동마저 한정짓는 어리석은 수가 될 수 있다. 하물며, 그에 대한 책임은 너가 지게 된다.."

 

 

★이 글을 쓰고난지 15분만에 또다른 깨우침이 있어 적는다.

 나의 행불행은 예측하기 힘듦을 인정한다해도, 그리고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이 되거나 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꼭 일의 성사를 결정짓는다는 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걸 하면 불행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다고 하여 그 일이 꼭 불가능해야하는 건 아니다."

 요컨대, "행불행을 논할만한 일에는 불가능함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열역학 제 2법칙을 거슬러서 '영구기관'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건 응당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50년동안 종이접기만을 한다고 해서 그 일로 돈을 벌거나 사회적 명예를 얻거나 결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기에 "불행해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할만한 일은 꼭 "실제로 행하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누군가가 그러한 일을 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예상대로 불행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행불행'이라는 심상이 실제 현실에서의 일의 실행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유일한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미상 미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종래의 인식과는 다른,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일의 성취 여부는 꼭 그 일에 대한 행불행 예상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나는 방금, 정확히 내가 2개월 전에 "이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은 것을 누군가가 해낸 것을 보고야 말았다.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을, 나는 보고 말았기에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불가능은 없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단지 그걸 이미 성공시킨 사람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

 침묵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더 나은 것으로 개발시키기 위해 침묵하거나, 실상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여서 굳이 발표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의 이유로 성공者가 침묵하였기에, 나는 정말 그가 생각하기에 '보잘 것 없는' 것에 2개월을, 나아가 5개월을 낭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지식이 부족하였기에. 내가 아직 다 관찰하지 못하였기에. 내가 충분히 관찰하지 못하였기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것은 이미 누군가가 "보잘 것 없다."고 판단하며 성취시킨 후 그저 내팽겨쳐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사실임을 방금 겨우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