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사회OO학이라는 학문에서,
바우마이스터의 자제력 실험은 인간의 자제력이 고갈될 수 있는 인지적 자원이라는 것을 밝힌 유용한 실험이었다.
그리고 해당 실험에 대한 '그럴듯함'이 확산되어 이를 후속실험으로 하는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한편 '자정 작용의 핵심'이라고 할만한 '재현실험'은 그 자체로는 논문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기에(새로운 것이 아니므로)
적어도 자신의 부가 넘쳐나지 않는 이상 사람은 그에 대해 '그럴듯함'을 필두로 후속실험을 통해 명성을 얻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
바우마이스터의 자제력 실험이 여러 차례의 재현 실험에서 실패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많았던 후속실험들이 모두 거짓이고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바우마이스터의 자제력 실험을 근거로 한 후속 실험이 많이 이루어졌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바우마이스터라는 사람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학문에 흠을 입힌 것이 아니고 되려 해당 학문의 자정 가능성,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의 자정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은,
낙관주의적 결론이 아닐까?
만일 '재현 가능성'이라는 것이 화두가 될 수 없는 사회였다면 '그럴듯함'으로 무장한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실은 거짓 조작된 논문이 '교과서'로서 등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현재 '재현 가능성'은 논문으로서의 가치를 얻기에는 무의미하므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후건에 대해 긍정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은 틀린 것일까?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서 나온 어떤 결과물이 반드시 참, 거짓일 가능성은 없어도 적어도 과학적 방법론을 신봉하는 공동체 내에서 해당 결과물은 적어도 과학적 방법론 하에 한 치 논리적 오류는 없다고 볼 수는 있는 것인 반면, 외적으로 보기에 그것은 어떤 방법론을 따랐을지라도 그것의 실제 참, 거짓을 가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말인 즉슨, 과학적 방법론 하에 어떤 조작을 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외적으로 알 방법은 없다. 재현 실험이 있지만, 재현 실험을 하는 것은 돈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편 맨델의 유전자 실험에서 p값 해킹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현대의 생명과학 및 생명공학이 그릇된 근본으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자연주의적 오류일 수 있는가?
현대의 고정적으로 '모범 답안'으로 손꼽히는 것은 실상 그것의 참, 거짓과는 구분되는, 해당 공동체의 밈 안에 '답'으로 꼽혀질 수 있는 것이기만 하면 아무렴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 한편, 또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 대한 주장을 펼쳤을 때,
그가 어떤 학문을 했다거나, 이를 위해 어떤 학과를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 사람의 주장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예컨대 지구온난화에 대한 논의가 펼쳐지는데 갑자기 어떤 영적인 존재가 지구를 핫하게 하고있기 때문에 오늘 섭씨 35도에 이르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영 허무맹랑한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적어도 의무교육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고 보여질 수 있다.
한편 이 이야기를 만일 해외 유망한 대학교인 햐벼드 대학교에 나온 사람이 한 것이라면, 그것도 어떤 인문학적으로 유망한 노볠상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위와 같은 주장은 해당 공동체 내의 정석적인 주장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어떤 존재'라는 표상으로써 화석 연료 연소의 남용 등으로 지구 평균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혹은,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리가 없다. 날조다"라고 하며 해당 사람에 대해 옹호할 수도 있다.
한편, 어떤 해외 문명과 단절된 섬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경우 사람들은 "그 이야기는 신화 속 이야기겠지. 문명과 단절되서 저런 판단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정석적으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
"저 사람 사이비에 미쳤나보다."고 하거나, "의무교육 잘못 받았네"하고 인신공격을 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왜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위와 같은 판단이 필자만의 왜곡되고 곡해된 판단이 아니고 실제로 합리적으로 일 수 있는 대중적 의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명확하게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이냐면, 대중적으로 어떤 학문을 하고, 어떤 학과에 나와서 공부를 한 사람에 대해서 더욱이 그 사람이 유명 대학교에 다닐수록, 그 사람의 주장이 보다 객관적이고 타당한 주장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과에 속해서 어떤 학문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타당한 주장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그러한 학과, 학문을 배운 사람이라면 응당 알맞은 주장을 할 것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고, 그러한 강요 속에서 불필요한 오해마저 낳고 있다.
예컨대 위의 예를 다시 보자면, 햐벼드 대학교에 나온 사람이 위와 같은 허무맹랑한 주장을 한다면, 그것 또한 인간의 휴리스틱 상 이루어질 수 있는 판단이다. 그 휴리스틱이 노화로 인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으로 인해 위와 같은 주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그것은 허무맹랑한 사실이다. 그 사람이 실제 병원에 가서 치매 등으로 진단을 받지 않는 이상, 그저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닌데 조작되었다고 의심하거나, 그 사람의 진의가 다른 곳에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떤 학과에 들어가 어떤 학문을 한다는 것이 꼭 타당한 주장을 야기하고, 심지어 유명 대학교, 들어가기 힘들고 졸업하기도 힘든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더욱이 타당할 것이라는 착각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실례로서 프리츠 하버가 질소 합성로 인류를 구원했던 것에 반해 독일 나치를 위해 독가스를 발명했던 것은 어떠한가?
프리츠 하버라는 실제 대단히 명망있고 유능한 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했던 행동이 대중적인 가치판단 하에 옳은 것이었을까?
이러한 만연함은 바로 자연주의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모름지기 좋은 대학교 ~~학과를 나온 사람은 머리가 좋고 어쩌구 저쩌구 해서 반드시 타당한 주장을 할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그저 ~~대학교 ~~학과를 나왔다는 사실판단 단 하나만으로 야기되는 착각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유능하다고 사회적으로 비춰지는 여러 사람들이 좋은 학력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한편 패러데이의 실례는 "학력이 낮았음에도 자신이 열심히 하여 ~~ 훌륭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판단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 대단히 이상한 것이다.
어떻게 학력이라는 것이 선천적으로(전건으로써) 훌륭한 과학적 업적을 남기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학력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이 개인으로써 어떤 과학적 업적을 만드는 데에 장해가 최소화된 환경을 만드는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학력은 심지어, 어려서부터 무슨 몇 개 국어를 하고 어쩌구 저쩌구 해서 '천재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갖다 붙인 끝에 자신의 존재를 사회 속에서 합리화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대단히 이상한 것이다. 그 몇 개 국어를 하고 어쩌구 하는 역사적 위인 개인의 능력이 우수하였다고 사실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적 위인들이 남긴 '천재성'을 개념화해서 현대의 공동체 구성원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공동체 구성원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천재성'을 획일화하는 것으로는 역사적 위인들에 비견되는 업적을 만들어내는 현대적 '천재'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몇 개 국어를 다 하고 어쩌구 저쩌구 수학도 잘해 다 잘하는 사람은 '천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개인차는 분명 존재하고, 이렇게까지 인지적인 발달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다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몇 개 국어를 다 시켜보고, 수학도 대학교 수학까지 시켜보고, 어쩌구 저쩌구 다 시키는 것은 천재를 키워내기 위한 행동이 전혀 아니다.
전혀 아니다. 그건 천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천재성'이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자신의 자식에게 씌어놓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컬티스트가 어떤 사람의 몸에 귀신이 씌었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저 대상이 되는 피험자에게 가상의 이미지를 씌우고, 대상은 그러한 가상의 이미지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꼭 현대의 '천재'가 아인슈타인의 망령에 뒤집어 씌어져서 상대성 이론을 능가하는 어쩌구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현대의 진짜 '천재'가 등장했다면, 그 사람은 아인슈타인과 전혀 상관없이 연구해야 되려 아인슈타인이 뉴턴 고전역학에서 시간 개념을 뒤바꾼 것처럼 '창의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높은 학력~천재성~역사적 위인~역사적인 빈도수로부터 비롯된 해당 인물이 가지는 '무조건적 타당함'이라는 휴리스틱이 끊어진다.
역사적 위인이 다녔다고 하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모 아무개가 해당 역사적 위인과 같은 성과물을 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대중적 휴리스틱 상 합리적일 수 있겠지만(사실 그럼에도 필자는 이것도 이상하다고 본다),
'역'으로 해당 모 아무개가 만들어낸 모든 성과물들이 역사적 위인으로 걸맞을만한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심대한 착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시 패스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민중은 개돼지다"라고 이야기하면 응당 '대중적인' 분노가 시작된다. 그런데 서울대생들이 "민중은 개돼지다"라고 동시에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당시 해당 사무관의 발언을 옹호하는 집단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사무관은 대중적 지탄을 받고 실질적 손해를 입었다. 한편 이러한 해프닝을 영화화한 것이 유명해지자, 사람들 속에 "민중은 개돼지다"라는 발언은 이제 하나의 '밈'이 되었다.
이런 밈의 태동과 그에 따른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이것이 '밈'으로서 유행하였다는 것이 문제이다. '밈'의 특성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수용(가치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내재화된다는 것이다. 말인 즉슨,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둘러보며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통한 선전, 광고, 희화화 등에 혼란스러워 하는 와중에, "민중은 개돼지다"라는 발언이 갑작스레 "사실 그말도 옳다"는 의식이 갑작스레 은연중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별을 가진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증오 발언(자연주의의 오류 및 성급한 일반화의 파티), 거대한 사회적 이미지 하의 '결혼 상대'에 대한 이상적 프레임화, 어떤 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흐리는 프레임화 등으로 서로 간의 밈을 놓고 가치판단을 하는 와중에 인신공격성의 발언들이 차고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밈의 대립, 밈으로부터 형성된 부분 공동체들의 갈등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자신의 가치관을 확고히 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경위임과 동시에, 어떤 신념이나 가치관의 주장과 이에 대한 근거가 대단히 합리적이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한 채 그저 이익집단으로서의 궤변에 불과한 것이 대두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어떤 두 집단(사실 왜 굳이 두 집단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이 서로의 밈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와중에, 각 진영 '안'에서 자신의 집단의 주장 중 논리적 오류가 존재한다고 비판한 사람이 존재하면 바로 그 사람이 해당 집단의 반역자로 몰리면서 내쫓아지기 때문이다.)
말인 즉슨, 한 공동체 내에서 밈의 난립으로 인해 부분적인 공동체가 생기고 이에 대해 갈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공동체의 주류 밈을 만드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과격함(해당 집단의 밈의 오류를 비판할 수조차 없는 상태)이 발생하면, 해당 집단의 구성원은 실상 해당 밈의 정신적 노예화에 종속된 것에 불과함에도, 그러한 무비판적 안정화를 집단주의 하에 낙관적으로 또한 해석하고 그대로 타 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에 나서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은 수준이 낮다. 개돼지다."라는 발언이 현재 일부 과격한 집단에서 유행하는 까닭은, 해당 집단이 그러한 발언을 아주 기초적으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관으로써 필터링하는 자정 능력조차 없기 때문이며, 해당 집단 내의 구성원들이 그저 해당 집단이 내세우는 밈에 정신적으로 종속되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해당 발언을 만일 후대의 서울대생들 단체로 지지한다든지,
훗날 최초로 우리나라 노벨상을 받은 김 아무개씨가 해당 발언을 지지한다든지 하는 사회가 온다면,
그것은 해당 사회가 유치원 때부터 배우는 도덕관에 기초한 가치판단을 통한 자정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지는 휴리스틱이 퇴보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 "민중은 개돼지다"라는 발언이 유행한다고 하여 그것이 '발전된 생각'인 것은 아니다..
미래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 "미래로 나아간다" "발전한다"는 시대착오적 발상 하의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여전히 역사가 흐르는 것에 어떤 일정한 방향성(인류의 발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역사는 그저 축적될 뿐이고,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공동체가 원하는 밈을 취사 선택하여 휴리스틱으로 마련하고 현재를 살아갈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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