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번개치는 밤

Not-exist 2019. 7. 28. 02:36

 새벽 2시에 잠도 안 자고 난 머릿속에 내 딴의 철학이랄 것을 주장하며 괜시리 무의미한 상상만 하고 있다.

 

그와중에 내가 바라보았던 글은 게임에서 자신의 감정을 뱉어내기 위한 욕설과 함께,

 

4년동안 적어도 두 번 이상 하지 못했던 또래와의 대화. 군대에서의 나이는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 대화들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미, 어떤 도의적 책임, 사회적 의무 등을 느꼈으며 동시에, 오늘 하루종일 게임을 하며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욕설들이 혼재하는 사회를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관측하였다.

 

 

 

언어라는 허울뿐인 것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의 물질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은 인간 인식과 독립되어 실재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바라보지 않고 그 존재성 자체를 느끼는 것은 불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어에 '사람' 그 자체의 존재성을 집어 넣어 사람 그 자체를 추앙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반면, 사람 그 자체를 깎아내리게 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기저심리는 전자는 자신의 사회적 유용성을 덩달아 인정받기 위함이고, 후자는 자신의 감정을 흐트리게 한 추상을 제기한 물질(타인 포함)을 공동체 의식/구역에서 배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양면성은 모순된다.

 

자신이 사회적 유용성을 적어도 평균 이상, 중산층 정도의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자신이 포함되거나 포함되어있을 공동체 군상 속의 개인들을 모두 추앙하는 것이 전략적이고 합리적이다.

 

한편 어떤 욕설이라는 수단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공동체 내 어떤 개인을 배제시키려 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궁극적 와해를 야기시키며, 자신이 어떤 이를 배제시키는 것이 가능하였다면 오히려 자신 또한 어떤 이에게 배제당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국가 단위로 커졌을 경우에도 개인은 타 공동체로 도주할 방법이 있으므로 어떤 공동체 내의 트롤링이 분명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공동체의 구분을 전 세계, 전 인류로 넓혀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의 구분 없이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그 언어 속에 욕설 및 비하 표현이 존재한다. 

크리올어와 피진어의 발생 이전 바디랭귀지 속에 이미 주먹질이 존재하고 이를 실행하는 트롤러의 존재는 분명 예상할 수 있다.(설령 어떤 인간 그룹이 인간들은 절대 헤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원 약속했을지라도 이에 대한 배반은 예측 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미 의사소통이라는 상호작용 속에는 자기파괴적, 상호파괴적, 타자파괴적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들은 자아의 의지로 인해 도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굳이 심신미약이 아닐지라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면, 

결국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 표현 속 긍정적 언어들과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언어 표현이 혼재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은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유의미함을 잃어버린다.

말인 즉슨, 인간이 어떤 군상을 이루어 사회를 이루는 것에는 해당 집단 내의 어떤 사회적 밈이 작동할 뿐으로, 개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타 공동체로 나아갈 수도 있으며 어떤 이유없이 그저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긍정 언어와 부정 언어의 혼재는 그 자체로 인간 인식의 다양성을 의미하며, 이는 무작위성과 사회적 밈의 조율에 의한 것이며, 끝으로 이는 인간 개인의 인식으로 이루어진 사회 공동체라는 시뮬라크르에 대항하는 각 개인들의 불안정 요소이다.

 

 

이는 전 세계 속의 욕설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으로 방증되며, 이는 전 인류가 하나 되어 인류의 도덕적 발전, 사회 제도의 발전, 과학의 발전 등을 야기할 수 없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그저 긍정 언어와 부정 언어의 혼재 하나만으로.

 

 

사람이 신의 형상을 인간 형태로 만든 것 자체가 이미 사람이 어떤 유의미한 능력이랄 것을 존재한다고 상정하고 이를 추앙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다신교의 어떤 신의 형태가 동물을 본딴 것이라 해도 부분적으로 의인화되거나, 최고위 신은 사람의 얼굴을 본딴 모습이 존재한다. 

이는 사람이 스스로의 추상 속에 몰입한 끝에 물질적인 요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어떤 완벽함이랄 것을 추상임에도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개개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으며, 실상 그 안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완벽함, 만물의 영장스러움, 천부인권적인 면모들의 속속들에는 추상, 심지어 현대엔 시뮬라크르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