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mptiness

구제할 수 없는 야만성

 나는 3월 29일로부터 3월 30일 새벽 3시에 다다르는 시각에 이르러

 

 사람이 얼마나 잔학무도한가를 깨달았다.

 

 그 어느 귀신이고 영이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의 악랄함이 그 자체로 최저의 행락임을 알았다.

 

 사람은 악랄함을 즐길 수가 있다. 그것을 즐김으로써 자신의 최저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내가 아닌 오롯이 다른 이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모든 행동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그 어떤 종류의 영향력도 없었음이 자명함에도

 

 그 어떤 것에도 항상 화나있고 분노해있는 어떤 아무개에 의하여 나의 평정심이 간단히 깨질 수 있음을

 

 더 할 나위 없이 정말로 올곧게 깨달았다.

 

 애초에 내가 유리멘탈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그럼에도 지금 군대를 갔다오고 나서도 깨달은 것은 사람의 악랄함이랄 것에는 따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정신적 물리적 폭력에 의해 멘탈에 큰 데미지를 입는 것에는 남녀노소가 없음을 깨달았다.

 

 타인으로 규정되는 외집단의 특질에 단순히 악랄함을 추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슴이 아프다.

 

 내집단은 집단이라고 부르기도 부족하게도, 오로지 나혼자만이 내집단이고,

 

 외집단은 그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결정되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한계 속에서

 

 외집단의 특질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질은 무시되고 그저 범위적으로 악랄함이 추가된 것이다.

 

 이 생각은 집단주의적인 면을 강조시키는 군대를 갔다옴에 의해 확산된 생각인가

 

 아니면 실제로 타인 개개인의 면면들에는 현실로 존재하는 악랄함이 존재하는가

 

 이렇게까지 하고싶지는 않았음에도, 어떻게든 사람의 긍정적인 심리에 기대보고자 하였던 나의 바람은

 

 이렇게나 무너지고 깨어졌다. 찢어졌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나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나온다.

 

 어째서 스스로를 이타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지적이지도 못한 동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어떻게 가만히 스스로 보고만 있는 것인가?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앞날에 빨간 줄을 그어버리는 것을 어떻게 그저 담담히 보고만 있고

 

 되려 그것을 바라고 있는 모습인 양 행동하는가?

 

 그것은 사람의 면면 속에 악랄함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의 악랄함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도의적이지 않은 행동과 생각과 마음과 태도와 언어와 문화와 가치관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정체성도 갖지 못한 어중이 떠중이의 발악일 것이나

 

 그 영향력은 어떤 사회가 가지는 고유 문화나 그간 내려져 온 전통마저 쉽게 파괴할 수 있다.

 

 그 사실이 두려워 나는 스물 몇 살을 먹은 지금까지도 사람의 악랄함을 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사실이다. 사람의 면면에는 지독한 악랄함이 숨겨져 있다.

 

 그 지독함에 숨도 쉬기가 힘들 정도이다.

 

 너무 징그럽고 보기에 정신적으로 피폐하다.

 

 유혈이 낭자하고 내장이 다 드러난 시체 사진, 기생충이나 벌레에 파먹힌 살덩어리의 모습,

 하반신이 잘리거나 척추뼈가 드러난 사진들, 각종 고어 영화에 나오는 흔하디 흔한 빨간 모습들과

 

 야동이라고 불리우는 포르노 영화, 살과 살이 맞닿는 모습들, 땀 흘려가며 뒤엉키는 덩어리들

 

 그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더 하다 못해 폭주할 정도의 감정적 격렬함을 단순히 

 내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해 사람의 상상을 이겨낼 정도의 대단한 상상력의 언어폭력이 만들었음에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사람의 악랄함을 오늘에 덧씌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기가 싫었는데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악랄한 면이 분명 존재한다. 인정하기 싫었는데

 정말로 믿고 싶었는데 정말 그럴 수가 없었다. 익명의 그늘에 가려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악랄해질 수 있다.

 

 

 심지어 익명이 아니고 면대면에서도 사람은 그렇게 악랄해질 수 있다.

 

 

 

 

 

 

 

 

 면대면이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면대면이어도 사람 간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는 단순히 술과 같은 독약이 작용해서 전두엽을 마비시켰다는

 그 원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발적인 감정, 그러나 분명히 또렷하고도 의식적인 상태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격화에 의해서도

 범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초중고 대학교까지 그저 책만 보고 있었으니 사람 간의 허울 좋을 소통에 만족하면 됐었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의 면을 바라보아야 하나

 

 나는 사람이 죽고 그 사람의 유산으로 그 사람 주변의 모든 집단이 돈 하나로 인해 서로

 철가면을 쓴 채 면전에 대놓고 말로써 똥을 집어 던지며 착취 경쟁이 벌어짐을 목도하였고

 

 그 죽는다는 사람이 제 부모일지라도 열심히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친척들에게 돈을 요구하고

 군대 휴가 나온 나에게도 지금 휴가 나온 김에 인감 도장 찍으라고 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 사람이 유별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제 부모가 죽어서  남겨진 것이 도대체가 무엇이길래 저렇게까지 후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저렇게까지 부모에게 먹칠을 할 수 있는가

 

 단순히 유교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자유주의 하에서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을 정도로 기나긴 개월의 수동안 수도 없이 전화해대며

 친척이라는 미명 하에 집요한 돈 요구를 할 수 있나?

 

 그것이 나는 그 사람만의 유별남이라고 생각했다. 악랄하다고 생각했다.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것이 친척이라는 연고 없이 그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생판 남인 사이에서도 그저 흥미 본위로 강하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악랄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악랄한 본위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행동을 할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무형의 것에 집착하여 죽어갈 때 무엇을 생각하려고......

 죽어 관에 들어갈 때까지 스스로의 발에 족쇄를 차고 빨간 줄이 적힌 묘비를 박아달라 할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이 잔혹할 수가 있나?

 나는 몰랐다. 정말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타인이라는 외집단 정의에 의해 내가 과하게 해석하는 것일 수 있다.

 내집단의 특질, 나의 특질을 내가 마음대로 정할 수밖에 없으니 나는 사람으로서의 도의에 대해 

 외집단의 악랄함이란 특질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이건 아니었는데.....

 나는 이렇게까지 사람이 악랄함 속에 군중을 이루고 위태로운 절벽에서 서로 밀고 당기고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서로 간의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도시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

 벼랑 위아래만 존재한다는 듯이 평지 위를 서로 줄을 긋고 그저 밀치고 좁은 파이를 먹기 위해 새치기하고

 

 사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나는 뭔지를 모른다.

 도대체가 왜.

 

 

 

 

 왜 그렇게까지

 

 

 

 

 

 

 

 

 

 

 

 

'Emptin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제고 같은 시간을 향유하며  (0) 2019.03.31
그래도 시간이 간다  (0) 2019.03.31
나는 곧 12시간 내리 공부하였다. 분명히  (0) 2019.03.27
스스로에게 던지는 의문  (0) 2019.03.20
역겨움  (0) 201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