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안 읽어도 됨
아인슈타인이
1)관성력은 중력과 구분되지 않는다.
-중력장의 존재 역설,
2)빛의 속도는 상수로 30만km/h이다.
-어느 관성계에서도 빛의 속도는 상수로, 뉴턴 고전역학처럼 더하고 뺄 수 없다. 심지어 속도가 대단히 빠른 관성계의 시간은 정지 관측계에서의 시간보다 길어지고, 길이는 짧아진다. (상수*sqrt(1-v^2/c^2)만큼)
-뉴턴 고전역학에선 혼자 가만히 있는 놈(원자 단위)은 내부에너지도, 운동에너지도, 위치에너지도 없다고 봤는데, E=mc^2으로 인하여 혼자 가만히 있는 놈도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정지질량도 에너지가 있다).
등등의 이야기로 '상대성'이란 단어를 유행시켰는데,
오늘날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것들이 중학교에서도 교양 삼아 알려주는 그런 것이 되다보니,
상대성이라는 단어를 인문학적으로 남용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한 흐름에 나 또한 편승해서, 상대성을 한 번 남용해보겠다.
내 머릿속에서 적어도 11년은 사고실험한 결과이니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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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변연계가 발달한 현대인은, 객관적으로 행복한 와중에 주관적으로 불행을 찾고, 객관적으로 불행한 와중에야 주관적으로 행복을 찾는다.
(전제로, 불행과 대치되는 단어로 행운이 있긴 하지만, '행복' 또한 관용적으로 이용되고 있기에 이렇게 씀)
이유:
현대에는 고전적인 인간의 행복, 불행의 대상(특정 행위, 생물, 사물+교육된 이미지)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행복과 불행이 꼭 사회화의 과정 중 교육받지 못한 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빈도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로 인해 청소년기에 '사회화 교육' 이상으로 넓은 범위로부터 행복과 불행을 체험하였고, 변연계가 전두엽보다도 발달하게 됐으며, 행복을 느끼기 위한 자극의 역치는 높아진 반면, 불행을 느끼기 위한 자극의 역치는 낮아지게 되었다.(행복은 고전적으로 일관화된 이미지에 담겨있으나(그리고 현대에는 더 집중적으로 그 이미지들을 양산하고 있으나), 불행은 고전적으로 일관화된 이미지 이상으로 현대에는 더 다양한 원인으로 불행에 준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다원화된 사회는 그러한 결과 또한 포함한다)
그 결과로, 체내 향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작으로서 표면적으로, "행복할 때에는 불행을 그리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불행할 때에는 행복을 그리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모습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행복은 드물게 찾아오고(자극의 역치가 높아졌기에), 불행은 만성적으로 찾아오니(역치가 낮아졌으므로), 정신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일반인이 많아졌다.
그 기작을 자세하게 표현하자면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와 재흡수, 코르티솔 호르몬 등의 분비와 재흡수 과정이 '교육받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에 대응하기 위해 안정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예컨대 4D 영화관과 같이 자극의 혼합으로 이뤄진 상품 등)
또한, 어떤 자극을 주는 행위, 생물, 사물 등을 카테고리화 하여 만든 이미지들을, 현대인이 미처 발빠르게 정형화시키지 못한 까닭(=교육받지 못한 까닭)에 문화지체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자극의 이미지'를 공유하지 못하는 결과(세대 차이, 집단주의->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로의 과격한 변화)가 야기되었다.
현대에 관측되는 이하와 같은 다양한 현상들,
1) 공동체의 무의미한 분열(굉장히 같잖은 이유의 분열)
2) '정치적 올바름'의 대두(고전적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개별 사안들 모두에 적용시키기가 오히려 역차별을 만드는 현황)
3) 상대적 우민화의 문제(고전적 이미지를 교육받은 것으로 의무교육이 끝나지만, 파이의 경쟁에서는 전혀 도움받지 못하는 상황)
4) 난독증의 확대(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이나 발화자-메신져-만 판별할 수 있어 진의(이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평가하는 현상)
5)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및 원천봉쇄의 오류의 확대(고전적 이미지를 그대로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이미지와 결부시켜 시대에 뒤쳐지는 발상-일반화- 및 그에 기반한 주장, 그리고 그에 호응하고 그를 옹호하는 집단의 등장)
6) 제도, 법률의 낙후(현대에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규합하지 못하고 고전적 이미지 하에 제한만 하는 현상)
위와 같은 현상들은 자극의 이미지를 동시대, 같은 공동체에서도 공유받지 못하고, 문화지체가 누적된 끝에 발생한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문제인지도 파악하기 힘들고, 문제의 원인을 찾기도 힘들지만, 그 원인이 실은 현대인의 '가치의 상대성' 현상 때문이라 한다면 이해가 됨을 알 수 있다(이때 이해가 된다는 표현은 '자기합리화'가 잘 된다는 의미로 보아도 좋다).
말인 즉, 자신이 지금 너무나 불행한 처지에 있고 지금 막 자살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만큼이나 자신이 객관적으로 행복한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경험 속에 있다. 바로,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것이 객관적으로 분명하다면, 그만큼이나 우리는 행복을 열렬하게 그려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불행함을 느끼고 있다면, 자신이 정말 아이스크림을 하나 뜯거나, 과자 봉지를 뜯거나 아니면 밥 한 끼를 먹는다면, 그 자체로 자신의 불행이 생각보다 자신의 안에만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 이야기를 하는 필자는 지난 1년동안 하루에 식비를 1200원밖에 못 쓰는 와중이라는 점을 밝힌다).
자기합리화라 해도 좋다. 나는 분명히 이 '가치의 상대성'이 분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유사과학을 믿고 병을 키우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골똘히 자신을 가다듬고 생각하며 지난 날만을 그리워 하지 말고 현재 자신이 모름지기 판단하고 있는 것이 그저 관성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정말 죽을 날을 기다리게 되는, 객관적으로 불행한 상황에 놓여있지만 않다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정신적으로 이야기하는 그것이 실은 야속하게도 자신의 뇌가 보여주는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왜 이런 글을 내가 쓰게 됐느냐 하면, 나는 현재 식비 1200원으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계속 정신적으로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길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행위, 관계들을 끊어내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해왔었고, 그 끝에 어제 정신적으로 아예 내몰리는 일이 발생한 직후 잠을 18시간이나 자게 되었다.
그리고 일어나서도 사실 별 거 아닌 일이었음에도 어제에 준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 눈이 충혈되고 온 몸을 박박 긁어 진물이 계속 나오자, '가치의 상대성'을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진정 내가 이렇게까지 내몰려야 할 정도였을지를 나의 외부에서 한 번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나의 모든 걱정과 불안이 하나의 광대가 부리는 놀음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이것을 적고 강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치의 상대성은 옳다. 우리는 불행한 상황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만큼이나 행복한 상황에서도 불행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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