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떠한 유의미함을 창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나는 내가 헌혈하는 것 이상으로 이 사회에 어떤 공공의 이익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이 들게 된다.
나는 이 사회 속에서 도대체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일까?
어떤 중요한 시험을 앞둔 것도 아니고
생활에 필요한 어떠한 것도 공부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내일을 기다리는 망부석 마냥
가만히 스스로 도태되어가고 있다.
내가 가진 유전자는 언젠가 있을 지도 모르는 훗날의 자식에게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제대로 된 멘토의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제 3자가 바라본다면 나에게 큰 문제는 없을 이력이지만 동시에 내가 무언가 유의미한 큰 프로젝트를 한 것이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을 바라본다면 그저 지나가는 평범한 이력서 한 장으로 치부되고 바람에 흩날리고 파쇄되어 갈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 내가 마음 둘 곳이 있을까 생각하자면 나는 내 욕망의 본위에 충실한 것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단순한 동물임을 자각한다.
내가 여태까지 자라온 모든 것에 다른 이의 노력이 한 줌 배어나오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는데
나는 여기에 가만히 앉아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해서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까?
그 이전에, 언제까지 나는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되뇌이면서 혼자 망가져갈까?
내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리라 하는 것은 지나친 기만이다.
먼저,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있다. 언제고 부모라는 각인이 새겨지지 않았을 적의 청춘을 구가하던 젊었을 적의 이는
스스로도 젊음을 언제고 향유하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이 부모가 된다는 책임감에 몸져 누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끝에 자식을 어찌 되었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냈고,
이제는 그 자식된 사람이 부모되었던 그 젊은 이에게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 나는 어딘가 취업이라도 성공할 됨됨이를 가졌을까? 하며
스스로 시간을 녹여내는 나의 작태를 짓밟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말인 즉슨, 과거의 실패라고 하면 겨우 수능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80년 인생 전체의 시간을 하대하는
그런 망나니같은 사람으로 누구도 키우길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자명하므로
나는 스스로에게 보다 책임감있는 인생설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수능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일차원적인 생각은 언제 끝이 날까?
나는 내 자신을 스스로 평가함에 있어서 족쇄라고 생각하는 학벌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너무나 많은 꾸짖음을 짓고 있다.
이것이 학벌주의를 끝내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다 좁은 의미에서, 나 자신에 대한 평가방식을 조금 바꾸고 싶은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되는 보편적인 '학벌'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는 하지만 부정은 할 수 없다.
왜냐, 이미 만연한 사회 방식을 변혁시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며, 그것은 나 하나로 야기시킬 수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전세계적인 추세임이 자명하기 때문에 한 사람 세대 안에 이룰 수조차 없이 어리석은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고 학벌주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였던 고등학생 중에 수능을 잘 본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이며
결국 20대에 들어서 후회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이미 학벌을 이룩한 사람들의 학벌주의 타파는 어쩌면 사다리걷어차기 방식의 일환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고 그것만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되
그저 그러한 의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는 것을 인식은 하고 있어야 할 것이며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보다도 조금 자비로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뿐이다..
어째서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이렇게 각박하고 스스로를 모질게 대하는 것일까?
그렇게 자신의 정신력을 아침에(사실 점심에) 눈 뜨고 일어날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계속
계속 스스로를 욕하고 자존감을 낮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의 학벌에 대한 열등감으로 표현하기에는 보다 더 잔인하다.
왜냐, 학력이 낮다고 하여 스스로 그렇게 도태된 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은 스스로를 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그것에 보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극히 유교적인 사상이며 마마보이의 생각일 수도 있다고
혹자가 폄하할 수 있는, 그런 자유분방한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그럼 적어도 홀로 자립했을 적에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도 자기만은 스스로를 믿어야 여하튼 인생을 살아갈 의지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런데, 스스로마저 져버린다.
스스로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매일 매일을 정신적인 자학 속에서 자해 속에서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는 당사자도 알고 있다. 자살이다.
내일을 살아갈 의지를 놓아버리고 어제를 망각한 채 오늘 자살만을 생각하다 그렇게 시계를 부숴버린다.
시계를 깨버리고 창문을 꺠버리고 정신적으로 자학하다 못해 눈으로 그걸 보고 싶어 자해까지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방식의 시초는 단지 수능을 제대로 볼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대에 준비할 시험이 얼마나 많고, 수능을 대체하여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다른 시험이 얼마나 많은데
앞날의 모든, 어렵게 노력하였던 자신을 비춰줄 광명을 다 가려버리고
홀로 스러져가는 나는 얼마나
얼마나 아까울까
나도 내가 아까울 것이고, 부모님께서도 아까울 것이고, 하다 못해 지나가는 행인도 아까워 할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그래도 80년을 살아서 그래도 사회에 필요한 쓰레기통을 하나 길거리에 비치해두어도
공동체의 이익이 생기는데
왜 그 젊은 나이에 스스로를 져버릴까
라고 스스로를 져버렸을 아무개 마저도 타인을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왜 스스로를 가치있게 여기지 못할까
이는 학습된 무기력감 때문이며, 사회적 책임감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실패가 지속될수록 자살마렵다.
아무개의 인생이 앞으로 화창할 것임을
지금 당장 알 수가 없기 떄문이다.
그 불안감을 야기시키는 것은 사실 무형의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도 않고 지레 짐작하여 실패를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현재의 아무개에게 자존감의 상실을 야기시키는가?
어떻게 스스로에게 그렇게 모질 수 있을까?
누구에게는 정말 아무런 의미없는 그런 흘러가는 정보들이
스스로를 져버린 이에게 선별적으로 인식되어서 옳지 않은 선택을 하곤 한다.
무책임한 혹자의 말이 그렇게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긴 인생 속에서 잠깐의 실패를 겪은 아무개가 이야기하는 세상 모든 부정을
한순간 바라본 여린, 스스로를 져버린 아무개는 그것이 곧 사회 전반적인 것인 줄로만 알고 앞날을 포기해버린다.
당사자도 모르게 죽이는 것이다.
글이란 것이 커퓨터에 입력하는 이진수만큼이나 아무 의미없는 기호의 나열인 것인데,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효과를 너무 많이 추켜세워준 덕분에
가상적인, 그러나 보편적인 인식 하에 글자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짊어준다.
그래서, 글자 하나만으로 아무개의 인생설계를 깨부수고
아무개의 미래를 간단히 짓밟고 그런다.
글이라고 하여 문자에 국한되는 듯 보인다 하면, 말은 어떨까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그 사회 속에서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약속된 소음이다.
그 소음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를 두고 감정을 가져서
아무개의 인생을 간단히 제한시키곤 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소명의식 있고 대단한 것인지는 누구나 알고있고, 부정한다는 것조차 불순하다.
그런데, 수능을 보고 의대를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중고생, N수생의 심정 속에
평생 전문직으로서 명예도 있고, 돈도 잘 번다는 그 단순한 생각이 우선인 경우가 과연 없을까?
실제 직장에서 얻을 수 있을 어마어마한 피로감, 대입 이후의 억나오는 시험들, 의대를 가고나서도 있을 학벌 차이 등을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 금기인 양 가려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인식에 국한되는 정보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게 하는 듯 하다.
가장 단순화된 기호와 소음에 너무 많은 가치를 주입시켜 수험생 60만 명의 펜을 굴리게 하고 있다.
꿈을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그런 것이다.
나는 무지하기에 나도 꿈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취업하고 돈 벌어서 현재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그대로 삶의 신념인 양 받아들이고
혼자 살 생각을 하고 있다.
나부터가 사회문화적인 인식에 속박되어 같이 기호와 소음들의 낭비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회문화적인 인식 하에 정상적이라 생각되지 않는 행태들에 대해 극히 하대하여
나는 내 스스로에게 어마어마하게 강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부담을 주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만약 내가 자살한다하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얼마나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미래일까
마치 함수처럼, 잠깐의 실패, 단 한 번의 실패마저도 사회문화적 인식 속의 '성공 법칙'(모든 시험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 성공에 나이 제한이 있다. 연봉은 ~이상이어야 한다)에 대입해보면 그 사람의 삶의 가치는 뚝뚝 깎여나가고, 그러한 비하가 무조건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 한다.
이 생각은 사실, 정말 모든 기초적인 것 마저 부정해버리는 비관주의일 뿐이며,
사실 정말 경제적이지 못한 생각이다......
하여간 나는 내일이 오기 시작하는 시계만 바라보면서
가만히 침이나 흘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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