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감을 가질 만큼의 하늘을 바라볼 때면 문득 나는 이 거대한 자연 아래 무엇을 해나가고자 하였는지 망각하곤 한다.
대체 내가 가지는 존재성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것은 과거의 우울감의 산물이다.
오늘에 내가 바라보는 하늘은 다시금 내게 답을 주길, 하늘이고 구름이고 그 모든 것이 가지는 밝고 청명하다는 인간의 느낌마저 그저 '마땅히 하늘이라면 그러해야했을 모습'으로 인해 만족감을 느끼는 강박의 일종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였다
하늘의 구름, 하늘의 푸른 빛이 대체 나보다 무슨 유의미함을 가지는가?
하늘이라는 거대하고 황량한 자연이 온 지구를 감쌀 때 온 지구의 모든 사람이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고 '하늘'임을 인식하는 것이 그저 하늘의 유의미함 전부일 뿐인데
어떻게 그것만으로 온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의미함을 남긴다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하고 황량한 하늘과 구름이 온 지구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나 역시 온 지구의 사람들에게 적어도 같은 사람이라면 느낄 인간적인 어떤 유의미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성적 불쾌감이든, 무관심이든 상관없이, 하늘과 구름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어떤 자연적인 의미와 일맥상통하게 나 역시 온 지구의 사람들의 눈 앞이라면 적어도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만 하다.
하늘과 구름이 인간 한 개인보다도 더 크고 거대한 자연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그저 하늘과 구름이 인간 한 개개인들보다도 더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 사회, 하나의 공동체에 더 많이 보였기에, 더 많이 언급되었기에 하늘과 구름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개인 한 명보다도 더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과 구름이 하나의 밈으로서 작동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늘과 구름이라는 것의 실체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늘이 태양빛이 산란되고 굴절되면서 보이는 색깔로 비춰질 뿐이며
구름은 열을 받아 물 분자 간의 인력이 약해져 저 멀리 무작위적으로 물 분자들이 날아간 끝에
공중의 저온에 의해 대기중으로 다시 열을 빼앗기고 액체가 된 것 뿐이다.
굳이 환원주의적으로 이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하늘과 구름이 인문학적으로 인간의 언어적 상상력으로 둔갑되는 것 이상으로 인간 사회에 어떤 유의미한 공학적 도구가 되지도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다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빛을 통해 인간은 비타민 D를 합성할 수 있고 동시에 피부 노화 및 피부암을 발생시킬만한 자외선에 또한 영향을 받는다.
또 구름은 뭉치고 뭉쳐져 밀도가 커지면 공기의 부력보다도 무게가 더 커져 땅으로 떨어지며 비를 내린다. 지표 위의 기온이 차갑다면 땅으로 내려오는 와중에도 열을 더 빼앗겨 눈이 되고 얼음도 되고 그런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늘과 구름이 가지는 의미가 인간에 대한 어떤 역할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하늘과 구름이 어떤 비과학적인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괴상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늘과 구름으로 표상되는 과학적 여러 사실들 이상으로, 그저 하늘과 구름이 거대한 어떤 자연으로서의 의미로서 인간을 압도한다는 인문학적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심지어 이러한 인문학적 대상으로 표현되는 하늘과 구름은 그러한 표현을 활용하거나, 보거나, 듣는 모든 사람들이 설령 하늘과 구름이 실제 인간에게 작용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늘과 구름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괴상하다.
이것은 하늘과 구름이 일종의 종교적 의미로서 작동할 수 있는 까닭이다.
언어가 발전한 역사가 하늘과 구름이 가지는 과학적 역할이 밝혀진 역사보다도 길다.
한편 하늘과 구름에 대한 경외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무기력함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표상되었는데,
이 과정 중 하늘과 구름은 절대적인 의미로서 어떤 종교적 의미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하늘과 구름에 대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밝혀진 환원주의적 해석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 지식을 언어로써 배우기엔 적어도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표현으로 이용되는 하늘과 구름에 대한 이해보다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하늘과 구름은 환원주의적 해석과, 절대적인 자연으로서의 의미 둘 다를 동시에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지는 위험성은 다음과 같다.
인간 세상의 기술, 공학 등을 무시하고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이 가지는 의미랄 것은 이미 몇백년도 더 된 아이디어이다.
현대 사회에서 기술과 공학 등이 가지는 의미는 이제 순수 과학으로서의 의미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과학적 방법론을 무시하고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것은 노예쩨가 번성하였던 과거의 역사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이랄 것인 하늘과 구름은 이런 과격한 anomy한 마음가짐을 사람들이 가지기를 강요하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져 온 언어라는 밈 안에서 사람의 인식이 강제된 시뮬라크르들을 발견하고 지워나가는 것이다.
현대를 사라아가는 개인에게 시뮬라크르는 비단 미디어 매체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언어 속에 자리잡은 어떤 개념 하나하나들이 실은 자신에게 어떠한 영양가도 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사람들에게 마치 가상으로 마약 맞고 헤롱헤롱대는 것마냥 일부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고대에 구상했을 뿐인 추상적 개념들 속에서 현대 사람들은 아직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헤어나오지 못한 채 헤롱헤롱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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