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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tiness

나는 교육을 잘못 받았다

 중학교 때 가정 과목을 너무 열심히 공부했던 탓인지,

 오늘 내가 한 번 생각해본 개념이 글쎄 중학교 가정 교과서와는 상반되는 내용이라 고민인 와중에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발상인 것 같아 빠르게 적어본다.

 

 

 

 가정 교과서엔 꿈을 찾으라면서 '하고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하는 일'로 나누어

 어떻게든 이 세가지 일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분명 이상적인 원론이면서도, 사실 와닿지는 않는 이야기이다 왜냐,

 사람이 하고싶은 일 : 사회적 유용성에 부합되는 미래의 나를 설정하는 일

                          사회적으로 명망있고 돈도 잘 버는 직업-- 교수, 의사, 고위 공무원 or 연예인 되기

                          혹은, 원초적 욕망을 최대로 자극하는 행위-- 이성 만들기, '바람직한' 취미 등등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 떠올린 순간 자신이 지금 단기간에 당장 실행할 수 있는 행위

 사람이 해야할 일 : 사법, 규칙과 같이 외적인 강제성이 부여되는 제한적 행위 

                        혹은, 도덕(유교적 사관, 공동체주의적, 집단주의적,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등) 내적인 사념

                        혹은, 의무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 보편화된 생각이다.

 이 말인 즉, 사람이 하고싶은 일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유용한 인상'을 표상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가 유용하다 명령하는 가치-돈 등-에 잘 부합되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혹자는 장래희망, 즉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적지 말고 '행위'로 적으라고 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욕구에 이끌리는 것을 장래희망으로 적으라고 하는데,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사실은 사람의 욕망은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고정된 것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바람직한 인상'은 분명 규정되어 있고 객관화된 것처럼 여겨지며,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10대 초중반~ 20대 초반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하고싶은 일'에 치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밖에 없다. 이는 '철이 든다'고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현상이며, 

 사실 사람의 의지를 꺾이게 하여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감에 부합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을 그나마의

 자신의 인생의 무난한 '성공'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할 일, 이것을 따지면서 10대 초중반의 아이들의 가정 교육 시간에는

 "너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공부하는 것이니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하라"고 주문한다.

 이는 대단히 합리적인 생각이면서도, 실제로 행동하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하고싶은 일과 다르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를 쉽게 수용하는 것이 

 개개인(감히 허용된다면 '개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다)마다 다르기 떄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교육은 곧 외부의 환경이 사람의 의지를 조작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데,

 인간의 존엄성-자연권에 의한-은 사람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데에 있음에도

 외부의 환경으로 스스로의 의지가 어떤 방향으로는 쓸모없고 어떤 방향으로는 가치있다고 판별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화 과정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에서의 유용성을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에 혼란을 야기한다.

 존엄성-자연권-은 선과 악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통상적인 이해와 상반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의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 속에서(예컨데 학교나 기업, 작게는 조,그룹 단위) 얼마나

 유용한가를 보는 것이다. 이는 급수로 나눌 수 있으며, 객관적 지표라 하여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유용성에 따르면, 사회의 발전에 있어 저해된다고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행동에 대한 제한이 가능하다.

 사람은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고, 얼마든지 악랄해질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한 개인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 즉 범죄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

 

 사람은 얼마든지 범죄행위를 생각해낼 수 있고, 그 의지를 실현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여기에도 자연권은 존재한다. 사람은 언제든지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의미에서 당연히 사법적 제재를 받아야 한다.

 주의할 것은 인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데에 있다.

 

 자연권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느 경우에도 가장 선행되는 권리를 의미하며, 이는 곧 존엄성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인간은 존중받고 숭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탕에서 만들어진 '인권'이라는 단어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의미에 조금씩

 '사회의 유용성'이 추가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엄밀하게 자연권에서 그 의미가 멀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장 신문기사들을 봐도 인권이라는 의미에 사회의 유용성이 얼마나 묻어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엄밀한 사전적 정의가 달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과거 만들어졌을 때의 의미와 변함이 없어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속에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정의와 달라졌다고 하면

 보편적인 인식 하에서 그 의미는 변경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가 산, 바다와 같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니.

 그래서 인권과 자연권에서 나는 실질적인 의미의 변화, 차이를 보게 되었다.

 

 사회 규약을 어긴 자에 대한 '인권'을 논할 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니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아 놓은 놈이 어떻게 자기의 인권은 챙길 수 있어?"이다.

 이 생각의 기저에는 이것이 깔려있다.

 '저 사람은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였으니 저 사람 인권도 무시당해야 마땅해'

 그러나 보편적인 교육, 책에서는 "그러면 안된다"고 하니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자연권-존엄성-과 현 시대의 인권이 그 의미 사용에 혼란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둘에 차이가 없다고 교육받음에 비하여 미디어나 일반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그 둘에 차이를 두지 않아 생기는

 혼란인 것이다.

 답은 이것이다. "행위에 관계없이 그 놈은 자연권-존엄성-이 있는데, 사회적으로 볼 때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뺀 이유는 그 의미 사용에 혼란이 있는 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이므로.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과 많이 벗어났는데 다시 돌아가자면,

 가정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하고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할 일'에 구분을 짓는 것은

 그 의도 자체는 훌륭한 것이며 바른 인식을 할 수는 있게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컨데 초등학교 방학 시간표 등.

 

 중고딩 때 국영수사과를 배우긴 하는데 음 당연히 취업하려면 지금 2019년에는 일단 이과를 선택해야 하고

 취업 잘되는 공대를 가거나 무조건 취업이 보장되어 있는 전문직, 예컨데 경찰대나 의대 이런 곳이면 땡큐이지

 그런데 나는 학업 수행에 있어서 비교적 어려움이 있으니 그냥 고만고만한 공대를 가야겠고

 어 그런데 대학교에 가니까 글쎄 내용이 생각보다 많고 어렵네 한 학기에 이걸 다한다고?

 아 무슨 말도 안돼 고딩 때 겁나 공부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다. 학벌에 무임승차 하고싶다.

 아니 그런데 공대 취업 잘된다고 하지 않았나? 자격증이나 토스, 아니 해커톤 공모전 이런거 해야하나?

 동아리는 내가 들고싶은 거와 관계없이 취업에 도움되는 걸 들어야 하네

 아 그러면 이제 시간이 부족하니까 뭔가 줄여야 하는데.. 아 나는 게임을 줄이고 뭘 줄이고

 그런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네 등록금도 그렇고 장학금 받으면 좋긴 한데 아 힘들면 어떻게 하지

 취업하려면 어딜 넣어야 하지? 사기업은 대기업 중견 중소 나뉘어지네 어 근데 커뮤니티를 보니까

 중소 이야기는 조금 그렇잖아 대기업 찔러볼까? 아 인적성 이건 뭐야 아이큐테스트인가? 이걸 왜 해야하지

 그냥 고용 안정성 좋은 공기업 노려볼까? 아 뭐라고? 공기업은 들어가기 힘들고 지금 이미 직업 있는 사람도 찔러봐?

 4학년 되자마자 아니면 갓 졸업하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아니 근데 공채는 또 하반기에 많이 뽑네?

 근데 인턴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근데 공기업 인턴은 또 안쳐준다고? 아니 인턴이 공채보다 어렵다고?

 그럼 나는 졸업예정자로 일단 학교에서 해주는 컨설팅 이거 좀 받고 해야하나? 휴학해야 하나?

 누구는 졸업 안 하고 몇 년 있는다고 하는데, 그럼 언제 끝날 줄 알고? 나는 잘 될 수 있을까?

 기름집은 학벌을 많이 본다고? 어 그럼 반도체는 어떻길래.. 아니 XX차는 공채를 이제 공채를 안 뽑아?

 

 

 이런 극히 현실적이고 소시민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대다수가 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장래희망, 꿈이고 무엇이고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겠는가?

 인티넛 방송이나 유XX 크리에이터같은 직종에 지금 20대가 가장 많이 이끌리는 것은

 그 진입장벽이 낮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돈도 많이 벌고 생각보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니

 종래의 전형적인 구직 행위에 의문을 품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장래희망, 꿈이 이러한 인터넷 방송으로 이끌리는 현 상황(중고등생의 장래희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업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에 이끌리는 사람 개개인의 의지는

 외부의 환경과 무관하게 방향을 지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외부의 환경에 지나치게 간섭되고 심지어 그것만으로 행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기에 이러한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이는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서 외부의 환경에 의해 개인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비단 인터넷 방송이 아니라, 다른 예를 들더라도, 외부의 환경에 의해 자신의 장래희망이 '하고싶은 일'로

 점찍어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라든지, 어떤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것 같은 뭔가를 보면서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자기가 원한다는 게 어디 있어? 배부른 소리.

 

 

 

 그런데 나도 지금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를 몰랐다.

 하고싶은 일이 뭘까? 8년간 우울증으로 사는 와중에 굳이 그러한 의식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한 번 생각을 해보길,

 

 '하고싶은 일'은 사실 '지금 할 수 없는 일'과 유별난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생각해보았다.

 '해야할 일'은 조금 복잡한데, '하고싶은 일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여 해야한다고 판단하면,

 이는 '하고싶은 일'과 동류이다. 다시 말해, '지금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해야할 일'의 의미를 사법, 규칙

 등의 외적인 제재 혹은 도덕 규범과 같은 내적인 제재로 인한 제한적 행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는 단순히 '할 수 있는 일'로 변환될 수 있다. 왜냐면, 사람이 하였던 행위들을 바탕으로 규칙, 도덕 등이 나중에

 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논할 때에 전후관계를 따지자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

 의무를 제한할 것이므로 이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로 변환할 수 있다.

 

 말인 즉슨, 종래 '하고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할 일'을 행동을 기준으로 나누었다고 한다면,

 이를 단순화하여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로 나누고, '할 수 없기에 가지는 의지'를 추가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보았다. 이는 행동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정의라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사회의 유용성을 쫓되,

 자신이 하고싶은 일은 사실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불편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면서, 여유가 생기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일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받아들이기에 보다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예컨데 어떤 이과 진학 고등학생이 의대를 가고싶다고 생각하면 이는 '의사가 하고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학업수행능력은 사실 범재가 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비단 학생부 관리, 수능 점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과와 본과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인턴과 레지를 넘어

 30대 중반에 전문의를 딴다고 하여도, 그 뒤에 개업이든 아니면 대학병원이든 이렇게 또 진로가 나누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드는 비용만큼이나 버는 것이다. 그 비용(시간 포함)이 정말 적지 않기 때문에 

 그 수익이 나는 것이다. 다만 이를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위용이 굉장하여 선망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만일 그 고등학생이 성적이 수능 5등급이라면,

 재수를 하고 3수를 하고 ~~ 몇 수를 하여도 의대 진학만 하면 정말 좋은 일이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그것에 대한 리스크를 지기에는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는 비단 성공과 행복만 존재하지 않고 실패와 불행, 우울 그 모든 것이 존재한다.

 삶은 절대적으로 사람 수만큼이나 존재하고, 그 하나하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해당 고등학생이 의대를 가고싶다고 한다면 그 경우 자신의 삶은 의대 진학하는 것에 국한될 가능성이 있다.

  

 사람 수만큼이나 통계적인 의미를 갖는 사람 수명의 의미보다도,

 실제로는 자신의 앞날에 언제 죽음이 존재하는지 알 방법이 없기에,

 자신의 당장 큰 고난인 대학 입시에 삶을 거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사치라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수능을 보았다는 확정적이고, 고정적인 과거가 자신이 의대를 갈 수 있을만한 포트폴리오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장장 8년은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이 되면, 사회적 비용은 고사하고 당장 자신의 앞날이 텅 비어버리기 때문에 

 우울증이 도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면 주변의 사사로운 평가로는 이렇게 답을 들을 수 있다.

 '의지가 부족하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게 쉽게 생각하라고 했나'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은 모두 사실이고 온전히 자신의 탓이기 때문에, 더 우울해진다.

 그러한 말을 듣고, 생각을 하는 모든 순간순간에도 지금 삶을 살고 있는 것임에도 말이다.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은 주변에 대한 신의를 잃어버리고 유흥에 빠질 수도 있다.

 쾌락에 중독되어 그것으로 삶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은 삶의 의미가 그것으로 고정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맹점은, '하고싶은 일'을 '지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꿈만 꾸었기 때문이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고 절에 가서 108배를 하고, 성당,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새해 첫 참배를 하는 그 모든 생각에서 의대를 희망하여도,

 그것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비관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할 수 없지만 배워나갈 의지'를 보여야 하는 스스로의 선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래 '하고싶은 일'을 설정하는 것으로는 절대 실현될 수 없다.

 그 '하고싶은 일'이라는 것을 포스트잇에 써서 벽에 붙이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자기는 그렇게 될 거라 선언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한껏 받으면서 다들 기도해주고 박수쳐줘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식이 잘못되었고, 애초에 그 시작이 '하고싶은 일'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절대 될 수없고, 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그것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역사 시발점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고싶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밤에 치킨을 먹고 싶다. 나는 공부보다 게임을 하고싶다. 하는 모든 것도 '하고싶은 일'에 포함되지 않나?

 그럼에도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 단정지을 수 있나?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치킨을 시켜먹는 행위는 명백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게임도 그렇다.

 단지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자취 중에 돈이 급하여 치킨을 먹을 수 없지만 먹고 싶다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당장, 혹은 일주일 안으로 몸만 움직여서 알바를 하러 나갈 수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공부는 사실 사전적 정의 자체로는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고, 무언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배운다는 행위인 것이고, 그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다. 공부라는 단어에 마인드맵으로

 무조건 학원과 학교와 교과서와 국영수가 들어가 있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게임하는 것도 튜토리얼을 통한 '공부'가 필요하고, 애초에 신생아가 걸음마를 떼는 것도 '공부'이다.

 공부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까닭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과한 기대감이 작용하여 

 사전적 의미에 혼란이 왔기 때문이다. 절대 공부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논리에 문제가 있을까?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내일 모레 일주일 한달 1년 10년 50년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변함없는 것은,

 오늘 24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혹자는 오늘이 매일 똑같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하라고 자기계발서에 설파를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당연한 말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한 글을 읽는 것에서 나아가 사실 그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사실 그건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면 좋다.

 할 수 있는 일에서 선택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과거를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늘이고,

 할 수 있는 일에서 선택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앞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계획이고, 미래이다.

 

 여기에 '하고싶은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

 100번 기도하고 무얼 해도 속담마냥 '감나무 빤히 지켜보았자 감 떨어지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되는 것이 감나무 지켜보는 것이라 하면 그것 보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이나,

 바람을 불게 하든 나무를 올라가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걸 하면 그것으로 또 최선을 다 한 것이다.

 사회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나무를 올라탄 사람>빤히 지켜보기만 한 사람 이고 A급, F급으로 급수도 나눌 수 있지만,

 자연권의 관점에서 어쨌든 둘은 모두 존엄하고 자신이 할 일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대단한 존재이다.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빤히 지켜봐도 된다. 그것도 사람이 할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한 번 생각해보기를,

 '할 수 있는 일'과 '지금 할 수 없지만 배워나갈 의지'를 갖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종래의 가정 시간에는 딱 그 내 기억 속에 남은 몇 페이지인지는 모르지만 세 개의 원이

 벤다이어그램마냥 교집합으로 그려진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할 수 있는 일' '하고싶은 일' '해야할 일'

 그리고 그 교집합이 바로 장래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써져있던 그 본문.

 그러나 그 페이지는 잘못되었다. 나의 고정적이고 확정된 과거가 말해주고 있다.

 나는 과거에 '하고싶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을 고정적이고 확정되게 실패했다.

 그렇기에 그 방식, 그 교육은 잘못되었다. 하고싶은 일을 분명 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하고싶은 일'은 사실 할 수 없는 일이고, 이를 인정하자.

 할 수 있는 일들만 조금씩 해나가자.

 성적이나 학점이나 행복이나 쾌락이 그 과정 중에 따라오는 것이다.

 유급이나 재수강이나 불행이나 실패나 재수도 그 과정 중에 따라올 수도 있지만

 그것도 포함하여 과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정적이고 확정적인 그러한 오늘들이 곧 유언장이 되고 묘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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