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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깨달았다

 장 보드리야르로부터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고, '가상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과대해석하여 나 자신의 자아정체성마저 순전히 그 사회에서 유행하는 이미지들로 덧칠된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고,

 개인주의라는 개념과 이기주의라는 개념을 곡해하여 "나 혼자서 충만하다."고 판단하여 혼자 아싸를 선택한 지 5년이 지났다.

 

 학창시절의 경쟁은 개인주의를 교육시켰고, 군시절의 단체 생활은 집단주의를 교육시켰다. 딱히 어떤 시절에 무슨 사조가 반드시 교육된다고 이야기할 셈은 없으나, 대체로 그러한 교육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 혼자서 충만하다고 자부하였기에(실은 어떤 점에서 무엇이 충분한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대외활동도 하지 않고 그저 혼자 취업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버티는 중이라 정신승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진작에 계정을 모두 삭제한 온라인 게임들에 대해 생각할 적이면 군침이 돌고, 유튜브에서 faker를 바라보며 "아! 어떤 분야든지 한 분야에서 장인이 되면 사회적으로도 성공하는구나"하고 깨닫기는 커녕 "게임만 해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데.."하고 스스로 자괴감에 몸둘 바를 모르며 '공부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인지부조화로 고통받았다.

 

 그 고통의 수위는 이러 하였다. 온 몸에 아토피가 번져 어디에 앉아 무릎을 굽힐 적이면 화상을 입은 듯 하였고, 실제로도 무릎을 굽혔다 펼 때 접히는 부분의 피부가 떨어져나가며 피고름이 졌다. 잠을 잘 때면 항상 새벽 4시쯤 되면 얼굴이 너무나 간지러워 긁다가 일어났고, 앞으로 평생 사우나는 못 갈만한 피부가 되었다 자부한다.

 

 "이런데 나 혼자서 충만할까?"  

 

 나는 문득 캥거루족, 니트족이라는 단어에 스스로 가까워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대학생이든, 아니든, 내가 당장 취업에 대해 걱정할 적이면 "그래도 시간은 남아있다."고 으스대었다. 그런데 지금 결과는 어떠한가,

 애초에, 나는 지금 내 피부 덩어리를 가지고 면접장에 갈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할 때쯤이면 어안이 벙벙하긴 하지만 스테로이드 연고를 잠깐이라도 쓰면 괜찮아진다는 사실 하나에 안심하고, 그리고 연고를 바른 뒤 3일 뒤면 그보다 넓은 범위로 알레르기가 올라온다는 경험적 사실 하나에 가슴이 답답하였다.

 

 내가 대학생활을 끝내가는 중인 것인지, 아직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개백수만도 못한 놈이다. 네 인생 좆된 줄도 모르고 이 기업은 어떻니 저 기업은 어떻니 평가질하는 모습을 보니 너는 참된 개백수다."라고 할 적이면 나는 그 말에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그야 오늘 낮까지만 해도 나는 계속 '심신의 휴양처'를 고집하며 패스오브엑자일 게임이나 알아보고 있었기에.

 

 고등학생 때만 해도 학생회니 무엇이니 하다가 대학교에 들어와 자발적 아싸가 된 이후로는 정말 어느 하나 말 걸 사람도 없이 지내왔다. 조별과제를 A+로 이끌 적이면 한 사람 정도 인사를 해왔지만, 그것도 한 번이었다. 나의 태도에 미적지근함이 있었기에, 내가 흥미가 없었기에, 무엇보다도 나는 자만하고 있었기에.

 

 그 결과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피부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나에게 화이팅하라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물론 에타에는 있다. 익명1번의 고통을 위해 덕담을 나누어주는 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내 이름 석자에 대고 힘을 내달라 해주는 또래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없고, 나 또한 그들에게 화이팅하라는 말을 건네줄 값진 기회도 없음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는 에타의 익명1번 명찰을 달려고 살아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름 석자를 가진 나의 현실보다도 가상의 이미지, 익명1번의 사회적 가치가 더 높은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개백수라 칭하며 자존감을 낮추고 있지 않던가. 옳지 않다. 나는 그정도로 자아 분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이렇다. 나는 내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사회적인 자살을 경험하고 있다. 눈 뜨고 소외되고 있다는 체감은 교수님이 수업 때 출석 이름 한 번 부를 때에만 깨어진다.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사회적 자살, 그러한 채로 5년을 지난 끝에 나는 깨달았다.

 5년동안 정신수행을 하며 도를 닦든, 철학을 사유하든 실질적으로 나 개인에게 사회적인 가치가 유의미하게 올라가진 않는다. 

 당연하다. 결국 모든 궁극적인 수행의 결말은 OO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함부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두 달정도 이인증을 겪어보았기에 깨달은 것이다.

 어떤 정신적인, 궁극적인 깨달음은 결국 자신을 무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있고, 그를 위한 전제 조건은 사회적인 소외, 무시도 견딜 정도로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한 정신에 익숙해지는 것이 진실로 스스로를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방법이다.

 왜 내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수행의 결말'이 익숙하지 않은가 하면, 사회에서 논의되는 '수행'의 방향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정신을 맑게 하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수행은 사실 '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상 앉아서 자는 수준의 뇌파를 스스로 유도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스스로 어떤 철학적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를 자연 속에 회귀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는 수행은 그와 양상이 다르다. 정신을 맑게 하고, 집중력을 높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잊고, 잃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아예 객관적으로 OO에 이를 정도에 다다르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 상태의, 자연상태의 인간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자연의 흙과 돌로 돌아가기는 커녕 길가의 고양이보다 귀엽지 못한, 직립 보행한다는 이점을 낭비한 포유 동물의 한 작태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 스스로를 망각해나가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의 모습에는 당연히 동물의 모습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로부터 나와 타인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심지어 동물과의 경계도 허물어진다는 깨달음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스럽게도, 충격적이게도 그러한 정신적 고양, 정신적 깨달음은 밥 벌어 먹고 사는 것과 삼천리는 떨어져 있다. 아무리 아무개가 정신적으로 숙성되었다 할지라도, 기업에서 사갈 일은 없다. 혹시 몰라 철학적 사유를 들먹여 노조에 가입할까 싶어서.

 하지만 나와 같이, 당장 하루에 삼천 원 식비도 아까워서 빌빌 거리는 사람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어떻게든 빌붙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배운 전공 지식들을 어쨌든 놓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중인 것인데..

 

 그런데 어떻게 내가 계속 "나 혼자서 충만하다."며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서 살아갈 수 있겠나.

 적어도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쓰인 식비, 학비, 주거비 등은 부모님께 돌려드리고 이자는 붙여드린 다음에 죽어야 이 세상에 빚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혼자만의 철학적인 세상에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적어도 2천 년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런 짓을 할라 치면 대학원은 나오고 간신히 한 마디 곁들 수 있는 수준이 된다. 그마저도,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지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정해준다.

 

 나는 위의 사실을 일차적으로 깨닫고 스스로 정진하고자 하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생각하기에 앞서 사회적 가치에 따른 인간을 논할 때면, 당연히 서열이 나뉘어짐을 다시금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뛰는 놈, 나는 놈은 많고, 날 때부터 수저가 다른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생각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내 위에도 많지만 내 아래로도 깊다. 서로 비교하기보단 죽기 전까지 빚 갚을 때까지 서로 잘 하자고 응원이나 하자.", "누구든 자기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그대들도 남 걱정말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달라."

 

 내게 찾아온 익숙치 않은 스트레스로부터 나는 또 달아나고 말았다. 금일 낮까지 게임이나 하자고 알아본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을 안정시켜줄 줄 알고.

 응당,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방치해두면서 당장의 욕구 해소에만 급급하여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개백수와 같지 않던가.

 

 이 모든 생각들은 과제와 함께 밤새 씨름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이지만, 나는 일종의 결벽감에 '게임'이란 단어를 생각한 것만으로도 대단히 죄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실은 누구도 나에게 지난 8년동안 내 생활 패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러한 와중에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오니 나는 정신적으로 개운해졌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실은, 인간의 생리적 욕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욕구들은 결국 '소통'을 이룩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렇다. 내가 학창시절에 게임을 했던 것은 단지 주변 또래들과 말이 통하기 위함이었고, 내가 대학 생활을 아싸로 지내며 학점을 받으려 했던 것도 훗날 내 포트폴리오로 스스로에 대해 가치를 인정시켜주기 위함이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취업을 어떻게든 해서 부모님께 진 빚(실상 계약된 것도, 문서로 남은 것도 없이 내 혼자만의 상상이지만)을 갚는다는 것도 결국 부모님이 투자한 금액만큼을 보상하여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당장, 살아계시는 분이 한 분인데 대체 내가 무슨 여유를 가지고 여태까지 살아왔던 걸까. 순간 잠이 깨었다.

 나 혼자만의 철학, 사유, 나 혼자만의 인생, 나 혼자만의 만족 그 모든 것들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그간 중요시했던 내 자신만의 삶은 실은 나를 고립시키는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문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중함을 모르고 있던 것이다.

 

 확실하게 나는 자만하고 있었다. 지금 이처럼 취업에 대해 걱정은 하지만 알게 모르게 쌓고 있는 스펙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될 것이라 자만하고 있었다. 만약 당장에 안 되어도 괜찮다. 중소기업에 가도 일단 돈이라도 벌면 나는 제테크를 해서라도 갚아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끝에 부모님이 살아계실 수 있을까.

 나는 왜 그 사실을 미연에 알지 못했을까. 이미 한 번 경험하지 않았나. 왜 나는 지금 이때에 나만 바라보고 있던 걸까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왜 나는 또래만 생각하고 있었나. 그 어떤 것보다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해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일 뿐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