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tiness

존재성은 무작위성으로부터 비롯된다

Not-exist 2019. 7. 17. 19:30

 존재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이러니함이 또 어디 존재할까?

 존재성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이루어진 언어 표현이다.

 존재성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기 위해선 그것의 비존재성을 나타내야 한다.

 하지만 존재성이 아닌 것의 범주가 어째서 비존재성이라는 단어로만 일축되는가?

 

 존재성이 비존재성을 압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비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사실상 불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성을 가지는 여러가지 것들을 우리의 주변에 놓고자 한다.

 심지어 그것이 추상이라는 개념에 불과한 것임에도 말이다.

 실재론을 여기에 갖다 붙인다면, 추상이 실재에 근거하여 존재성을 위임받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추상이 자신의 비존재성을 압도할 유력한 존재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또다른 실재로 인정받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 모성애, 부성애, 우정, 증오, 분노 등이 있겠다.

 이러한 감정적인 것들은 환원주의적으로 신경전달물질 및 호르몬의 분비 및 흡수에 의한 것임에도

 그것의 존재성을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에 비존재성을 부여하면 인간관계의 여러 면들을 언어적 상상력 하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랑, 모성애, 부성애, 우정, 증오, 분노 등은 모두 공동체의 약속에 의해 비롯되는 감정이라 볼 수 있다.

 만일 공동체의 약속이 없었다면 위의 감정들을 가졌을 때 사람들은 해당 감정에 대한 언어 표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자신만의 유의미한 인간적 감정이라 여기고 여전히 활용했을 것이다.

 요컨대 감정이 공동체의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한편 나는 근래 들어 시뮬라크를 너무나 '만능적인' 단어로 남용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시뮬라크르가 인간 인식의 근본이라고 주절거린 나머지 인간의 '신경절마다의 자극에 따른 반응'같은 곤충이라도 할법한 기초적 반응에 대해서는 확실히 설명할 수 없었다.

 요컨대 이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시뮬라크르로 도배되어있다고 한다면, 1밀리그램의 뇌를 가진 곤충이라도 할법한 행위들, 주관적 인식(곤충의 인식)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곤충이 자신들끼리의 어떤 약속들을 널리 퍼뜨려 세계적으로 곤충 단일의 유형적인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아니다.

 전세계에 거주하는 일부 모기가 인간을 물어잡수신다고 하여 그것을 모기 사회의 공통된 메시지라고 보기 힘들다.

 모기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산란기가 되면 인간을 물어 피를 빨아먹는 것으로 되어 있던 것이다.

 이것을 모기 사회의 유형의 시뮬라크르로 인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그건 시뮬라크르라는 단어에 대한 과잉남용이다.

 이러한 양상이 인간 사회의 어떤 유형의 인간관계가 무조건적으로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과, 또, 인간의 자아정체성 근본이 시뮬라크르라고 주장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모든 것, 그야말로 인간의 '존재성'이라고 하는 것, 말인 즉슨,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유의미함이 온전히 시뮬라크르에 의한 것들뿐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협소한 판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곤충이라도 할법한 행위, 주관적 인식들이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없는가?

 대우적으로,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있는가? 곤충이 하지 못할법한 행위, 주관적 인식들이.

 이것이 참이라면, 곤충이라도 할법한 행위, 주관적 인식들을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곤충이 자신의 신경세포들에서 받아들이거나 반응하는 그 모든 자극들에 대한 것들이 실재하고 있음에도 그것들을 똑같이 인간의 신경세포들에서 일어나는 자극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간 인식, 행위들로써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가 없음에도 비단 신경세포라는 뉴런의 개수 차이 등을 빌미로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얘기렷다.

 

 여기서 인간 언어 표현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인간 뇌의 뉴런 개수를 뛰어넘는 동물들(일부 돌고래 등)이 분명 실재함에도 세포의 개수 차이로 '인식'이라는 것에 인간과 동물, 곤충 사이의 어떤 유형의 구분을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사용되는 '인식'과 동물, 곤충에게 사용되는 '인식'이 다른 의미라는 것을 내포한다.

 실상 곤충에게도 자신의 뇌라고 불릴만한 신경절이 존재하되, 이것은 인간 언어 표현 상의 '인식'의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곤충에게는 자신의 주관적 인식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곤충의 인식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그리고 표현할 필요도 없는. 왜냐하면 인간의 신경절들에서 나타나는 기초적 감각반응들을 '인식'이라는 단어의 범주 안에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곤충의 그 현상과 다를 바 없으므로 곤충도 분명 인간의 '인식'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럼에도 상기하였듯, 보편적으로 곤충의 인식과 인간의 인식은 구별되어 사용되므로, '인식'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모순되어 있다. 

 

 

 

 

 

 

 

 

 '인식'이라는 단어가 모순된 단어임에도 어째서 인간 인지의 고등 발달을 찬양하고 숭배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유형의 신화, 소설 등을 인간의 것이 아닌 유형의 실재가 남겼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이 아닌 것은 인식이라는 단어를 공유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에 대해 인식하는 타자의 존재성을 입증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인간이 아닌 것이(설령 그것이 인간보다 하등하든, 고등하든) 인간에게 유형의 메시지를 건내왔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모순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인간의 인식 이상으로, 이하로 인식을 인지할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존재성 위의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가?

 

 비존재성이라는 단어는 인간 언어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무의미한 단어이면서도,

 인간 인식의 근간을 뒤흔드는 단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 더불어 인간을 포함한 자기 주변의 공간에 대한 시각적 인식(가시광선 하의)을 가진 모든 동물, 곤충, 단세포 생물들에게도 비존재성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존재성을 가진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 현존하는 자기 주변을 인지하는 동물의 최선이다.

 비존재성을 상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존재성은 어떤 사람의 추상적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존재성은 존재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존재성은 존재성의 반댓말이 아니다.

 존재성과 비존재성은 모두 무작위성의 위에 놓인 (인간 인식이라는) 범주, 카테고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비존재성의 비는 非라는 부정 의미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단순히 이해하기 힘들다.

 틀린 것과 다른 것 이 두 표현의 차이 중 후자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좋겠다.

 

 

 인간 인식이 어째서 존재성에 더 의존하는지 물었다.

 그것은 무작위성에 기초한 자연, 生 그대로의 이미지를 인간 인식이라는 시뮬라크르로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곤충과 다름없는 인식, 무작위적 행위, 주관적 인식을 하는 것이 불가한 것이 아니다. 한편 인간은 곤충이 하지 못하는 인식, 무작위적 행위, 주관적 인식을 할 수가 있다. 이 두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합치면 인간은 적어도 곤충과 다름없는 인식, 무작위적 행위, 주관적 인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인식과 곤충 인식의 교집합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곤충과 단세포 생물의 인식(여기까지 오면 인식이라는 단어 대신 존재성이라는 단어를 차용하는 것이 좋겠다)의 교집합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0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가정해도 그 0이 존재한다는 것이 존재성의 일환이다.

 마찬가지로 단세포 생물과 무생물로서의 존재성의 교집합은 존재한다.

 이때 무생물은 곧 생물이 아닌 모든 다른 것들의 집합이므로 결과적으로 인간에겐 적어도 무생물적인 존재성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인간적 행위, 인식'들이 인간 공동체의 시뮬라크르에 가까운 것이라 한다면, 인간이 마치 DNA의 기계처럼, 자연적으로 당연히 그리하게 태어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행위, 인식들은 궁극적으로 무생물적인 존재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요컨대 후자는 무생물적인 존재성에 가까운 것이다. 

 

 이때 무생물적인 존재성은 무엇인가? "무생물로서 관측되어 인식됨"에 불과하다. 이것은 비존재성을 논하기보다도 협소한 시각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끝으로 무생물의 비존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하다. 존재성이 다르게 관측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인식은 모로 가나 도로 가나 존재성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존재성이 당최 무엇인지 궁금할 수 있겠다.

 비존재성은 무작위성 위에 기초한 무한히 많은 이미지를 뜻한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청소기 저 모습은 무생물로서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생물로서의 의식, 행위가 불가하고 나와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저 청소기의 비존재성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청소기의 모든 입자 하나하나들이 스스로의 동시성으로 인하여 온데간데 퍼져있는 것으로 도저히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존재성은 내가 바라보는 청소기 그대로의 모습이고, 비존재성은 청소기가 가질 수 있었을 미세하게 다른 여러 무한히 많은 형태, 이미지를 의미한다.

 인간 인식은 존재성에 근거한다. 이때문에 비존재성을 관측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불가능한 것이다.

 한편 인간의 태생 자체가 무작위성에 근거한 것들의 나열이었음은 중요한 사실이다.

 

 빅뱅으로부터 어쩌구 저쩌구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나'가 태동한 것은 꼭 무작위성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사실 애초에, 빅뱅이라는 것이 황당하게 들리는 까닭은, 인간 인식의 언어로 표현하기에 알맞은 존재성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판별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빅뱅 이전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아무리 펼쳐도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는 까닭은 현재까지의 존재성에 연관된 언어적 상상력이 빅뱅 이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요컨대 빅뱅이 꼭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 무작위성의 연속 속에서 인간 인식(존재성) 하에 관측 가능한 우주를 표현하고자 할 때 '표현 가능한 시점'인 것일 뿐이다. 그 이전에도 어떤 형태이든, 이미지이든, 비존재성이 만연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나'라는 인격체로, 단백질 덩어리로 당도하기 위한 수많은 억겁의 시간동안 무작위적으로 결정된 끝에 '나'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그저 '나'라는 어떤 (결과론적 관점에서의) 방향성을 지닌 수많은 억겁의 시간 속의 비존재성이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하다.

 요컨대, '나'라는 어떤 유형의 형태, 이미지를 대표하는 이전의 수많은 '나'의 모습들에는 꼭 존재성만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비존재성이라는 언어 표현 자체가 '존재성 외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꼭 비존재성을 가진 '나'들은 관측 불가하였음이 자명하다. 따라서 비존재성을 지닌 '나'들은 마치 평행우주 속에 나가떨어진 것처럼 '나'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존재성을 지닌 '나' 하에 인식될 뿐, '나'라는 이미지를 가지기 위한 수많은 '나'의 형태들은 비존재성을 필두로 하여 사라진 것이다. '나'는 장구벌레도 될 수 있고, 모기도 될 수 있고, 맹금류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은 비존재성을 필두로 평행우주로 떨어졌다.(관측되지 못한다.)

 

 '나'가 오늘날의 '나'를 이루는 것은 정말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이와중에 '나'의 모습을 이루기 이전에 수많은 '나'의 모습을 이루었던 비존재성을 지닌 무언가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가 '나'라는 인간 인식 속에 머물러있음을 깨뜨려버리는 귀중한 인지적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고립무원의 독립적 존재라고 스스로를 대단히 여기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월하게 여기기보단, 스스로의 모습을 지녔으나 비존재성을 필두로 하여 관측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며 자신 속에 담겨있는 '무작위성'에만 탄복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범죄 행위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 공동체의 시뮬라크르를 벗어나는 왜곡된 인간 인식의 결과물을 범죄라고 칭할 때,

 그것은 비시뮬라크르라는 의미로써 '무생물로서의 존재성'에 가까운 어떤 수많은 여러 가지 것들 중의 하나의 모습을 본딴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꼭 무생물은 아니더라도, 단세포생물로서의 존재성, 혹은 곤충으로서의 존재성 등등의 교집합 등을 나아가다가 적어도 0 이상의 유의미한 존재성을 지닌 원소를 발견할 때 그것이 곧 해당 개체의 범죄 원인이 되리라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도마뱀으로서의 존재성 중 성욕에 의한 범죄였던 것일 수도 있겠다.

 

 

 오해하지 않고 바라보길,

 인간은 자신의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대로, 나아가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대로 행동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지닌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 있고, 입도 움직이고, 혀도 움직이며, 횡경막도 움직이고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가짓수대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한 무작위성 하의 인간 행위 속에는 어떠한 선과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행위의 근간들은 '인간 공동체의 시뮬라크르'에 가까운 것 혹은, '무생물로서의 존재성'에 가까운 것 두 극단적 측면들 중 하나에 의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선과 악이라고 통용되는 도덕관념은 특히 '인간 공동체의 시뮬라크르'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생물로서의 존재성'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이, 단순히 '곤충으로서의 존재성'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곤충들 사이에선 도덕 관념이 통용되지 않는다. 요컨대 인간 인식 상의 도덕관념은 칼 융의 '집단적 무의식'의 용어를 차용할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도덕관념은 시뮬라크르이다. 인간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도덕관념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당위성을 이끌어내진 못한다. 그것은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그래서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의 도덕관념은 시뮬라크르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담백하게 객관적으로, 인간의 도덕관념이 무생물로서의 존재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도통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례로, 곤충의 존재성 속에서 도덕관념이 존재하지 않음은 이미 자명하다. 하물며 곤충들 사이의 저마다의 주관적 인식 하에 '곤충 도덕'이 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인간 도덕'이 곤충에게 그대로 통용될 수 있겠는가?

 

 

  

 목욕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을 여기까지 심화시키니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닌데, 어쨌든

 한 번 생각해보자. 목욕하다가.

 자신으로 보여질 수 있었던 수많은 비존재성과 존재성을 아우르는 무작위성 속에서 오늘날 자신의 존재성을 고정적으로 딱 한 가지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한 번 생각해보자. 얼마나 신기한가?

 필자는 어떤 철학적, 도덕적 관념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딱히 아니다만, 인간이 어떻게 인간 스스로의 행동들을 다 이해할 수가 없는지 궁금하긴 하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무작위성.

 

 한편 게임을 통해 빗대어보기도 하려 했다. 필자가 카타리나를 플레이한다고 하여 카타리나 캐릭터 스스로가 qwer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의 컨트롤이 꼭 들어가야 카타리나라는 캐릭터는 스스로 qwer이라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카타리나라는 캐릭터가 스스로 자아를 가진다고 한다면,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어째서 이럴 땐 qwer 중 스킬 하나를 안 썼지? 왜 이때 존야를 안 썼지? 왜 더 나은 킬각을 만들지 못했지?

이것은 인간 행동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스스로의 모순성과 닮아있다. 마치 인간 이전의 거대한 절대적 무언가가 인간 개체별로 유별난 무언가를 전도시켜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카타리나와 플레이어의 관계처럼)

이때 가능한 인식의 가짓수들은 모두 존재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들이다.

예컨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모순적 자아판단을 지닌다.고 하는 것이 있겠다. 인간 공동체 속에서 저마다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순성을 채워줄 절대적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개체별로 유별함을 지니는 원인이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 존재의 압도적인 힘을 그려넣음으로써 절대적이고 거시적 존재성의 지배를 당연한 것처럼 서술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야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모순적 자아판단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그저 무작위성에 근거할 뿐, 이것을 공동체의 시뮬라크르로 교정할 뿐인지라,

인간 행위의 反시뮬라크르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인간 자아판단의 모순성은 그저 무작위성을 미처 교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인식일 뿐인 것이다.

모든 인간 개체가 여러 교육들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 드뷔시, 오일러, 가우스 등의 장르를 불문한 여러 세기의 유명인들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처럼,

인간 개체별로의 시뮬라크르 수용성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 과정 중 무작위성의 교정이 덜 이루어진 개체 또한 분명 존재함이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그로 인한 개체의 무작위적 행위로 인한 피해는 언론 기사를 통하지 않으면 알 수조차 없다.

예컨대 언론이 인간 그 자체의 이타주의에 대한 기사만 실어나른다면, 사람들은 이타주의가 사회에 만연하다 생각하며 "도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것이지만 그 와중에도 실제 이기주의 등을 통한 범죄 행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이냐면, 인간의 존재성의 기반이 무작위성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의 무작위성 중 딱 한 가지의 순간순간의 행위들은 무작위성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고, 인간 공동체의 교정(시뮬라크르)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뿐이다.

단지 이 두 가지의 방향성에 근거할 뿐인 것이다.

 

 

 

 지금 창문에 모기가 들어와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2019/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