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러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가던 중에,
A4용지만한 창틀 위에서 모기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기어다닌다면, 이미 체력이 다한 것이라 판단하여 그냥 변기에 앉았다.
그 상태에서 핸드폰이나 하고 있으니, 글쎄 모기가 다리 위에 앉아 피를 쪽 빨려고 하고 있었다.
스매싱 한 번 날리니 그대로 종잇장이 되었는데, 분명 8분은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도 모기가 피를 빨지도 못한 채로 죽어있었다.
분명 창틀 위에서 다리를 절며 기어다니던 놈이 힘도 없는 채로 피나 빨려고 오다니 괘씸하던 중에,
아차하고 곧 깨달았다. "모기는 죽기 전까지도 모기로 사는구나."
모기는 죽기 전까지도 모기로 산다.
고작 미물인 모기에게서 어떤 불굴의 의지를 보았다고 쌉소리 늘어놓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세간에서 운명같은 걸 이야기하며 "정해진 삶이 있다."고 자신의 운명론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번에 죽어가던 모기새끼를 바라보면서 운명론을 긍정하게 되었다고까지는 단언할 수는 없어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모기와 같은 사람, 코끼리와 같은 사람, 사자와 같은 사람 등으로 그 성격, 가치관, 나아가 행동 양상이 살아 생전, 죽기 전까지 변치 않는 무언가 특질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혹시 오해할까 첨언하지만, 이 특질에 대해 가치판단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예컨대 특질 사이에서의 열등과 우등을 나눌 필요도 없다 생각하며 그 기준도 누구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전에 자아정체성이 주위의 환경, 교육에 의해 단순히 변동할 뿐이라고 주장해왔었는데, 오늘 모기새끼 한 마리를 보니, 나또한 아직 생존 경쟁의 사슬 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말인 즉, 코끼리가 초식 동물이면서도 DNA 상에 입력된 바, 육지 위 누구보다도 강인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또 사자가 코끼리보다는 작지만 육식 동물로서 죽기 전까지도 사냥을 시도하는 것처럼, 생존 경쟁 위에서 어떤 종 간의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면, 같은 종 안에서의 개체 간 차이는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까닭은 모기가 몸이 약해 죽기 당장 직전에 와서도 피를 빨아먹으려고 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되었다. 모기는 모기로서 살았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에서부터 사람에게도 사람으로서의 유별난 행동양상(죽기 전까지도 꼭 해야하는 무언가가 있는)이 분명 존재함을 깨달았으며, 다시 이로부터 그 특질이 분명 '사람'이란 종에게 유의미하게 존재함에도, 사람들이 개체별로 무조건적으로 서로 규합하지 않는 까닭은 사람 개체 사이에서 경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게 하는 (코끼리와 같은) 초식 특질, (사자와 같은) 육식 특질 등으로 자연 상태(원시 상태)의 특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개체 간의 특질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기가 (산란기 피 빨아먹는) 모기라는 종 안에서의 특질대로 죽기 전까지 행동했던 것처럼, 사람에게도 사람으로서의 어떤 특질대로 죽기 전까지 행동해야 하는 바가 분명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뭉쳐서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곧 사람이라는 종 안에서, 개체 간 특질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굳이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할 생각이 없다고 느꼈다고 해도, 어떤 사자와 같은 특질을 가진 사람은 나를 치열하게 견제하며 자신의 파이를 쟁취하기 위해 달려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기들이 모두 자신의 생을 헌납하는 리스크를 안고서도 먹잇감을 향하며 산란기를 버티려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왜냐면, 사람들은 자신의 리스크를 일단 최소화하거나 없애려 하고, 또 '산란기'라는 유별난 목적이 없어도 단순히 타의적 이득을 위해 먹잇감을 향하는 다른 사람을 견제하고 제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히 인간은 곤충보다는 지성이 있으니까."라는 해석 하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이는 사람은 경쟁에 놓이는 데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고 단지 타의적 목적으로 다른 사람 개체들과 경쟁하며, 그 과정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과 대칭을 이루게 된다.
말인 즉, 이론적으로 사람은 종교적 깨달음 하에 세속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해탈을 누릴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떤 한 사람 개체가 아무리 해탈을 꿈꾼다 할지라도, 굳이 별다른 이유없이 타인의 간섭으로 인해 경쟁 상태로 이끌릴 수 있으며, 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세속은 더럽다는 가치판단을 할 필요도 없이) 모기가 모기로서 죽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말인 즉, 사람이 경쟁에 놓이는 것은 모기가 모기로서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라 어떻게든 사람 간의 경쟁이 없는 천국을 만드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야 옆 사람이 한 명 추가되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별다른 이유없이 경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이는 앞서 말했듯이 지극히 타의적으로, 남이 못 가진 걸 내가 가져야 어떻게든 이득이라는 심산 때문이다. 설령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 해도 타인은 그런 생각이 있을 수 있고, 타인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합리적으로, 자연적으로 경쟁이 당연한 것이다).
말인 즉, 사람 사이에서 가치평가도 필요없이, 의식이 있기 전에 저마다의 특질이 있기 때문에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질이 곧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이것만은 할 것이다." 할만한 것을 자신의 특질로 인정하고 수긍하며 살 수밖에 없겠다.
*삶 속에서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것들(자연적인 것=특질)과 살면서 배워온 것에 의해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들(교육의 결과, 이상적 삶)은 당연히 둘 다 존재하며,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취업을 해서 돈을 마구 벌어들이고 싶다는 것(이상적 욕구)과, 취준 기간동안 종교적 깨달음을 통해 금욕 수행을 하는 것(자연적인 욕구)은 분명 둘 다 존재할 수는 있지만, 시너지를 이루지는 못하기 때문에, "취업을 해서 돈을 마구 벌어들이고 싶고, 그 이유는 돈을 마구 벌어서 무조건 죽기 전까지 부동산으로 제태크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지닌" 아무개와 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특질과 이상을 맞춘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일 뿐이다. 이때 타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세속적이라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금욕수행을 하려고 하는 것이 미련한 것도 아니다. 어떤 가치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이미 사실로서 두 가지 방면에서의 욕구가 존재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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