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는 결과론적인 인식이다(게임에서 화를 내는 사람의 심리 분석)
어떤 심리가 발생하여 행동이 이루어진다고 판단함에 있어서 결과론적인 조작이 필연적으로 발생함에 주의하라.
심리는 어떤 행동이 일어남 이후 개인적으로든, 대중적으로든 판단이 사후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중 기만의 대상일 뿐이다.
심리는 그 자체로 추상이나, 명백히 물질이라 볼 수 있을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 등의 분비로 인해 예상되거나 야기되는 '반응'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심리는 추상이고, 자극과 반응 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이랄 것들의 대상물은 사람들 간의 공유가 원활하지만, 가축인 돼지, 소들이 가지는 심리, 개와 고양이 등이 가지는 심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심리'가 길바닥에 놓여있는 돌과 같이 자연풍화 되어가는 자연 그 자체로의 물질이 아닌, 인간의 추상에 의존하는 가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개와 곤충 등을 의인화하여 어떤 심리를 가지리라 상상을 하고 소설을 쓰는 것은 역시 인간의 인식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실제 개와 곤충 등이 가질 심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사회만이 공유하는 심리는 그 자체로 허상이다.
노예제 하의 사회에서 노비에게 응당 가져야 할 마음가짐, 심리 등은 2010년대에 이르러 무의미해졌다.
조선시대 아무개의 노비 문서를 한자를 몰라 대대로 족보처럼 전승해왔다 할지라도, 해당 아무개 집안의 사람들을 보고 미천하다 평하며 다짜고짜 발길질을 해대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법적인 금지는 곧 유형의 제재를 의미하며, 이는 곧 해당 '노비' 가문을 지녔던 사람에 대한 발길질을 멈추게 하는 강제력을 의미한다.
말인 즉슨, 노비 문서를 가졌다 할지라도 지금 2010년대에 이르러 그 아무개를 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같은 땅 위에서 오랜 시간 살아가고, 같은 문화를 보유하며 가족을 키워나갔던 과거의 사람들과 명백히 다른 인식이다. 다른 심리이다.
이는 조상과 후손들이라는 시대적인 임의 구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시대적인 임의 구분만으로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다르다고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얕은 생각이다.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오늘날에도 그러하였을진데, 어째서 오늘날의 양상은 다른 것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어째서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암암리에 횡행하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그러한 신분제는 되려 약화되고 더 고전적인, 고려시대 향, 부곡, 소의 개념을 빌린 지역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지역주의를 보고 카스트 제도의 폐해를 받는 불가촉천민이 "어리석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우리나라에서 어떤 신분적 차별도 받지 않는 아무개가 불가촉천민에게 "안타깝다"고 평가하는 것은 역시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반응인가?
의도적으로 조작된 반응이 아닌가?
요컨대, 심리는 그 사회가 정해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분개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기뻐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불만족스러워야 하거나 언짢아 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슬퍼해야 하고, 우울해야 하며, 집단적 동조까지 바라야 한다.
심리, 그 태생은 아무개의 마음 속에 있지 않다.
심리는 학습되는 것이다.
한편, 신경절을 가진 생물로서의 자극 및 반응은 당연히 실존한다. 이는 심리보다도 더 '현실적'인 것이다.
따라서 아기들이 배가 고파 울거나, 변을 기저귀에 봐서 불편해 하여 울거나, 배가 아파서 우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한편, 예컨대 2070년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갑작스럽게 국수주의가 분기탱천하여 나치즘이 재현되었다고 해도, 아기들이 그것을 보고 어리석다 분노할 수는 없다.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070년대에 10대, 20대, 30대~~80대에 이르러서도, 나치즘의 결말을 알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극히 당연히 그것에 대해 분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론의 실제 시행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그것을 배우거나 고려해보지 않고는 쉽게 알기 힘들 뿐더러, 그러한 인식론이 가지는 잘못된 점을 '교육'받지 않은 이상 그것에 대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70년대의 나치즘의 재현이라는 현상은, 그 현상의 선악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수용할 아무개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긍정과 부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요컨대 길가 위의 돌멩이와, 2070년대에 이르러 분기탱천한 나치즘은 그러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정확히 같은 수준의 것이다. 나치즘을 안좋은 것의 대명사로 여기는 사회에서 충분히 그것에 대해 교육을 받은 아무개는 이를 보고 분개할 것이나, 정확히 나치즘이라는 추상과 함께 그것에 대한 선악을 함께 공부하지 않은 아무개에게 있어서 그 나치즘이랄 것은 정말 길가 위의 초목과 돌멩이들의 수준과 다름없이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의 인식과 명백히 구분되게 존재하는 물질을 인간의 인식론 하에 편입하여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당연스럽게도 실제 현실과의 오차를 야기함을, 한 번쯤 고려해보지 않은 이상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인식론적인 조작은 추상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어떤 긍정과 부정의 대상도 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면 긍정할 것이고, 그것을 배제할 것이라면 부정하는 등의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어떤 행위를 기준 삼아 심리는 재단되는 것이다.
심리는 그 자체로 행동이 선행되어야 알 수 있을, 결과론적인 편향이다.
어떤 자극과 반응이 실재한다고 하여 심리 또한 그것의 위치를 점하고 실재한다고 보는 것은 그 오차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예를 보듯이, 나치즘에 대한 분노는 개인의 감정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나치즘의 폐해를 교육받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치즘에 대한 분노는 명백히 '심리'이다. 하지만 자극과 반응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때부터도 이미 꼬집으면 아프고, 변이 마려우면 배가 아프다. 이는 심리와 자극 및 반응이라는 생체 반응이 명백히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자극과 반응은 오직 생존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멀고 먼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의 DNA가 엮여있는 오늘날 아무개의 존재 속에서, 자극과 반응은 대단히 자연적인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더우면 땀이 나고, 추우면 땀구멍이 오므라들고, 꼬집으면 아프고, 때리면 화내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는 어떤 인종에서도, 어떤 문화권에서도, 어떤 지역에서도, 모든 사회적 밈을 배제한 자연상태에서도 예상 가능한 '반응'이다.
그러나, 심리는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일본과 관련된 무언가를 언급하면 그것으로 일단 반일감정이 생기는 것은 그러한 심리를 역사로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심각한 나치즘의 발현이었던 독일에 대하여 과거 프랑스 사람이 가졌던 심리를 우리나라 사람이 공감하기는 그러한 역사를 교육받지 않은 이상 힘들다.
심리는 이러하다. 하나의 심리를 발현시키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마치 무슨 심리를 발현시키도록 무수히 많은 언어적 도구들을 활용해 빌드업을 시킨 끝에 도출되는 것처럼,
인간의 인식은 은연중에 무수히 많은 조작이 가미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착각되고 있다. 그것은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바나나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시뮬라크르 속에서의 원숭이와 사실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의 것임에도.
적어도 자극과 반응이라는 신경절의 작동은 사람의 그것과 원숭이의 그것에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사람과 원숭이를 구분하는 차이는 '심리'가 공유될 수 있는지 이며,
이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회적 밈(언어, 역사 등)을 공유할 수 있는지 가 중요하다.
이것이 어떤 인종도, 문화권도, 지역도 넘어선 생물종의 차이마저 넘어설 수 있는 인식이다.
적어도 자극과 반응이라는 신경절의 작동 하에 사람과 물고기와 곤충과 코끼리와,,, 그 모든 것은 일치한다.
오늘날 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분노는 심리이다.
게임은 명백히 현실을 모방한 시뮬라크르 혹은 추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게임에서 지는 것이 곧 생존과 연결될만한 것은 아니다. 게임으로부터 얻는 분노라는 심리는 꼭 자극과 반응 하에서 생존과 직결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상한 것이다. 대체 게임으로부터 얻는 분노는 그 정체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길, 이것은 '멀미'와 다름없는 것이라 보고 있다.
몸은 가만히 있으면서도 VR 기구를 착용하고 레이싱 게임을 들여다 보는 것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몸이 가만히 있으면서도 시각적, 청각적 반응이 실제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인식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보편적, 통상적 의미 하의 '멀미'를 유발한다.
마찬가지로, 게임 등의 추상으로부터 얻는 분노 역시 그 자체는 자극과 반응 상 자신의 생존과 직결될만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실제 범법을 저지를만큼 큰 분노를 느끼게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이는 바로, '심리'가 '자극 및 반응'이라는 생체 반응과 일맥상통한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다못해 추상의 것인 게임에서마저 분노를 느끼는 것만으로 자신의 분노라는 '심리'가 곧 '자극과 반응' 상 생존 상 위험하다는 것과 동치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는 곧 '멀미'처럼, 실제로는 어떤 생존 위험 요소가 없음에도(실제론 몸을 움직이지 않음에도), 심리상 분노를 느끼게 되는 대상인 게임에 대해 그것을 생존 위험 요소로서 인식하게 되는 양상이 되는 것이다.(실제론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이를 나는 개인적으로, '감정의 멀미'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 생각되길, 2010년대,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얼마나 생존에 직결된 위험 요소를 체감하지 못했길래 하다못해 추상이나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게임 속에서 분노를 느끼고 생존에 위험을 느끼는 것인지 우습기도 하다.
정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다못해 게임 속에서 분노를 느낀다니..
자신의 생존에 위험이 되는.. 그것은 게임이 될 수가 없다. 게임은 추상적인 것이기에 실제 물질과 관련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게이머가 대회에서 져서 상금을 못 타서 밥을 못 먹게 되는 것이 과연 일반인들이 게임 속에서 분노를 하는 점진적 원인이 되는가?
하물며 그 프로게이머 역시 대회에서 진다고 하여 생존의 위험에 직결되어 있을 정도로 한순간에 죽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일을 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게임에서 분노라는 심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는 역시 감정의 멀미 때문이리라 짐작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