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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우유부단함은 죄가 아니다"는 문장에서 시작한 글

 

우유부단이 기존, 죄가 되는 이유는 '우유부단함은 ~~한 잘못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만큼 아무 문제의식없이 순환논리가 적용되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우유부단함이 준다고 하는 것이 온통 잘못된 것 투성이라는 것은 먼저 우유부단함은 잘못이라는 선입견 하에 이유를 만들어냈 것 뿐이기 때문이다.

 

왜 "우유부단함은 문제가 많은 성격 중 하나이다."라는 문장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을까?

그것은 속담, 고사성어들이 현인들의, 선인들의 지혜를 함축한 유의미한 구나 절로써 현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수많은 속담들과 고사성어들이 항상 절대적인 진리인양 적용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속담들과 고사성어들만으로 서로 반론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인 즉슨, 속담과 고사성어라는 집합은 서로 반증을 이루는 모순된 닫힌 집합이다.

이미 이 사실만으로 속담과 고사성어가 옳지 않은데도, 어째서 속담과 고사성어의 인용은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가?

 

예컨대 속담과 고사성어는 아니지만 고려의 문신 중 손꼽히는 인물인 이규보 시인이 있다.

본 인물은 '토실을 허물어버린 설'이라는 짧은 단편을 통해 대단히 모순적인 인물상 및 교훈을 주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글은 명백하게 오류를 범한 글이기 때문에 되려 본 인물이 짓지 않았다고 여겨질 만큼 황당무계하기도 하다.

어째서 과거 속의 문신들 중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꼭 지금 시대에도 현명했던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러한 기저 심리는 곧 불안정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과거에 유행하였던 어떤 사회적 밈, 그리고 해당 밈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정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모범 답안으로서의 가치관, 인물 등이 시대를 불문하고 유행하는 까닭은,

그러한 하나하나의 밈들이 현대에도 유행함으로써 공동체가 해당 밈을 적용받는 개개인들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다.

노예제가 과거 그토록 많은 시간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1)노예제에 대한 부정적인 개인들, 노예제로 무조건적인 피해를 받는 사람들 이상으로 노예제를 암묵적으로 긍정하는 개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2)노예제라는 과거의 제도를 답습함으로써 해당 공동체가 가지는 인간 행동, 자유의지의 무작위성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편 '안전하다고 믿어져 온' 노예제가 시대를 거치면서 어떤 변화, 그 끝으로 폐지가 이루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이 귀족층이나 호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세수를 늘리기 위해 노예를 평민으로 일부 올려주거나(주로 건국 초기),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중상주의적 관점이 해당 공동체 내에서 확대되자 기존의 신분제를 벗어나서 유의미한 공동체 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평민들이 (부르주아로서) 그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여전히 왕이 귀족 및 호족, 양반 세력의 권력이 늘어남을 견제하기 위해 이러한 부르주아 계층들에 대해 공동체 내 영향력 및 발언권의 확대를 묵인하거나 허용함으로써 신분제의 변화 및 폐지가 야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의문이 있다.

어째서 왕은 시대를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귀족 세력들에 대해 견제를 받았을까?

해당 공동체 내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권력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권력을 왕과 귀족이 양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은 왕권신수설을 통해 어떻게든 절대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였고, 한편 귀족들은 왕을 세습하는 혈통의 숫자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당대의 신분제라는 밈 속에서 자신들의 평민들에 대비한 유의미한 권력, 그리고 그에 대비한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는 서로 상반된 양식을 교육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되고 모순된 밈이 양립하는 와중에 어떤 귀족은 평민들에 대한 유의미한 권력을 보다 행사하고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면 사병을 만들고 계략을 획책함으로써 반역을 일으키기도 한 것이고, 어떤 귀족들은 평민들에 대한 유의미한 권력에 만족하고 이를 성립시켜주는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실은 당대 신분제라는 밈에 대한 복종)을 했던 것이다.(이 경우, 설령 왕가가 근친으로 인한 유전병에 이르거나, 선천적인 장애에 이른 인물이 왕으로서 존재하여도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왕이란 인물보다도, 왕이 존재하는 와중에 자신이 귀족이라는 밈에 대한 실리적 이득이 더 컸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공동체에 대한 앞으로의 발전, 건설적 방안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역사 속에서 인류에 대한 어떤 발전적인 방향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결과론적인 편향이다. 하물며 과학의 발전사(과학사가 아님. 혼동하면 안 됨) 또한 마찬가지이다. 게틀링 씨가 게틀링 건을 발명해서 "이런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설마 여기에 돌진 명령을 내리는 장군이 있을까"하고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절대적 무력을 만들어낸 것처럼, 프리츠 하버가 질소 합성을 통해 인류의 식량난을 없애주었지만 반면 독일 나치에 협력하여 독가스를 만들고 인류 학살의 수단을 정형화시켰던 것처럼, 과학의 발전사는 역사의 흐름과 구분될 수 없고, 두 가지 모두 고정적인 기록이 아닐 뿐더러(후대의 편파적 시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며, 심지어 현대에 적힌 역사가 실은 전대로부터 날조된 것이 상당수 존재할 가능성도 존재하며), 두 가지 모두 인류 공동체에 대한 궁극적 발전이라는 방향으로 꼭 나아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관측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흐름의 예를 두 가지 바라보면,

1)프랑스 혁명의 발단은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 확장을 왕이 귀족 견제를 위해 묵인하였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2)조선 후기에서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삼정의 문란이 관측되었음에도 체제의 변환이 더디게 이루어진 까닭은

영조, 정조 이후에 왕당 세력이 이미 양반 세력보다도 약화되었으며, 부르주아 계층의 확산에 대해 왕보다도 더한 공동체 내 영향력을 가진 양반 세력이 부르주아 계층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대의 양반 계층이 해당 신분제 내에서 유의미하게 받아들이고자 했던 밈은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 대신 평민에 대한 유의미한 권력이었으며, 해당 밈을 확고히 함에 있어서 평민에 불과하였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해 권력을 얹혀준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민에서 부르주아 계층으로 등극한 사람들 역시, 자신의 공동체 내 영향력 상 기존의 양반 세력처럼 평민에 대한 유의미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부르주아 계층 하에서 일반 평민, 그리고 노예 계층의 사람들이 조선 후기의 신분제 및 입헌군주제 등의 변혁을 꾀하지 못한 까닭은 꼭 조선시대만의 특유한 밈, 예컨대 성리학, 유교 등의 밈들이 절대 진리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이상으로,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기존 체제의 이레귤러(기존의 밈과는 다른 양상의 밈)가 '유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말인 즉슨,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에 대해 공명첩이나 서원에 이름을 올린 양민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다 쟁취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층끼리 합심하고, 이를 위한 평민들의 권력 강화에 대한 여론을 만들었다면, 그리고 이것을 왕가가 귀족 견제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면 우리나라 또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양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한편 이 경우 주변국이 해당 체제의 변화에 대항하기 위해 침략하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유부단은 죄이다."라는 편견은 그것이 우유부단이라는 고사성어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가치판단이며,

그것이 무조건적인 절대 진리라고 바라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행'하는 까닭은,

1)논리적 오류로서 자연주의의 오류를 침범하였음에도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음에도 본 고사성어가 '유행'함으로써 얻는 무언가 이득이 있기 때문에 해당 밈을 교육시키는 사람들이 이를 방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점은 무엇이냐면,

2)역사 속에서 어떤 한 시대 속에서 유행되었던 밈이 현대에도 유행할 경우에 얻는 공동체적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당 공동체가 당대의 밈 유행 양상 및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에 이야기한 역사적 흐름과 어떤 연관이 있느냐 하면,

우유부단과 신분제라는 역사적 산물이 어떻게 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

말인 즉슨, 신분제가 역사적 산물로서 잊혀지는 것 이상으로 현대에도 학벌이나, 금수저 등으로 표상되는 부모의 재산 등으로 어떤 유형의 계층 및 권력 확보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위에서 서술한, '공동체의 미래 예측'이 원활하다는 가정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유부단이라는 고사성어는 위와 같은 사고방식을 얻어내기 위한 일례였을 뿐이다.

위의 가정을 보다 심화시켜보자면, 프랑스 혁명에서 기존 신분제에 대한 밈이 이미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르주아라는 이레귤러가 또한 밈으로써 유행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게 된 결과 신분제가 폐지되었던 것처럼, 현대의 어떤 공동체에서 유행하는 유사 신분제를 압도하는 새로운 밈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마치 과거의 부르주아 계층처럼, '자수성가한 인물상'의 양상, 즉, 지잡대를 나와도 어느정도 부자가 된 사람, 고졸이었음에도 부자가 된 사람, 흙수저였음에도 부자가 된 사람이 뉴스에 '자주' 나오고, 이같은 뉴스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결과라고 보여지는 까닭은 인간의 무작위성이 꼭 어떤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기 위해서 대단히 길고 복잡한 사고과정을 거친 끝에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간단한 휴리스틱 하에 빠르고 간결하게 얻어낼 수 있는 판단으로 보다 확실하게 교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사람이 꼭 만물의 영장이고 현명함의 대명사로, 인권과 자연권 위에 어마어마한 인류의 산업 혁명을 거친 끝에 현대의 어마어마한 발전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 개개인이 꼭 현대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어쩌구 대단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거나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그저 협소하고 '유도'된 마음가짐일 뿐이다. 이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이 가지는 기저심리는 언제나 항상 생리적 욕구, 그리고 생리적 욕구를 보다 편리하게 해소하기 위한 권력 확보(학문 분야라면 자신의 영향력 행사에 따른 명예 확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한계에 의해 표상된다.

 

 사람이 인권과 자연권이라는 밈을 창시한 이래에도, 현대에 인간과 인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끊어지지 않은 까닭은 인간이 어떤 인류애를 가지고 인류 공동체로써 다같이 지구온난화를 막고 환경을 보전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밈이 그저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최고선'에 달하는 밈이 유행하기 위해선 이것이 다른 어떠한 밈들을 압도하며 전 세계적으로 유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까닭은 이러한 최고선을 압도하는 현실주의적 판단이 밈으로써 유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사람의 휴리스틱이 대단히 간결하고 빠른 확답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당장 오늘 먹을 밥이 없는데 인류 전체의 지구온난화 대책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하는 무작위적 선택의 결과에 비합리적이고, '실수'라고 보여지는 것이 존재하는 까닭은 단순히 해당 일을 벌인 개인이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회적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해당 개인의 휴리스틱 상 그러한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당시에'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결과를 내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라는 결과를 야기했던 것을 평가하는 시점에는 이미 결과론적 편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떤 경위를 가지게 되었든, 사람이 얼핏 비합리적 결과를 야기하는 그 이전에는, 해당 실수를 벌인 사람의 입장에서 그러한 행동은 휴리스틱 상 '합리적'으로 보였기에 했던 행동이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사람의 무작위적 선택 및 행동에는 자기파괴적 성격이 있는 것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꼭 사람이 항상 '합리적인 개인'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의 행동에서 자기파괴적 성향 또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또한 그러한 행동 및 마음가짐이 자신 나름의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임'이라는 표현이 꼭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 이를 사람 개개인에게 모두 적용시키기에는 모순점이 있는 표현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러한 휴리스틱의 형성에는 당시 사회의 '밈'에 대한 교육이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밈'이 사람 행동, 의식의 근간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밈이 어째서 휴리스틱 형성에 영향을 주냐고 하냐면,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객관적이라 믿어지는' 밈 중에서도 유명한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초로 하여 여러 사람들이 쌓아 올린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교육'받아야 휴리스틱으로써 사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특별한 휴리스틱 하에 나온 결과물들은 '객관적이고 전문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사실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그저 밈 하나 때문에 개인에 불과한 사람의 논리 전개, 의식 및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옳은 것'으로써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어떤 사고방식이 그 자체로 항상 공동체에 유의미한 결과물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어떤 사고방식이 이미 유행하고 있는 공동체의 사고방식에 부합되는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말인 즉슨, 개인의 판단 근거인 휴리스틱이 곧 공동체의 사고방식, 공동체의 밈과 결부되어있다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나름의 '과학적 방법론'을 기획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범사회적으로 '합리적이고 반증불가능하며 재현가능한'이라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론'을 압도하는 유행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더이상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하는 근간은 그저 해당 사회의 보편적 인식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반례로 보이는 범죄들 역시 자신의 휴리스틱을 이루는 근간 속에서 해당 사회에 다음과 같은 밈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 사람은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같은 소문조차 나지 않았다면 해당 범죄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떤 범죄의 수단이 창의적일지라도 그것은 개인의 이같은 판단 위에서 일어난 경위일 뿐이다.

 

 

 

 

 

'이기주의'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유행하는 밈'일 뿐이다.

'이기주의에 대항하는 이타주의'를 유행시킬 수만 있다면, 이기주의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에 이기주의는 분명 존재한다. 이를 무시하고 이타주의만을 무작정 유행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기주의'인 사람들에게 너무나 이득이 되기 때문에 되려 이기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 있는 것을 없다고 무시하고 하는 것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킬 뿐이다.

명백하게 공기는 존재하고, 이것은 압력이라는 지표로도 알 수 있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이기주의라는 추상적 개념 역시 분명 사람의 휴리스틱 상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초 학교에서 도덕관(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한)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무작정 이기주의를 옳지 못한 것으로 몰고 이타주의만을 이야기를 해도,

실제 이기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이타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이기주의가 옳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도덕적 비난으로 인한 '감정적, 물질적 손해'보다도 크다면, 당연히 해당 개인은 이기주의를 기반으로 행동한다.

 

여기서 이기주의라는 단어는 곧 TFT 게임에서 All-D 전략에 해당한다. 모두 배신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조건 이타주의를 표방하는 의식은 Operator 전략에 해당한다.

게임을 실제로 해보면, All-D는 Operator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압승을 거둔다.

이러한 게임이 반복(어떤 의식적 선택, 행동의 반복)되면, Operator는 All-D에게 모든 게임 점수를 다 뺏기고 꼴찌가 되고 만다.

한편 사회에서 '꼴찌'가 주는 의미는 무엇이던가? 유사 신분제 하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이 아니던가?

그래서 여전히 "'꼴찌'가 1등 되서 서울대 가다"라는 뉴스가 학벌주의 위에 놓여진 것이어도 실제로는 장기적으로 학벌주의보다도 더 큰 집합인 '사회적 유용성에 근거한 능력중심주의'를 타파할 작은 단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일은 실제 자주 벌어지지 않기도 하고(만일 언론에서 위와 같은 뉴스를 날조하여 매일 보여준다면, 그럼에도 이같은 날조가 들키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분명 인식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실은 '사회적 밈 상 그릇되어 보이는 수단'을 이용했음을 밝혀도, '궁극적으로 사회적 밈 상 옳은 결과'를 야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묵인되는 것처럼 옹호하는 개인들도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All-D와의 게임을 한 Operator는 꼴찌로써 이타주의를 표방하였음에도 급기야 꼴찌로서 해당 AI를 만든 사람들에게까지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왜냐면 꼴찌는 어떤 명예도, 상금도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실제 결과는 사람들에게 이타주의가 주는 이점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급기야 부정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세간의 인식을 타파하고 이타주의를 전파하기 위해선,

위에서 이야기하듯이, '이기주의'를 표방한 개인이 받을지도 모르는 손해를 언론에서 자주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이타주의가 이기주의의 반대급수가 아닌' 상태에서 이타주의를 교육해야 한다.

현재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의 반대급수로 받아들여지지만, 정작 이기주의와의 싸움에서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존재한다.

한편 이기주의는 분명 실재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교육된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에 의해 급기야 사회적 비난을 받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분명 2000년은 넘은 절대진리로 보이는 '도덕관'에 의한 휴리스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실제로 All-D 전략이 자연주의적으로 1등 전략인 Tit for Tat 전략에 대해 그나마 우세할 수 있는, '배신을 한 상대에 대한 보복 능력이 없는 개인'까지도 표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제인 것이다. 어떤 지역적 구획에 의해 나뉜 어떤 곳에서 유교를 전통적으로 숭상한 전통적 문화를 가진 민족이고, 효와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무릇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행동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역시 이미 실제로 전략적인 효용성을 가지지 못한 밈을 다시금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에선 '꼰대'라는 단어로써 사회적 비난을 받기까지 한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을 이겨내고 전 세계가 인류애로 똘똘 뭉치기 위해선,

그토록이나 철벽같았던 신분제, 농노제, 앙시앵 레짐이 프랑스 혁명으로 없어졌던 것처럼,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고 순전히 전 인류가 함께 나아가기 위해선,

 

어떤 한 국가가 대규모 공동체로서 '이기주의'라는 단어를 뺀 채로 이타주의, 칸트의 정언 명령만을 교육시켜야 한다.

장 보드리야르나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절대 진리인 것으로 도덕관, 최고선을 교육시켜야 한다.

한편 해당 국가는 주변국의 '이기적' 국가적 행위를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점차 주변국으로도 해당 '이타주의' 인식이 퍼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국가라는 지역적 구획이 과거 제국주의 국가, 식민지 국가라는 방식으로 무너졌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어떠한 불손한 정치적 의도없이 순수하게 공동 인류애로서 자발적으로 지역적 구획에서 벗어나 공동 인류 공동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 세계로 퍼지면 이타주의는 퍼져나간다.

 

 

하지만 적어도 위와 같은 일은 결말 부분(모든 국가가 지역적 구획을 벗어던지고 인류애로 나아간다)는 부분이 영 소설같고 솔직히 말해 '주권 침해'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는 적어도, 신분제가 유행했던 4000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요컨대 6019년 정도라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 '현대의 시민'인 것이다.

꼭 어떤 밈이 다른 것을 항상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밈의 양립은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하기도 한다. 왜냐면 밈이 곧 공동체의 형성 근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동체라는 집단에 대해 압도적인 밈의 등장이 등장한다면 집단주의, 나아가 전체주의의 대두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공동체 속에서 밈의 양립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유의미한 존재성을 표현하기 위해선 필요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현대의 밈으로서 유행할 때까지만 말이다.

 

 

전자가 에너지 준위가 낮은 공간 속에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자연 현상이 정형화된 것만으로

인간 행동, 집단도 꼭 '안정적인' 상태로써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주의의 오류일 뿐이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각종 밈의 양립을 통한 공동체의 미세한 분열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러한 공동체 내 밈의 양립은 개인의 사고관을 확장시키는 발단이 될 수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여러 공동체 구성원에 의한 공동체의 '발전' 또한 야기하기도 한다. 여기서 무조건적 이타주의를 표방한 끝에 꼴찌가 되어버린 개인을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