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4~7월 일기
16. 3.26
의존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의지할 구덩이를 매번 파놓았더니,
오늘날 헤어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기약 없이 헤매인다.
정처 없이 망망대해로 걸어가는 나날 속에 무미건조함만이 울렁거리는데, 앞으로 무엇을 새로운 자극으로 삼고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
언젠가 반드시 곯아 죽는 것이 삶 아닌가
언제 어디에서 내가 가는지도 모르는 채 사회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그대로일 것이다.
내일 출근하는 사람들 출근하고
학교에 가는 사람들 역시 그대로 출근을 한다.
그들의 삶 속에 언제나 결말이 도사리고, 그 끔찍한 생각들 속에는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지해야 할만한 당위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로 우리네 삶은 유한하다.
언제 갈 지 모르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사회화의 과정 속에서 그것을 잊어가는 것일뿐이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무지몽매함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도 관련이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그에 대한 개인적 사유는 정지해 버린다. 더이상의 발전도 없이.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무슨 무엇을 가치있고자 나날이 열심인지?
착각 속에 허울뿐인 구덩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만큼의 구덩이를 파지는 않았구나 하며 자위하는 것이 그들과 우리의 삶이다.
16. 3. 28
26시간 동안 2시간밖에 못 잤다.>
뇌가 녹아내리는 느낌이라규 한다면 소설같은 표현이겠지만,눈이 녹아내린다는 표현은 사실에서 벗어남이 없는 표현이다.
눈 안쪽에서부터 뜨거워지면서 하품이 몇 초 간격으로 줄줄 쉴 새 없이 그저 흘러나오는 것이 기분 참 묘하고 아 이 기분을 생각하기 이전에 잠이라도 한 번 푹 자고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계속계속 든다.
16. 3. 29
지나간 시간들 속에는 분명 기회가 많이 있었다.>
방학 잘 보내고 있니?
=== 샘 전화번호 알려달라는 거냐?
010-OOOO-OOOO
내 생각에는 선생님께 전화할 일이 아니라 우리 딸 연주회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서 내는 것도 좋은 숙제가 될 것 같다.
심각한 수해를 입은 예술의 전당에서 빨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정부의 고위관리가 올 때까지 연주를 강행하려 하다가
모든 연주 준비가 되어있는 현장에서 고위 관료의 말 한 마디나 행정당국의 공문 한 장에 의해 어이없게 공연이 취소되는 현장을 네가 눈으로 보았잖니?
예술과 생활에 대한 체험 중에 그보다 더 절실한 체험이 어디 있겠니?
예술이란 인간의 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수단인데, 생활과 동떨어진 정서는 공허하기 그지 없거든.
수해 현장에서, 연주를 중지 당한 상황에서 절실하게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내 딸이 그 날은 마치 전쟁이 닥치는 현장에서 비장하게 마지막 연주를 하는 거장 피아니스트같이 느껴진 것은 OO인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그날 어려운 교통여건 속에서 그 먼곳까지 찾아와 준 많은 분들(너를 포함해서)의 마음 속에 우리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알기에 깊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구나.
11월 19일(토요일) 8시로 다시 날짜가 잡혔으니까 그때 다시 오렴. 혼자 오지 말고 누나랑 친구랑 오면 더 좋지.
그럼 안녕.
오늘 지금 시작하는 이 네이버 아이디 이전,
이제는 안쓰일 아이디 속에 깃든 세월들을 한 번 열어보았다.
야자실의 냄새가 난 뒤에는 오카리나의 냄새가 났고 그 뒤에 놀이터의 냄새가 뒤따랐다.
그 뒤까지의 시간은 너무나 어릴 적이라 그 냄새를 못 맡았지만,
야자실의 냄새 이전, 오카리나의 냄새, 나에게는 중학교 시절의 그 때,
저런 이메일이 왔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는 저 선생에게서 기대를 받았구나.
내 기억에, 엄마랑 같이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 예술의 전당에 갔었던 것이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아스팔트 도로가 갈라지고(그 날 한순간에 갈라졌는지는 모르지만) 물 구덩이가 한 두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공연을 못보고 나왔나? 그랬던 것 같다.
그 뒤에 저런 메일이 왔었겠지.
하지만 난 절대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안 본 메일을 삭제한 뒤에 저 메일이 남았다는 것은 누군가는 봤다는 것인데,
메일이 가족 공용이었으니 아마 내가 아닌 다른 가족이 봤을 것이다.
왜 내가 이렇게 저 메일을 봤냐 안봤냐 따지냐면, 만일 봤다면 저 공연을 11월 19일날 보러 갔을테니까.
안갔으니까 이런다.
안타깝게도, 안갔다.
갔다면, 지금의 인간관계 속에 드물게도 깊은 연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을 깊게 사귀는 것은 옛날의 일이다. 지금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 속이 쓰리고 아려온다.
저렇게나 나에게 기대를 주었던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니..
또다른 메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잘지내고 있나요? 이번주 토요일에 첫 멘토링을 하겠네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당:)
네이트온에서 봐요 친구추가해주세요!)
제가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멘티가 작성해야하는 서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첨부된 파일을 작성해서 이번주 토요일까지 보내주세요:)
그럼 토요일날 봅시다~
중학교 때, 서울대생에게 멘토링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 캠까지 지원해줬었다.
하지만, 네이트온에서 캠이 인식을 잘못했었는지 학교에 다시 갖다주고 멘토링은 그대로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그 와중에 내가 했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복지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했었을 것이다.
"저 이 캠 그냥 주시면 안돼요?"
"너는 이 캠이 고장나서 다시 돌려준 거 잖아?"
아............................................................
...........................................................................그 때 중학교 때의 순수한 감정에서
나는,
서울대보다도 캠을 더 갖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던건가?
지금 이제 성인이 된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지만,
하 참 웃긴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었을까 싶은데, 실제로 내가 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웃긴다.
지금에 서울대.......는 상상도 못할 영역이다. 그들고 나의 영역은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더 심각하다.
이 이메일을 보면서 나는 아차 싶었다.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에는 기회가 세 번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똑똑히 알았다.
그리고 나는 이미 한 번을 돌이킬 수 없이 버린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서울대생에게 멘토링을 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왜 내가 지금 이토록이나 안타까움을 느끼냐면,
나도 지금 마찬가지로 대학생으로서 멘토링을 해주는 멘토의 역할을 지원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
아마 그 서울대생도 이런 위치였겠지
나는 서울대가 아닌 다른 대학교 학생으로서 이런걸 신청하는걸까
그보다도 '낮은' 대학생으로서, 수준이 '낮은'걸까
기회가 보였는데 그게
과거의 일이라니 정말
안타깝다고도 말 못한다.
2016. 4. 2
기피>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설령 이렇게 된다 하더라도 슬퍼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괜찮다. 나는 이리 살아도 괜찮다. 삶은 길고 나의 꿈은 장대하다.
꿈이 높다면 성공으로까지의 길 아래에 얻고 가는 것들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허들은 너무나 높이 떠있기만 하였다.
하루하루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
나의 허리는 점차 굽어져만 갔다.
어느순간 나의 현실을 파악할 제,
정신적으로 몰려 있는 나를 보았다.
어째서 말로만 되지 않는거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
도망가고만 싶다.
어디론가,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다.
자유,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권리도 받지 않고 그저, 느긋하게 아무 걱정 없이 죽어가고 싶다.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 무미 건조한 나날 속에서 그저 죽고만 싶다.
어차피 말로 꺼내도 씨앗은 되지 않는다.
일찍이 깨우쳤던 바이다.
말로만 하겠다. 느긋하게 죽어가고만 싶다.
살아 있어도 타인의 향취를 못느낀다.
살아 있어도 즐거움들에는 모두 가식이 있다고만 느껴진다.
살아 있어도 이해자를 만날 수 없다.
타인은 모두 자신 이외의 것을 생각할 이유도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서 생각하질 않는다.
나는 이런 현실에 무너지는듯한 느낌을 받곤 했지만, 그들 모두 언젠가 죽는 한 낮의 하루살이밖엔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 또한 살아있는 송장으로서 그들의 행보가 이해가 갔다.
죽기 전까지 가장 꼴보기 싫은 것은 가식이다.
자신들이 오로지 자기밖에 보지 못하는 동물일 뿐이라는 것을 가리고 타인을 위하는 척 하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에 왜 그리 애를 쓰고 술을 먹고 친해지려 하는가?
나는 언젠가부터 의식하지 않는 새에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이젠 가식 없이 인정할 수밖엔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어떻게 지냈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도 주위에 존재하질 않는, 존재한다 하여도 모두 가식밖엔 없는 텅 빈 공허한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언제나처럼 방구석에서 썩어가는 것이 내 주말마다의 스케줄이다.
컴퓨터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잠만 잔다.
그렇게 느긋하게 죽어가는 연습을 해간다.
평일에는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나중의 취업을 위한 대학교 공부를 한다.
지하철을 타도, 그들 모두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며 나 또한 그들의 신경이 도저히 쓰이지가 않는다.
학교에서도, 히히덕거리며 웃는 젊은 날의 초상화들을 붓으로 검은색으로 덧칠하고만 싶을 뿐이다.
그들이 술을 먹으며 낭비하는 돈 각각 4,500원 씩에는 내가 그날 하루동안 밥값을 아껴가는 돈 모두가 들어가고도 남는다.
내가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뽑는 헌혈도 결국 가식같은 남을 위한 봉사이다.
그렇게 2주에 한 번을 햄버거세트로 교환하면서 사는데, 대체 너네는 무슨 수저를 가졌길래 그리 히히덕거리며 헤헤거리며 즐거워 하는 것이냐
따스한 봄날 아래 그림자지는 곳에서 내가 숨쉬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언젠가 내가 아무런 의미 없이 취업을 하고
아무런 의미 없이 돈을 벌다
아무를 위해서도 쓰지 않은 채로,
오로지 나같은 아이를 또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서,
아무 걱정도 없이 죽어가고만 싶다.
이를 위해 나는 첫 취업을 위한 나날부터가 죽고싶은 것이 참 어쩔 수가 없다.
아무개는 정부가 취업길을 일부로 막아놓고 정치에 관심 없이 오로지 자기 스펙 올리기에만 열중하게 만든다는 음모론을 퍼뜨린 적이 있다.
솔직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느긋하게 죽어가고만 싶은 것이다.
무미건조하고 무색무취이기만 한데,
나의 어릴적 꿈을 내 자신이 박살을 낸 것인데,
왜 나는 아무런 고통없이 실패한 인생을 마음껏 끝낼 수가 없는 것인지?
지금의 위기감은 마치 내가 어느 맹수에게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지만, 항상 매사에 잘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나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다.
얼마나 불안하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과 발에 땀이 나는 정도이다.
대체 언제 나는 이 강박관념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것인가?
언제까지..
16. 4. 7
내가 빈 수레임을 진작에 알지 못했지
오늘 내가 평소같았다면 열등감에 찌들 여러 상황 조건들 사이에서도 불과 몇 일 전과 비교해서도 월등히 나아진 정신상태를 유지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글을 시작하는 것은 내가 어떤 깨우침을 한순간 알게 되었다가, 한순간 까먹어버렸기에 내가 왜 정신상태가 맑을까 생각하다가 마침내 오늘 떠올렸기 때문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나는 빈 수레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온갖 휘황찬란한 말로 나의 겉모습을 치장해 보았자, 나의 숨겨진 속내에는 한없이 부실한 첨탑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쌓은 것처럼,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외부의 자극에 쉽게 그 내부가 노출되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탑일 뿐이다.
내실을 쌓지도 않은 주제에 첨탑이란 표현을 함부로 사용한 것은, 실제로는 땅에 박혀있는 주제에 하늘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만감이 하늘을 찌르는가?
그러나 알고있다. 자만감이 있을지언정 자심감은 부족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아무것도 할 의욕조차 이야기하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일단 내실이나 쌓아야
전과든 편입이든 또다시 수능이든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나는 나의 내실이 부실한 것을 전혀 생각치 않으면서 더 높은 목표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혼자 좌절하고 절망하고 슬퍼하였다.
이것이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실상이 너무 허무하긴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정당하다 생각된다.
그동안 상당히 정신적으로 고생하였지.
내실을 쌓지 않은 채로 대체 왜이런걸까,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걸까
왜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러는 것인가
한심스럽게도, 한탄스럽게도,
이런저런 걱정과 생각과 우울들로 정신병적인 나날을 보내왔다.
이따금씩은 외부로 표출되기도 하였는데,
가식없는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나는 조울증이렷다.
내가 나에게 정신병을 주입한 것이겠지ㅡ
일단 내실을 쌓은 다음에 말을 하자는 것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어야 했어...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 같다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도
그렇게 나 자신을 비참하고 안타까운 사람으로 대상화함으로써 나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나의 존재를 내가 보듬어주는 것으로 하찮게 숨쉬어왔지.
그래보았자, 실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와 비슷한 조언과 충고를 해왔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라.
이 말은 일단 하고 보라는 것이다.
지금! 근시안적인 선택밖에는 하지 못하는 너를 안타깝고 어엿비 여기니, 제발 일단 내실을 쌓은 다음 너의 성장을 바탕으로 너의 장래를 선택해라.
바보같게도, 나는 시작부터,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바라는 제1순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를, 현실을 도피하는 빈 수레로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런 상태로, 그런 비참한 나날을 보낸 채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었더랬지.
심지어 나는 나의 환경을 욕하기도 했다.
나의 그릇을 받아주지 못하는 주변환경을 욕한 것이다.
좆같기만 하다 이 씨팔새끼들아
혹시 있을지도 모를 미래를 그리는 것은 이 씨팔것들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나의 인생은 이대로 침몰하는 것이고, 나락으로 나자빠진 나를 인정하는 것으로, 체념하는 것으로 나는 생각을 더이상 그만두자.
라는 한심한 생각들만 했었더랬지..
그러나 어렴풋이보단 더, 확실하다고 보기엔 조금 부족하게, 이미 알고는 있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의 허접쓰레기같은 채로 나자빠진 것을 인정하고, 내실을 쌓아야지ㅡ
인터넷으로만 보기엔 나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기보단 주변환경을 욕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정말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에도 깨달으려 하지 않았던 나를 바라보며, 혹시 모를 또다른 누군가가 이렇진 않을지 생각되는 바이다. 물론 염려되지는 않는다.
만일 그런 사람이 또 있다면 그도 그럴게, 그사람 역시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때까지 알지 못하거나 일찍이 깨닫거나 알아서 할 일이다.
어차피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일은 글로만 읽어서는 개선될 수 없는 바이다. 절실히 문제를 체감하고 절실히 통감하고 그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지,
체념할 수 있다.
웬만하면 체념하지 않는, 어릴 적의 동심을 지닌 어린아이들이 많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이렇게나 허접하다는 것을 알고 내실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삶 어디 한부분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앞날을 체념하는 일을, 내가 이렇게 머리터지게 생각하면서 깨달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배울 것이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기적이고 더러운 생각이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그저 수저의 색깔이든 무엇이든 끼리끼리 고생 모르고 기분좋게만 살면 절대 어디 덧난 인생이라고 절대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의미있다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저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것을 송두리째 날려먹고 다시 돌이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나같은 사람만이 지금의 이 깨달음을 늦게 알아버린 것 뿐일지다.
16. 4. 14
대학 들어와서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보는데>
이제 3일 남았는데 이제 공부를 시작한다.
내가 만일 만일 만일 ~하면 어땠을까 하면서 여러 행복한 뇌내망상을 해보지만
시간이 내 편이길 바랄 뿐이다.
일찍이 벼락치기로 대학교에 붙은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이 상황이 올 것을 예상하긴 하였지만 정말로 이렇게까지 나이를 먹어도 나태할 줄은 알지 못하였다.
나의 됨됨이를 나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제 이렇게 돌이킬 수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 것을 뭘 어떻게 하겠는가.
오늘 처음으로 자책감과 죄책감과 죄악감과 압박감에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구역질을 하였다.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닌가 싶다.
중학교 때부터 6년을 벼락치기로 살아남으며
매번, 고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느껴왔으면서도 나의 생활 패턴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나는 대학생이 되었음에도 이렇게 시험 막바지에 와서 공부를 시작한다 개지랄발광을 떠는 것을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망상가이기에, 극적인 삶을 자극으로 한다?
나는 벼랑 끝에 서있는 비극의 주인공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은 노력 끝에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숨은 재능이 존재한다?
나는 결과적으로 볼 때 남들보다 적은 노력으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나는 실력은 있는데 다만 평소 하지는 않을 뿐인 재능있는 사람이다?
이번은 장난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내가 성적이 낮게 나오면 갈 수 있는 대학이 낮아지는 것으로, 내적인 피해가 컸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대학교 때에는 내가 성적이 낮게 나오면 등록금 문제가 생긴다. 학기당 420만원일 뿐만 아니라, 계절학기로 메우려 해도 학점당 6만원씩이 들어간다.
시험 전에 벌써 계절학기나 재수강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포강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위기상황을 돌파할 또다른 방도를 세움으로써 나는 나의 불안장애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정말 아무런 걱정없이 오늘 잠들었을 때
내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냥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고, 그 끝에 나같이 존재감이 적은 사람은 그저 희뿌옇게 보이지도 않은 자아를 바람따라 들춰내고 다닐 바에는, 내일 숨을 쉬지 않아도 자연스러울 것 같다.
16. 4. 15
이마에 힘줄주고 살았구나
그야말로, 별 것 아닌 풍경인 줄 알았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아름다움일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게을러 하고 있는 와중에도 개미는 분주히 움직이고,
내가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던 벚꽃잎은 바람에 휘날리면서까지 나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려 한다.
따스한 햇빛 속에 새들안 나에게도 지저귐을 달려주고,
눈처럼 소복히 쌓인 벚꽃잎은 굶어죽을듯한 눈에 한껏 포만감을 가져다 준다.
매일 땅만을 쳐다보며 걸었는데,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줄이야.
16. 4. 16
후회의 나날 속을 헤엄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 눈에 보이기에,.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눈을 감고 싶다.
후회와 미련을 바닷물에 띄워 보냈다고 착각하였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에 갑자기 건너와서 나를 괴롭힌다.
왜 지금에 찾아온 것인가 묻자면, 내 자신에게 다시, 대답을 해주어야겠지.
비슷한, 때가 왔기 때문이다.
마음가짐이 깃털과도 같아 이러한 미풍에도 날라갈 것을 걱정하는 너의 자아를 바라보며,
후회와 미련이라는 감정으로 너의 깃털을 평가하여 묶어둔다.
나의 마음가짐이 불안정하여 밤을 지새우자면, 정신이 어디론가 나자빠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의 좌절을 옛날의 좌절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나의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고,
역설적이게도, 한 번 경험한 것으로써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그 고통 경감 효과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긋난 톱니바퀴를 제 때 맞물리게 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을 투자했었어야 했다.
지금에 톱니바퀴가 어긋난 상태라는 것을 알면, 이미 늦은 것이다.
한심하게도, 관리인이 의지박약이거나 하겠지.
지금에 나사빠진 정신머리는 구타를 통해서도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썩히고 썩힌 끝에 곰팡이가 낀 파이에는 효모의 발효라기 보다는 미관상의 덧없음, 평가절하만이 느껴질 뿐이다.
지금의 과정이 성숙이냐 묻는다면 내가 보기엔 그저 허송세월 보내느라 괴로워하는 자기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괴롭고, 자살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성숙의 과정인가?
이것을 뛰어넘는다고 무언가 해결이라도 되는가?
시간에 맡겨버리는 작태는 문제 해결 노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나태함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래도, 문제를 똑바로 적시하고 자신의 한계를 눈치채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나처럼,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를 끌어안다가 나태라는 미명, 보이지도 않는 한심한 것에 묶여 일폭탄을 만들어버린 것을 보면,
과연 시간에 던져 버리는 행동으로 하나하나씩 넘겨버리는 행동은 꽤나 효율적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지금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다가
그 다음에 자멸하는 것이 가장 낫겠지?
그래야, 욕먹지 않기 때문인데...
나는 누구에게 무슨 평가를 받을 것을 이리 두려워 하는가?
덧없는 인간관계?
낳아주신 부모님의 대한 효도?
.
아 나는 지금에 내가 원숭이와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작태에 내 자신이 경멸스럽다.
누구도 나와 같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결국 나는 이 심정으로 성공한다 할지라도 꼰대가 될뿐인 성격 나쁜 사람밖엔 되지 못하겠지.
만일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다.
이
덧없는 삶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
사실은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닌 것임을,
설련 마침표가 찍히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기계는 어느 톱니바퀴 하나 이를 슬퍼해주고 눈물지어주지 않음을,
정확히 깨닫고 있는다면,
그야 덧없는 삶의 종지부가 어디에 있어도 이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6. 4. 16
빗소리가 자꾸 날 깨운다>
빨리 일어나라고.
나보고 일어나라고.
빗소리가 자꾸 창문을 두들긴다.
이러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너도 알고는 있나 보구나
빗소리는,
대답 대신 계속 창문만 두들길 뿐이다.
한심하게도,
나는 눈을 감고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악몽을 꾼다해도, 계속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야, 제정신을 차리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 우산이 없는 나는 걸어나가지 못해,
빗방울이 나의 뇌에 부딪칠 것이 분명하다.
16. 4. 18
실패를 지레 짐작할 때에 의지박약이 더욱 심해진다.
16. 4. 20
자극이 없고 답답하다>
의지박약자의 도구인 게임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뇌가 되었다.
쉽게 질리고 무언가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가 귀찮다.
겁이 난다고 해도 표현상의 과격함이 늘어날 뿐, 실제 새로운 것에 대한 감정의 묘사가 이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곤란 그 자체이다.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서 괜시리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며, 어느 것을 하려고 해도 결국 시간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허나 그 시간을 아껴서 무엇에 사용하느냐 하면, 어느 중요한 곳에도 사용하지 않는다.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취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며, 소설을 읽는 것도 아니며,
잠을 자는 것도 아니며, 밥을 먹는 것도 아니며, 화장실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도 아니며, 친구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친하다고 생각할 고등학교 친구들은 아마 재수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하는 근본 이유에는 이들 친구들에 대한 걱정 및 불안감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감은 무엇이냐면, 내가 뒤쳐진다는 느낌을 말한다. 실제 수학 능력에 대한 부분뿐만 아니라, 나이를 먹고 성장한다는 부분에서 말이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 너무나 열심히 공부해나갈 그들의 고뇌, 고민, 그리고 그 격정을 모두 딛고 일어날 앞으로의 성장들,
그것들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 아쉽다.
만일 내가 진지하게 수능을 공부했더라면 과연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 내가 바라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맞는걸까?
첫번째 답도 아니다, 두번째 답도 아니다 라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야말로, 열등감에 물들 쓰레기같은 새끼이다.
열등감에 치우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 또한 반수라든지 여러 수단을 통해서 공부를 하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이때 서두에서 '하지만' 이라는 접속어를 매번 집어넣는다.
그렇게 쉽게 될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피곤한 사고방식인가
솔직히 말해 이젠 이런 사고방식이 정말 지친다. 언제까지 쓸모없는 생각들에 나를 우겨넣을 것인가?
하지만, 이 정신병같은 것이 나를 떼어놓으려 하질 않는다.
조울증 혹은 우울증에,
의지박약
이 두가지가 곧 나의 자아와도 같은 것인데, 이렇게나 불안정한 알맹이를 두고 나는 껍데기만 황폐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신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그저 정신적으로 느끼기에는 도저히 정상이라고 보기엔 곤란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고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병신같이 의지박약 속에서 선택장애, 우유부단하며 여러 기회의 때를 놓치곤 할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답답한 사고방식인가..
무언가 ... 무언가
나의 삶을 송두리쨰 뒤바꿀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금의 자극은 그야말로 없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무색무취이다.
모든 것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일 웃는다고 해도, 그건 한순간으로 끝난다.
아 이 얼마나 재미없는 인생이었나
재미가 없다. 이 허무한 생각이 계속 잠들기 전의 나를 맴돈다.
잠을 자면, 매번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렇게 14시간까지 자본 결과,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날린 것이 나는, 너무나 속이 쓰렸다.
앞으로,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걸까
답은 당연히 있지만,
따르기가 귀찮다고,
싫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 해야한다는 이성을 제외하고,
내가 감정적으로 하고싶은 것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무것도 존재하질 않는다.
내가 이성과 교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결국 옛날 일일 뿐이다.
지금에 와서 나는 그냥 이대로 혼자 죽어간다고 해도,
밥만 잘먹고 내가 원하는 여가만 해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내가 대체 종족본능의 의지를 무시해가면서까지 원하는 여가?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간다.
내가 대체 하고싶은게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것은,
망상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의지박약자인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스스로의 제한을 걸기보단, 다른 개념적인, 추상적인 것에 해결점이 있을 것이라 매듭을 지어버렸다.
그것은 대학교였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무언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나 스스로의 발달은 없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텅 비어있는 느낌을 나는 3년째 느끼고 있다.
텅 비어있는 느낌을 나는 3년째 느끼고 있다.
곧, 우울증을 의미한다.
자극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내가 마약을 먹고 싶은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말로 의미없는 행위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극이 필요하지만, 이를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하기가 싫다.
그 무엇도 귀찮을 뿐이다.
이번 중간고사를 보기 전의 하루 일과들 모두,
결국 먹는 것과 자는 것과 싸는 것에 불과하였다.
지금 또래 아이들이 가장 크게 관심가질 연애사들 모두,
나의 눈에는 떨어지는 벚꽃잎에 불과하다.
한순간 피어났다가 불살라지는 그러한 한순간의 감정에 시간과 돈을 쓰기가 아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깝다 라는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아깝다 라는 감정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하기 위해 우선순위가 낮은 것을 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인데,
나는 내가 중요하게 해야할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그것도 하기가 싫다.
아니, 그냥 나는 모든것을 하지 않은 채로 송장이 되고 싶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앞으로 내가 특출난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 채 의무에 속박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자라면서 느낄 그런 걱정들에 대해서는 실체가 없다. 나혼자서 생각하는 것일뿐이다.
무엇을 위해 나는 내 주위를 이렇게 걱정할까?
나도 모른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싶은지 알 수가 없다.
의무에서 해방되어 무엇을 하고싶은건지, 알 수가 없다.
그만하자
이 글 쓰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
한심하다.
뭔가 어긋났다는 생각은 들지만,
소용없다.
부질없는 것이다.
16. 4. 22
언제부터인가 카톡을 하기 겁이 난다>
페북을 하지 않으니 다른 애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도리가 없을 뿐더러,
이제 와서는 나의 성격이 비뚤어진 것이 확실한지, 다른 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치 않다.
물론 페북을 하지 않아 친구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이다. 페북이 아닌 다른 얼마든지 많은 수단으로도 친구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예컨데 전화를 걸어 술 먹자고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 행동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생각하기 이전에, 나와 그들은 이미 애들이라고 불릴만한 입장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국 다른 애들이라고 표현될만한 위치이지만, 타인이 보기에 그들은 엄연히 성인이며,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사회생활에 들어가야하는, 법률 하에 수많은 의무와 권리를 지닌 사회구성원이다.
그렇기에, 사회생활을 살아갈 적에 자신의 이익이 되지 못하면 그저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이 도리가 되는 바 아닌지 생각이 든다.
이는 지금의 지극히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물론 나도 이기주의까지만 아니라면 개인주의가 당연한 것이라 생각이 든다.
사회적 통념과 내가 생각하는 바는 한 치도 틀린 바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하지만, 그래서야 삶이 허무하다.
지금에 내가 겁을 느끼는 것은 허무함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이전에 무언가를 하기가, 앞으로 그것으로 하여금 무언가 이득이 될지, 그리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는지 항상 의구심이 들고, 항상 그 끝에는 허무함만이 존재한다.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결국 이야기의 끝에는 허무함만이 남는다.
무감정하게 철자들의 나열만을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인공지능과 대화를 하는 것이 사회문화적 지식을 쌓는 것에 보다 큰 도움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지금에 친구라고 굳이 일컫는 타인에게 관심쓰고 선심쓰는 것이 과연 뒤에 이해타산적인 관계를 생각치 않고 연을 맺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이는 이미 상술했듯이 사회풍조가 각막하게 변하기에 문화적 조성도 달라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말인 즉슨, 이해타산이라는 것은 당연히 인간관계에서 뒤따라오는 것이란 말이고, 연을 맺는다고 하여 플라토닉적인 순수한 대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즉, 지금에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된 이야기, 진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로 하기에는카톡이라는 매개체는 영 시원찮으며, 설령 밖에 나가 직접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나 자신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바라는 내 오만일 뿐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친구들을 무상으로 만나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오만일 뿐이다. 술이 들어가거나 하지 않는 이상 불가할진데, 내가 술을 정말 싫어한다는 점 때문에 앞으로 나의 염원은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나는 타인들이 술을 먹어야 그제야 내색을 나타내는 여러 고민거리들을 맨정신으로 매일매일 생각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으로 타인과의 정신적인 대화를 갈구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정신적인 대화가 무엇이냐 하면, 나 또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가식이 없이 진심을 내보인다는 서술만큼 부정확하고 알지 못할 서술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지금에 나는 깨닫기를, 여태 3년동안 내가 진지하게 타인이 가면을 쓰고 진심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결국 허상이 아니었나 싶다.
실체가 없는 것을 쫓으니 있던 친구들도 사라지고, 새로운 친구도 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자멸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 들어가는 내가, 인맥을 만들지 않아서야 어쩌겠냐는 말이다.
.....
나는 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두려워 한 것일까?
16. 4. 27
대학교가 자신의 가치에 무언가를 덧칠해주는 것이 과연 맞는 걸까?
그리고 그 덧칠된 가치로 하여금 나는 이렇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인정받을 수는 있는걸까?
아무런 장래도 없이 고등학교 지내다가 대학교 들어가면 뭔가 달라지겠지 생각을 한다 해도,
어처구니 없이 숨이 턱 막히는 등록금에서 한 번 사회적 압력이 들어오고,
애초부터 원하는 학과 따위 없었음이 분명하면서도 지금 들어온 학과가 맘에 안든다 지금 들어온 대학교가 맘에 안든다
현실도피나 하고 그러는 나같은 사람은, 대학교가 분명히 자신에게 변화를 주는 것 같지가 않아서 한탄스럽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나날인 것 같았던 고등학교의 나날이 더 부럽다고 할만하다.
지금에 느끼는 무언의 압박감들로 인해 삶의 방향이 좁은 길로만 나아갈 것 같아서 불안정하다.
학과와 관련없는 직업에 대한 구직활동은 상정하기가 무서워서 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섭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내지 못한 분야를 이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대한 공포 혹은 혐오감이다.
분명히, 대학 생활의 진득한 경험의 부족으로 인하여 함부로 짧은 판단, 근시안적 판단을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지만
옛날처럼 대학교 이름이 앞날에 대한 걱정을 쫓아내 주는 등불 역할을 하기엔,
(그리고 내심 가득히 그러한 편협한 사고를 인식하면서 초중고를 다닌 것이 분명하지만)
현실은 다른 것이 확실하고, 이에 대한 대처는, 지금부터 해야겠지만
무엇을 해야하나 혼자 알아가기도 손발이 없다고 떼나 쓰는 어린아이같은 내 정신력에 한심스러움만 느껴지네
16. 5. 24
대학교 아싸생활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정말 다른 사람이 부르는 "안녕"하는 소리에도 반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평소 집ㅡ학교ㅡ집에 이르는 생활패턴을 반복한 끝에, 어떠한 교우관계도 생각치 않으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내심 자부할 정도로 나는 이 아싸생활의 효용에 익숙해지지 않았나 싶었는데, 오늘처럼 실험과목에서 13주를 같이 해온 조원(조를 두명이서 짰으므로 안면인식에 도가 트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이 하는 인사를 받지 못하는 당황스러운 사건에 대해선 미처 대처하지 못하였다. 말그대로, 내 심정은 이것이었다.
"안녕 안녕"
소리가 들려오자 자연스럽게 나는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끼리 하는 이야기겠지.'
"......."
그러나 그 소리 이후 정적밖에 들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것이었다. 강의실을 들어갔을 때 두명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한 명이 반응하지 않는 것에는 그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존재했던 것이다.
"아.."
이 소리가 내가 대학생활 중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한 소리였다.
"수업 열심히 들어.'
"아....아..."
이 소음을 끝으로 그 사람은 먼저 있던 친구와 함께 갔다. 나는 그를 본 순간에 내가 그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는 실수를 자각하였으나 "안녕"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일 적에는 그가 이미 떠난 다음이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누구 한 명 친해진 사람 없고 친해질 생각도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타인의 인사를 생각치도 못하게ㅡ정말 당연히 나에게 인사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ㅡ그를 무시했는데 약 5초 뒤에야 그를 인식하고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그냥 보낸 것이다.
내가 그와 친해지고 뭐하고 할 생각은 없으나 당장에 다음주 마지막 실험과목에서 만날 일이 있긴 하다. 물론 다음주가 온다 해도, 그다지 친해질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그가 마음에 안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친해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이상한 대응을 한 것에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나의 흐린 존재감을 인정하고만 것인가?
처음 한달동안은 대학생활이라는 로망이 OT에서 이미 한 번 붕괴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어보고(물론 혼자서 밥을 먹었다.), 뭔가 동아리에 들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휩싸여 집에 마땅히 가야될 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으려 버티는(그러면서도 어떤 동아리에도 들어가진 않는) 미련한 짓을 반복했었다. 그 끝에 대학생활의 낭만은 고이 구겨서 던져 버렸고, 지금에는 나의 존재감이 흩어져 버린 것에 아무런 이의가 생기지 않고 있고 나는 이 상황에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오늘같은 상황은 굉장히 당황스럽다. 고등학교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굉장히 그 모습이 다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는 과연 과거의 내가 바랄만한 인물일지 의문이 들기도 할 당위성이 존재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에 의문이 들진 않는다. 이미 먼 길을 돌아왔기 때문일까.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되지는 않고, 이런 일도 있구나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16. 5. 27
내가 대학교 아싸 생활을 함으로써 깨닫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나의 경우는 자발적인 아싸..라고 자위하고 있었으나 사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자의이든 타의이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야말로, 공동체라고 포장하는 집단주의 속에서 돌출된 개인 하나하나에 꼴불견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각자가 노력하며 단체로 함께 열심히 함으로써 산업화를 일구어냈던 과거가 있든 말든 간에 현재의 저성장 사회에서는 보다 다른 해결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애초에, 과거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차이가 지금과 같진 않았다. 정신적인, 의지를 복돋워 주는 구호, 캠페인과 실물적인 이야기는 분리되어야 한다. 과거엔 그러한 단적인 실물적인 배경이 있었으므로, 정신적으로 "함께 나아가자, 노력하자" 이란 이야기로 고성장의 이면들을 숨기고 겉으로 건강한 사회를 포장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력하면 된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세대(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망상을 가져도 됐었던 실물적인 배경을 누렸던 세대)와 지금의 갓 성인이 된 세대를 비교하자면, 지금에는 실물적인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가 40~50%에 달한다고 그 쉽게 통제되는 언론들이 나불거리고 있을 정도이다. 반면에 실물적인 안정에 취한 옛 세대들은 '노력하면 된다'는 헛된 망상만을 나불거리고 있으니 현 세대는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엄연히,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옛 세대부터 그들이 대학교에 가서 놀고 뭐하고 미팅하고 뭐하고 하는 것을 따라하면서도 속 알맹이로는 어떠한 득도 없는 것을 알고 있는 현 세대는, 실물적인 안정을 원한다. 정서적으로 선진국의 모방을 하고 있어도, 우수한 문화를 가진 것을 사실로써 받아들이나 그에 반하는 의식수준들에 한숨을 내쉬고 답답해 한다. 정서적인 안정이 무슨 의미인가? 그렇기에 취업에 매달리며, 그럼에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까지 스펙으로 만들 순 없는 젊은이들은 심히 좌절한다.
자살할 것만 같다.
노력하면 되는 것도 노력 안해서 망가질 듯이 자아를 흐트려 놓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자신이 스스로 얻어낸 답 이전에 빠르게, 컴퓨터를 통해서, 지금에는 손 안의 셀폰으로도 쉽게 '명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온갖 매체들로부터 무수히 받아들이는 정보에 대한 저항성을 잃어버렸다.'
'자신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정말 의미없는 것은 보지 않는다고 하여도 알게 모르게, 루머에 잠식되고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루머라는 것은 뜻없는 껍질과 같을 뿐이다. 그저 사람들의 편견을 만드는 매개체에 불과할 뿐, 사람들의 감정을 조장하는 목적에 1순위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마음에 들면, 공동체에 걸맞고, 마음에 안들면, 공동체에 맞지 않는다.
그 예로 '혼자'라는 단어에 대한 편견이 있다. 혼자인 사람은 무언가 문제가 있어서 타인과 대화하기 힘들다든가, 괜히 음울해 보인다든가 하는 편견들은 얼마나 뜻없는 망상에 불과한가.
'내가 신경 안 써도, 남이 신경쓴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의 정체이다. 개인주의라면 신경 쓰지 않을 것들에 의하여 개인의 삶이 요동친다. 타의에 의해 점처지는 어린 아이들의 삶에 위로를 표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 세대가 곧 나의 세대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가?
이기주의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현재는 개인주의가 만연하다 하여 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나, '여러 것들에 대해서 마땅히 그것이 가져야 할 가치를 함부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는 변질될 수밖에 없다.
버스에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늦었다고 하여 사람을 어깨로 짓눌러가며 안착하는 놈, 년에게는 그 순간순간들의 시간 지체에 의해 늦을 수많은 뒷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고려치 못할 정도로 전두엽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단정 역시 나의 편견에 불과할 것이지만, 역시 이기주의로부터 이기주의가 파생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는 절대로 윗 세대로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사실상 이는 윗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자신에게 실물적인 득이 비로소 찾아오고, 청출어람을 죄악시하는 사람들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기주의밖에 판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오늘에 나는 얼마나 의식 수준이 현저하게 낮은 행동을 어디까지 사람이 행할 수 있는지 보았으며, 이로부터 파생된 이기주의로 '나는 왜 저런 이득을 보지 못하는 거지? 나 또한 행할 것이다.' 하는 생각을 여럿에게 품게 만드는 악질적인 이기주의의 마수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16. 6. 7
지금에 내가 수능을 다시 본다면 어떨까 생각키도 하지만, 솔직히 오늘에 9급 공무원도 5급까지 10년 이내로 할 수 있게끔 바꾼다는 이야기도 뉴스에 나왔고, 취직 걱정 얘기들이 나올수록 지금 대학생인 채로 수능을 다시 본다는 것은 늦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개는 말할지도 모른다. 대학교 1학년 20살가지고 늦기를 논하기는 어리석다. 나는 이 말에 동의 안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다시 공부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느냐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학교가 취업문으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아 공대로 온 내가 화학과 수학에 이리저리 휘둘린다고 해도, 뭔가 수능을 다시 본다는 것에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말로써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불안감이 그저 불안감이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미적지근한 공기 속에서 눈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채로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뒤로 걸어가라는 것이다. 그 때엔 제대로 주변을 마주 보면서. 물론 제대로 된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가지 못하면? 더 나빠진다면? 군대가는 시기는 늦어지고 괜한 기회비용만을 키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에 나아가는 이 진로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어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더 불안하니까 지금 그저 여기로 걸어가는 것이다. 뒤를 보면, 나태했던 흔적들이 어디에나 즐비하고, 이를 일찍이 처리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나를 다시 마주보기가 두려우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 갑자기 깨달은 것은, 나는 기억에 의존한 채로 문제들을 외우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알고 있는 문제는 백발백중 다 풀어냈지만 모르는 문제는 그야말로 벽을 느끼는 막무가내의 무식한 방식이다.
암기만이 유식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암기를 내 주특기로 하였던 것이 오히려 패인일지도 모른다. 암기를 통해 정형화된 규칙을 따라가다 보면 그에 뒤틀린 새로운 창의적인 방식들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외운 까닭에 어떻게 어느 것을 적용시켜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공식이 너무 없어서 문제인 경우도 있다. 공간도형이 그렇다. 삼수선 정리, 정사영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그것 둘 가지고 여러 문제를 풀자면 문제들의 규칙을 찾기는 커녕 매번 새롭게 다각도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유형의 끝판왕은 결국 축 설정하고 좌표로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문제를 이렇게 풀자며 외적까지도 공부했으나!!!! 결국 수능에선 시간 없어서 공간도형 문제도 제대로 못봤다. 이 무슨??????!?!?!?!?!?!
어쨌든, 암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정형화되고 규칙적인 심미적 아름다움에 치우쳐서 쓸데없이 복잡한 모양의 변형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고, 크게 후회하게 된다.
예를 들어, sin x 와 cos x 등이 적분식에 나오면 당연히 치환적분만을 쫓으려 하나, integral cos x/x dx같은 경우, integral arcsin x dx등의 경우, 단순히 부분 적분을 하면 된다는(제곱꼴이 눈에 띄지 않고 치환 적분이 안될 때) 사실을 망각하고 잠시 멍 때리는 경우가 있다. 이는 치환 적분을 정형화되게 계속 시도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자 자신의 헛된, 날조된 실력에 자만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integral 1/(x^2+x+1) dx 조차도 중학교 때 배우는 완전제곱꼴을 이용해 arctan를 쓰는 것인데....
16. 6. 8
지식과 지능은 다르다.
오늘 화학 시험에서 느낀 바이다.
유효숫자는 계산이 모두 끝난 다음에야 생각하는 것이라고 누누히 일렀거늘, 알고 있는 지식을 유효숫자라는 미끼 앞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쓰질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쓰디쓴 안타까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알고있는 지식이 한없이 정확하고 또 오랜 기간 기억할 수 있는 특기를 지녔다 할지라도,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1.지식과 지능은 다르다는 것, 문제를 푸는 알고리즘을 안다고 할지라도, 문제 푸는 과정 중의 실수 요소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까진 알지 못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라는 허점을 맹렬히 찔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험은 실수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것이다. 비슷한 유형을 가진 문제를 여러 번 푸는 것의 중요성은 바로 이것이다..
2.기억은 그야말로, 뇌에 저장된 정보를 플래시처럼 팍하고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재현의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처음 기억할 때의 상황으로부터 시냅스가 돋아나고, 반복 끝에 해마까지 그 기억이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해마에 도달하기 이전까지의 기억은 자신이 애써 기억할 때와 비슷한 상황을 재현해야 계속해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기기억의 주요한 해법이며, 특히 말로 기억해야할 것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은 비슷한 입모양을 하기만 해도 그것이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3. 잠은 뇌를 세척하는 과정이다. 세척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에 문제되는 것은 훗날의 치매 위험이아..
16. 6. 9
현실도피를 하고싶다.
내가 내가 아닌 흐물거리는 현탁액, 콜로이드화 된다면 나의 정체성은 양이온과 음이온의 단순한 입자, 전하를 띠는 콜로이드 입자뿐이 되지 않을 터인데..
공기중에 나의 전하가 방전되는 것으로 그 공간에서 이온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입자가 확률적으로 존재했다는 것 외엔 나의 정체성이 존재할 유의미함이 없다.
신체는 부교감 신경에 의해 물리적으로밖에 변형되지 않고, 자극들은 뉴런세포 속의 나트륨 이온과 칼륨 이온의 막전위차로 생기는 전류가 도약하며 시냅스 간 신경전달물질 분비에 영향을 끼친 것에 불과하고, 감정들마저 호르몬 작용인 것에 불과한 것을 안다면,
나의 덧없음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인간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으로 교육된 하나의 '밈'에 불과한 것을 생각치 않기 위해 굳이 신체를 콜로이드화 시킨다는 무리수를 던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16. 6. 12
실수로 스테이플러를 검지 손가락에 찍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지금도 어안이 벙벙한데 호치캐스 심 갈다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심이 옆으로 삐져나왔길래 집어넣으려다가 쭉 눌렸는지 검지손가락에 심 한 쪽을 끝까지 박아버렸다.
중학교 기술시간 때 집 모형 만들다가 커터칼에 배신당한 이후로 학용품과는 연이 없을 줄로 알았는데..
느낌은 헌혈할 때 약지손가락에 혈액 샘플용으로 심 찔러넣는 것과 상당히 유사한 느낌인데,
스테이플러는 심을 아예 박아넣는 용도로 만든 것이기에 심에 찔리는 느낌은 유사하나 그 뒤에 훨씬 더 저릿저릿한 느낌이 남아있는다.
심이 몇 년 된 것이라서 잠시 파상풍 걱정을 하였으나 지금은 괜찮으니 이후 경과를 지켜볼 생각이다.
심각하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뭔가 윤리적으로 학용품인 스테이플러를 통해서 피를 본다는 것이 새삼 충격적이다.
깨끗이 소독하여 괜찮아졌다.
16. 6. 14
재수를 할 생각으로 보는 수능, 재수강을 할 생각으로 보는 기말고사.....
정정하자면, (하기 싫었는데 현 상황이 별 수가 없고 답답하고 미치겠는데 도저히 돌파구가 따로 보일 것 같지 않아서 경험 삼는다고 자위하며 이번에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며 자기합리화를 한 끝에) 재수를 할 것 같아서 씁쓸하기만 한 생각으로 보는 수능이 하나 있고,
(힘들게 대학 들어가서 허벌나게 비싼 등록금 내며 애써 먹지도 못하는 술 먹으며 인맥 만들고, 취업 할려고 스펙 쌓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세뇌 당한 세대이기에 겉으로는 웃고 술 먹고 다닐 것이지만 속으로는 앞날이 보이지 않는듯 하여 정말 답답한 나날 속에서) 온전히, 자신이 게으르고 나태하여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시한 성적 증명서가 아른거려 힘이 쭉 빠지지만 별 수 없이 재수강하면 괜찮겠지 하며 재수강할 생각으로 보는 기말고사가 또 하나 있다.
비단, 오늘에 나는 재수강할 생각으로 보는 기말고사를 경험하였지만, 이는 감히 재수할 생각으로 보는 수능에서의 감정과는 비할 바 되지 못할 것이라 단언한다. 그럼에도, 재수갈할 생각으로 보는 기말고사 역시 1학년 끝마치고 군대갈 생각 및 전과나 편입을 생각하고자 한다면 언제 할 지 헷갈리고 머리가 땡겨서 스트레스 받는 것도 사실임을 분명히 하겠다.
16. 6. 18
계란 썩는 냄새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역겨움,
그 냄새를 맡을 적이면 꼭 계란 썩는 냄새가 나 도저히 웃어줄 수 없다.
아무개는 아무개에게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놀리며 악취를 풍기는데,
정작 자신이 고이 모셔둔 손톱 사이의 때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손가락은 눈에 보이는 언어로 표현되기 위해 이진법의 변환을 거치고,
그때문인지 아무개와 아무개가 말한다고 하는 현상은, 저들끼리 손가락만 놀리는 것이라,
디지털화된 아무개들의 손가락 잔상들에서는 사람의 살 냄새는 나지 않고 오로지,
계란 썩는 냄새만 나더라.
아무개는 자신의 외로움을 타인의 손가락을 깎아내림으로써 표현하고,
아무개는 자신이 경쟁에서 도태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해 열심히 손가락만 먹이는 삶을 산다.
아무개는 하루를 고되게 보낸 다음 기분 좋게 손가락을 놀리기도 하고,
아무개는 새벽까지 손가락을 가만 두지 못해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켜가며 손가락 놀리기에 열중한다.
아무개는 그러다가 죽었다.
아무개는 그래서 죽었다.
아무개들은 아무개에게 걸레를 손가락으로 집어 던진다.
아무개들은 아무개가 망가져 가는 모습에 희열을 느낀다.
아무개는 속절없이 아무개가 건넨 걸레를 눈으로 집어든다.
아무개는 걸레가 널부러진 방 안에서 하얀 박스만 열불나게 쳐다본다.
아무개는 언젠가 성악설을 굳게 믿고 아무개들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아무개의 꿈 속에서 아무개들은 아무개의 웃는 얼굴을 보더라도 침을 뱉는다.
아무개들은 아무개가 가지지 못한 것에 열등감을 깊이 느끼고 아무개를 칼집내고 싶어한다.
아무개들은 자신은 아무개같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더 나은 아무개가 되었을 것이라고 자위한다.
아무개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걸레 빨기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살 찐 손가락만 휘놀린다.
아무개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무의미한 행동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송장이 되어간다.
아무개들의 시체는 미라가 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개들의 시체는 다만, 아무개들의 주어진 삶의 종말에 다가올 뿐이다.
아무개가 방 안에서 목 매달아 죽었다.
아무개는 걸레가 널부러진 방 안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아무개는 기어코 아무개들을 원망하며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아무개들은 아무개의 주어진 삶의 종말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아무개들은 감히 허락되지 않은 선택을 아무개에게 강요했다.
아무개들은 자신들의 가면 속에 인간성을 품고있지 않았다.
아무개는 하얀 박스에 쓰여진 검은 구더기들의 나열에서 계란 썩는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아무개들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살아있는 송장은 고귀한 미이라가 될 수 없다.
아무개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다시 내일 갈 학교, 사무실, 일 터 등에 나간다.
아무개들은, 아무개와 아무개 사이에서 아무개에게 손가락질 주고받고,
아무개가 살아남으면 살아남는대로, 죽어가면 죽는대로 손가락을 놓지 않는다.
아무개의 손가락에서는 아직도 계란 썩는 냄새가 나더라.
아무개는 그 냄새에 죽었다.
아무개는 처리하지 못한 그 악취에 죽었다.
16. 6. 19
날갯죽지를 꺾어 향락을 쫓은 어리석은 것
날갯죽지를 꺾었다 함은 자기 자신 스스로 날아갈 꿈을 찢어버렸다는 의미 혹은,
타의로 인해 알게 모르게 찢어져 버린 상흔이라는 공허한 의미.
향락을 쫓음은 곧 쾌락에 자신의 뇌 앞쪽을 찢어 도파민에 적셔 그 향을 맡는다는 의미 혹은,
철창 안에 갇힌 채로 실험체로 사용되며 먹이도 먹지 않은 채 전기자극만 자신의 뇌에 퍼부으며 죽어갔던 쥐와 다름없다는 의미.
그 쥐는 날이 가면 갈수록 강한 자극을 갈구하여 먹이통 바로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며 하루종일 200회의 전기자극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얀 박스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와 앞날을 모두 송두리째 찢어서 던져버린 채 향락만을 쫒으며
도파민의 향취에 취해 웃음과 쾌락과 기쁨과 흥분과 열망과 갈망과 욕망과 욕구와....
단순한 전위차에 자신의 이지적 존재성을 잘라내 버린 채 숨만 쉬는 것을 돌봐줄 부모새는 없다.
날갯죽지를 꺾어 버렸으니 그것은 새만도 못한 존재이다.
전기자극에 미쳐서 물불 가리지 못한 채로 전두엽마저 흐물흐물해져 버린 그것은 쥐만도 못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것을 애써 깨달은 척하며 5년을 보낸 나는 그것과 다름없다.
5년 중 앞의 1년은 새였는데도.
16. 6. 19
매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아 울고싶다.
그 옛날부터 내가 바래왔던 무언가가 어느새 깨진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을 방치해둔 것이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내가 바랬던 것은 내 환경에서는 부족한 탓인가'
매번 자기합리화를 하며 그것을 잊으려 해도, 나의 날갯죽지는 아무리 봐도 내가 꺾어버렸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아 나는 오늘에 왜이렇게 실감을 하는 것일까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원래부터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는 것이며,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나의 문제도 무엇인지 깨달았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없애는 방법은, 비보험, 약물, 기록 등등
갖은 소설과 만화와 영화 속의 비극은 그것을 보는 순간에 자신이 그 상황에 빠져있지 않다는 현실로 하여금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만일 그 비극을 보고 자신이 같은 운명을 살게되는 무언가의 마술이 걸려서 그 상황에 실제로 빠져있게 된다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다.
자기혐오와 우울증에 빠진다.
비극 속의 주인공을 보는 것으로 한껏 우울해져 있음과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그 감정들은 언젠가 비극의 막이 반드시 끝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비극이 결국 배드엔딩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관객의 현실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기 때문에(개인의 감정적인 부분을 제한다면) 비극의 막은 반드시 끝난다.
비극의 막이 끝나지 않는다면, 관객은 혐오의 감정에 빠진다. 갖은 혐오, 자신이 왜 이 비극을 관람한 것인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왜 빠져나가지 못하는지, 언제 끝나는지. 언제 끝나는지, 언제 끝나는지, 언제 끝나는지,
16. 6. 20
자기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모습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사회의 모습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끝끝내 자기자신의 초심까지도 재단하여
죽어갈 때 무엇을 끌어안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
16. 6. 22
무기력함에서 벗어나다
언제까지고 중독된 채로 있을 줄 알았다.
한 시 바삐 움직이는 다른 우등생들 사이에서 나 홀로 구렁텅이에 빠져든 것이 5년이었다.
5년 동안에 그 하나에 중독되어 사리분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패배감과 무기력감, 좌절감과 그그를 넘어선 분노, 격노, 울분 등을 거쳐 끝내 체념하기까지의 반복을 수십 번도 반복하였다.
1년이 지날 때마다 새해에는 뭔가 달라지겠지 달라지겠지 하고 싹트는 희망의 씨앗이 가슴 속에 놓여지기 시작할 때 쯤이면, 다시금 돌아오는 우울감의 횡포에 제대로 얼굴 들고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반복되는 무력감의 학습은 노예를 탄생시켰다.
나는 중독된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노예와 다름이 없었다.
보다 길게 말하자면,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이 시간이 지나자 나를 욕구의 늪에 빠뜨리고 나중엔 그것이 지루해졌음이 분명하였음에도 중독된 그것과 비슷한 분야의 대체재가 없어 하루살이처럼 그것에 분노하고 그것에 웃고 그러고 다녔다.
사실 그것이 나를 빠뜨렸다기 보단 내가 그것에 빠진 채로 홀로 착각 속에서 중독의 날을 보낸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욕구로 시작된 것이 나중엔 욕구가 넘치도록 충족되어도 끊을 수가 없게된 것이다.
이 때에 처음엔 가늠할 수 없었덤 욕구의 늪에 빠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신이 어리석었기에 전두엽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일으키지 못한 것일까. 아마 후자가 맞을 것이다.
환경적인 이유 혹은 유전적인 이유로 중독에 관련된 전두엽의 기능 저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중독에 걸린 뒤에 이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변연계 흥분에 대한 저항능력 상실로 인해 중독 뿐 아니라 우울증까지 왔으리라 생각한다.
그 환경적인 이유조차도 어릴 적에 내가 골랐던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하나가 연쇄적으로 근본 원인의 토대를 이루었던 것이겠다만..
이렇게 가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가 된다. 판단하기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여하튼 오늘에 내가 깨달은 것으로는,
위의 문단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만,
1.욕구불만, 결핍, 충동, 의존 이 네가지 단어는 한 문장으로 연결될 것도 같다는 것이다.
다만 그 문장이 무엇일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2.충동과 의존의 두 단어로 만들 수 있는 문장은, 충동적인 행위가 반복 될수록 의존적인 성향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역도 성립된 채로 악순환을 일으킨다.
3.충동을 멈추고자 이틀 정도 단념(노력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하면,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4.중독에서 벗어나면 '나는 결국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라는 무기력감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5.궁극적으로 자신이 앞으로 어떤 것을 할지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실제로 행동을 하기 목전 앞이라면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6.일의 난립으로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하는 것은 문제의 회피이며,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일의 난립이 끝난 뒤에 잠깐 남는 시간동안에는 자칫하면 중독에 다시 다가설 수 있다.
16. 6. 24
군입대 9개월 전
2017년 3월자 재학생 입영신청 완료하였다.
의경과 카투사와 특기병 이 셋이 나의 우유부단함을 자극시키고 있다..
16. 6. 25
자식들이 부모 의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예컨데 경제적 독립, 결혼으로 인한 분가 등에 의해)
자식들은 유교적 관점에서의 상호귀속관계에서 벗어나 실리적인 이해관계 또한 생각하게 된다.
예컨데 본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예컨데 소음공해라는 단순한 문제임에도) 결혼으로 인해 분가한 가정의 경우, 이에 대한 민사적 처벌 및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 일은 본가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와는 상관없다.'
라는 의견을 피력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분가한 자식이며, 때때로 집에 올 정도의 친밀함있는 자식일지라도, 집에 왔을 당시에 일어난 사건이라 해도 그에 대한 책임회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실제로 민사소송으로 갈 경우의 피고인으로서는 실제 사건과 관련된 객체를 세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설령 그 객체가 가족일지라도 실리적인 이해관계에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라면 관계가 쉽게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것이 돈에 관련된 것이라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보증과 대출 관련해서는 나는 가족일지라도 절대 관여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가족들끼리 서로 약속한 것이다. 따라서 가족 중 한 명이 내게 돈 관련해서 빌려달라 한다면 특별한 사유없이 빌려주지 않을 것임 또한 분명하며 나는 이것이 옳다 생각한다.
이 약속 하에서 돈 관련하여 법원에 간다면 가족의 관계보다 실리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이, 현실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은 애초부터의 가족 간의 약속이 깨졌기 때문이며, 그에 따라 감정적으로라도 법정까지 간 사안에 대해서 보증할 당위성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돈 관련이 아니라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오늘 나는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바로, 이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의 경험으로, 비록 소음공해까지도 아닌 단순한 일일지라도, 실리적인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도 일어날 수 있겠구나.
사람은 정말로 빈 말이 아니라 혼자 갈 수도 있구나.
이 깨달음은 내가 인성적으로 잘못된 까닭인가?
내가 인성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되도 않는 궤변이 전개된 것인가?
지금에 이것이 정말 잘못되었다고 단죄할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16. 6. 28
백의로 고쳐 입어 그림자를 가리랴
초심의 순수함을 붙들어 백의와 함께 가고저
아의 면면들로는 행복을 만개시킨듯 웃음과 함께 평안을 노래하였다
허나 그 마음가짐이 아의 가슴 속에 부풀어 오를 적이면
차갑고 딱딱한 살거죽의 면면들이 아의 삶 끝에 존재한다는 것이 환기되곤 하였다
아는 또 생각하리다
갸륵한 아의 처지는 타인의 도움 없이 회생이 불가능한 것일까
어이하여 아는 아의 처지를 이리도 슬프게 여기는 것일까
어쩌면 아는 삶의 어려움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이를 없애고저 하는 노력에 심취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아는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인듯 착각하여 아를 스스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는 홀로 고통을 감내한다는 표현으로서 아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안타깝다고 여기는 처지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가 스스로에 심취해 향락의 끝에 서는 것으로 고통을 이겨내고저 하는 행위를 하기 위해 되려 명분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하다면 아의 사상은 진정으로 얼개없이 짜여진 장난감과 같은 것이 아닐까
쓰다 버리고 마는 한순간의 것으로 아는 무슨 역할 놀이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것일까
어쩌면 아가 입은 색채의 향연에는 솜사탕과도 같은 냄새가 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가 스스로의 색채에 심취하였을 적에 보인 슬픔과 우울과 좌절과 두려움과 그 모든 한순간의 것들로서 재고하기에
실은 아의 초심이 흔들리지 않은 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의 어릴 적이 만들어 내는 감정들에 충실한 채인 것을 아는 스스로가 커진 채라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는 하나도 변치 않았음에도 초심으로 돌아가고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아는 어리석은 채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옷을 고쳐입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는 어리석게도 내일의 내일에도 어제의 아를 찾고 엊그제의 아를 찾고 몇 년 전의 아를 찾고저...
아의 웃음과 웃음의 색채에는 아가 품고 있는 쓸데없는 걱정과 가루가 되버린 시체의 냄새가 들어있었다.
갖은 비관론과 회의론으로 점쳐진, 우유부단한 나날의 연속으로 사람이 꽤나 현명해지진 못하는 것 같다.
여기서 염세주의와 '비관', '회의'의 세 단어는 뉘앙스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고는 있다.
염세주의는 사실상 우울증 증세라고 봐도 된다. 뭘 하든 의미가 없고, 허무하며, 공허하고, 쓸모가 없어 의지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두엽 속에 박혀있는 증상을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염세주의는 사람의 삶 자체는 자연 그대로의 '의지'가 만들어낸 한순간의 이벤트, 덧없는 것이며, 사람의 욕망과 삶의 모든 것들은 단순 톱니바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염세주의는 그 생각으로 하여금 사람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는 것인지 평생을 허무하게 느끼게끔 만든다.
비관과 회의는 각각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여 좌절, 절망, 실패에 대한 낙담 등을 느끼는 것'과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
감정적인 소양 중의 하나가 비관이며,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게끔 하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가늠을 행하는 것이 '회의'이다.
다만,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 속에서 일부의 인식으로는 위의 세 가지 단어가 사람의 일처리를 현명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매사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일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적에 미리 그것을 예상하고 있으므로 잘 대처할 수 있거나, 혹은 아예 부정적인 쪽이 일어나지 않도록
차선책과 그 차선책에 대한 대안책과 대안책에 대한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태도 등을 빌미로 그 인식을 '현명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촉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일부의 인식 속에서 세 단어는 차이가 서로 크게 부각되진 않으므로, 제목에는 그냥 세 단어 중 한 가지를 썼을 뿐이라는 것은 참고이다.
물론, 매사에 부정적인 인식이 신중함으로 바뀌어 '매사에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일이 성공하면 좋겠지만 만일 안될 경우를 대비한 여러 대안책들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는 있다. 허나, 그러한 생각만을 해온 나의 삶이 어떠하였는가 하면,
물론, 개인에 한정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이펙트가 당연히 일반론으로서 작용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염세주의적인 인식을 가지는 것이 사람을 이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여 모두가 낙관론을 가져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당위성을 이야기할 것도 아니다.
사실 정말 착각하기 쉬운 바로는, 어떤 사실이 도출되었다고 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기에는 어설픔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가령 엄청나게 명성이 있는 현대의 최고 철학자가 염세주의는 정말로 쓸모없다고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염세주의를 가지는 것은 쓸모없다고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허나 그 경우에는 과거 쇼펜하우어가 여러 생각을 하며 염세주의와 관련된 집필 활동을 했던 과거는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게 된다.
개인의 삶 속에서 여러 해에 걸쳐 전개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어떤 생각의 일관적인 방향성(~~주의)은 타인들이 쓸모없다 이야기 할지라도 그러한 방향성을 도출시킨 개인에게는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회를 합리적으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개인이 여러 해 동안 생각해내어 일궈낸 방향성을, 타인의 잣대를 통하여 사고의 진행방향을 무시해버린다면 개개인의 줏대와 개인이 여태껏 살아온 결과 만들어낸 여러 사고방식들의 가치는 그대로 증발한 채로, 타인들이 주장하는, 나아가 자신들의 줏대가 없는 대다수의 타인들이 이야기하는, 곧 집단, 단체가 주장하는 가치를 개개인은 그대로 답습하고 수용하는 작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말은 공산주의 속에서 마르크스가 바랬던 가치를 달성하긴 커녕 의미를 잃어버린 채 집단주의가 되어 개개인은 집단의 노예가 된 채 희생되고, 제대로 된 말도 할 수 없는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증적임을 자처하는 과학과, 사람이 살아가고자 하는 사고의 방향성의 전개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에는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각자가 생각하는 사고의 진행에는 각자가 살아온 삶의 경과만큼이나 나름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어찌보면 모두가 나름 정상적인 생각을 가질 것이라는 나만의 낙관론일 수는 있으나, 그러한 가치를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생각을 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나는 그저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나치즘같이 실증적으로 쓸모없어진 사고방식들은 전혀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한순간에 생각은 하지만, 나의 낙관론에 따르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정상적으로 사회화된 성인이, 여러 사고방식들이 전개 돼있는 방향성들을 충분히 교육받고, 알아볼 수 있는 환경 속에서는,
나치즘을 비롯한 여러 사고방식들의 방향성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비인륜적이고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것 등을 요소로 하는 사고방식들, 곧 '좋지 않은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보다 '좋은 것','최대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고방식을 선택할 것도 같다.'
그러나 네오나치라는 실례가 존재하여, 가끔씩 생겨나는 나의 조그마한 낙관론은 금세 무너져 버리곤 한다.
그 사람들은 정녕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증을 세계 여러 곳의 단체들에 해볼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각자 사람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의 전개를 함부로 막으려 해선 안된다는 사고방식의 전제인,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지극히 '좋은 것'을 사고방식으로 삼을 것이라는 판단이, 실로 옳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고 나는 자조하는 바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교육이 무엇일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는지, 지리적 차이에 따른 사회문화적 배경의 차이, '정상'이라고 판단하는 임의의 정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정상'이 곧 사고방식의 당위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와 같은 여러 무시할 수 없는 생각들은,
결국 그러한 고민의 필요성을 대두시킨 테러단체가 총을 들이밀고 쿠란을 외우느냐 외우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고문을 가하고 폭탄테러를 자행하고 한다면,
생각은 생각만으로 끝나는 것이고 사람은 결국 지 맘대로 지 좆대로 행동하고 다니는구나 하고 생각의 진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얘기가 아니었을 것인데, 어쨌든, 염세주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단적으로 말해 굉장히 무감각적이고 우울하게 만들어서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 추진력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라는 것이 나의 주요 논지였는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비관과 회의는 일처리와 여러 순간적인 판단들에 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몇 년이고 계속 되다보면,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자신의 갑갑한 마음가짐을 풀어내는 것도 좋겠다.
ps. 이 글을 쓰고 1시간이 지나서 생각난 것인데, 이 글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염세주의, 비관주의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든다는 통상의 인식'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나는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예 상정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인식은 오로지 나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고, 타인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쓰인 '통상의 인식'을 '일부의 인식'으로 바꾸었다.
사전적인 의미만 놓고 보자면, 염세주의는 비관 그 자체로 끝나는 생각이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것은 염세주의 그 자체도 있겠지만, 그러한 염세적인 인식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자연의 의지 그 자체에 한 번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행동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취지에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즉, 염세주의를 들먹거린 것에서 끝나는 것만이 의의가 아니라 그를 초월하는 노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인문학적인 소양을 통해 인지의 새로운 영역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덧붙일 만한 것은, 우리나라의 통상의 인식 속에서 염세주의라는 '인생의 실패자만이 하는 생각'을 나름의 가치를 지니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이는 의의의 가치를 대단히 평가절하하는 인식임 또한 분명하다..
16. 7. 09
대학원이고 편입이고 뭐고 학부가 보이지 않는 낙인과도 같다면,
아 대체 얼마나 허무하게 사람의 인생의 격이 고등학생 때의 그 하루동안 보는 그 시험 하나로 그렇게나 벌어지는 것인가.
연구소에서마저도 학부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는 이야기가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면,
대학원을 학벌 세탁이라고 여기며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다면,
바늘 구멍 뚫고 들어가도 편입생은 편입생으로 차별하는 세태를 무시할 수 없다면,
학점 높게 받으려고 X빠지게 뭐해도 대학원도 대학원 나름으로 취급이 명백하게 달라진다면,
그때의 나는 그저 학벌세탁하려고 지랄하다가 취업으로부터 도피하는 그저 그런 잉여인가?
아 그렇다면
그러면 정말로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미래에 자신이 살아갈 격이 결정된 것이며, 그 낙인, 그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해도 사회는 조롱과 비난을 하고 그 노력을 폄하할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애초부터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선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했어야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해 학원을 보내는 부모의 자금력이 없다면, 미래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낙인만을 기다리는 것이 그 부모들의 그 자식들인 것인가?
아 나는 이럴 줄 알았으면..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세태에 역겨움이 가시질 않는 것이다.
아 너무나 허망하다
앞으로의 삶의 낙인을 뭣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의 등허리에다 쳐박아 놓는 것이 우리들의 인재 관리 방식인가?
지금에 명백하게 학벌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재단하고 은연중에라도 학벌을 통해 특정 타인을 높게 보고 빌붙고 혹은 낮게 보고 멀리 하고 하는 작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지금에 대학교를 취업문으로 격하시키는 작금의 세태를 정부마저도 프라임 사업으로 고착시킨 것에 대해 고작 네이버 뉴스 댓글란에 '비판'하고 끄적이는 것으로 끝내는 작태가 만연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변화되지 않는, 변화하려는 의지조차 실체화되지 않는 작금의 세태에서, 앞날에 대해 확실히 알지도 못했던 고등학생 때의 어리석었던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박혀진 낙인을 나름의 노력으로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을 과연 어느 누가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는가.
여기까지 글 쓴 지금에 내가 약간의 정신을 차린 시점에서 맥락을 보기엔, 명백하게 내가 대학원의 학문적인 순수성에 대해서 고려해 보지 않은 것도 같다. 대학원은 실로 학부와는 엄연히 다른 부분이 존재하고 따라서 그 가치가 중대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나는 석사 과정만을 생각해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못하였다. 이는 잘 알아보지 못한 나의 추태임이 분명하고 따로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식해 보일 수 있다.(분명히 이 글 전체의 맥락은 대학원을 학벌 세탁용으로 사용한다는 의도에 대해 옹호하고 있는 뉘앙스이기 때문이다.)
허나 아무리 봐도 학벌 세탁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표현 상의 과격함일 뿐, 진정 자신이 어디를 진학할 때에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를 단 한번도 생각한 점이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내가 보기엔 초중고의 사회화 기관을 정상적으로 다닌 사람이라면, 학벌주의에 대해 선생들이 말하는 것을 안들을래야 안들을 수가 도저히 없으며, 부모님들 또한 선생 또래와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며 공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또한 취업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감정적인 요인 없이도 대학교는 사실 그대로 취업문의 역할로서 고등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데, 이 점까지는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대학원을 가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원화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자신이 알고자 하는 전공 분야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연구를 통해 논문을 쓰기 위해 대학원을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부정은 하지 못한다. 설령 실상이 대학원 나름대로, 또 인문학과 공학, 자연과학에 따라 연구실의 환경이 확연히 달라지고 심지어 같은 대학원에서도 랩마다 환경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즉, 예상과는 다른 생활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처음 진학을 마음 먹었던 순간에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점에 대해선 당연히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 때 대학원에서마저도 나름의 이름값을 고려하는 사람이 없을 수가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내 단언컨데 그 어떤 사람도 그 지긋지긋한 낙인에 대해서 생각치 않고, 취업이라는 대단히 큰 기회비용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대학원을 가려는 사람이 있을 수는 절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실제로 이름값이 있고, 명망있는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한다면, 당연히 이는 훌륭하다, 값지다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실상은 어떠한가. 대학원을 진학하겠다고 이야기만 나와도 학벌세탁이라며 조롱하기 바쁘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인가..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면 차라리 편입을 하지..하면 편입 또한 차별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헛수고했다 조롱하고,
그러면 차라리 재수를 하라고 이야기 꽤나 쉽게 주절거린다.
그렇다면 이때, 취업에서 신입사원 연령 제한선이 여자 30세, 남자 32세라고 언론에서 이야기한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름값 있는 학부의 미래 유망한 학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정말 마음먹으면 n수를 감당해야 한다. 허나 현실적으로, 간단한 예로는 자금력이 부족하여 학원은 못다니겠고 독학재수는 전년도 성적에서 더 잘나올지 확신을 못하겠어서 수능을 다시 볼 수가 없겠다 하는 경우는, 그럼 어쩌라는 것인지?
수능까지도 안된다면, 그 사람은 학부 시절에서 강하게 찍혀진 낙인을 지울 기회가 남은 60년동안 단 한 번도 없다는 말인가?
만일 기회를 찾기 위해 편입이고 대학원이고 찾아본들 가치가 없다, 의도가 불순하다 이야기한다면, 이건 뭐 다같이 나락 속에서 감정의 타락만을 마주보고 배부른 돼지마냥 살자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16. 7. 16
깨진 창문
비가 거세게 내리는 아닌 밤중에, 아무개의 머릿속은 진흙과도 같이 흘러내린다.
아무개는 생각한다. 빗물이 창문을 깨고 날아들어와 머릿속에 박혔는가
아니었나 함은 창문은 이미 깨져 있었고 빗물은 비수와도 같이 나의 머릿속만을 헤집어 놓을 뿐인가
아무개는 숨이 턱하고 막히고 눈에는 눈물이 점점 흘러나와 답답하고 갑갑해 밤에 잠도 못자고 있다.
아무개의 입으로는 언제나 같은 말만, 다른 어떤 말도 않고 오로지 하나의 말만 되뇌이고 있다.
빗소리가 자꾸 날 깨운다.
아무개는 어릴 적에 프레스기에 머리를 눌렸다.
아무개는 바보가 되어서도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슨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리라.
아무개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아 다녔다.
언제는 그것을 혀에서 찾았다.
허나 말뿐인 낙원 속에서 아무개는 개, 돼지만도 못한 사료를 먹고 있었다.
언제는 그것을 손가락에서 찾았다.
허나 구불거리는 지렁이와도 같은 그 글귀 속에서 아무개는 어떠한 의미도 볼 수 없었다.
언제는 그것을 뇌 속에서 찾았다.
허나 깨진 창문의 조각조각들이 프레스에 눌린 뇌의 여기 저기에 박혀 있어 아무개는 고통에 신음하였다.
낮에는 빛이 들었던 흔적이 조각으로부터 새어나왔다.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외로움이 그곳으로부터 새어나왔다.
오늘같은 날, 비가 오는 날엔
아무개의 머릿속은 빗소리로 가득차 아무개는 미쳐버릴 것만 같다.
잠을 잘 수 없다.
빗소리가 자꾸 날 깨운다.
빗소리가 작구 날 깨운다. 깨우기만 한다.
빗소리가 작구 날 깨운다. 깨우기도 한다.
빗소리가 작구 날 깨운다. 깨우기만 한다.
빗소리가 작구 날 깨운다. 깨우기도 한다.
아무개의 삶의 이유는 빗소리 하나만으로 흔들린다.
아무개는 빗소리에 자신의 울음소리를 묻는다.
아무개는 빗소리에 자신의 비명소리를 숨긴다.
아무개의 울음과 비명과 좌절과 절망과 억울함과 답답함을 빗물에 흘려내려 보낸다.
아무개가 받은 경멸과 환멸로 아무개의 머릿속은 지리멸렬함으로 가득찼었다.
이 역시 빗물이 쓸어내려 간다.
빗물이 아무개를 붙작구 흘러내려 보낸다.
빗물이 아무개를 붙작구 흘러내려 보내기만 한다.
빗물이 아무개를 붙작구 흘러내려 보내기도 한다.
프레스기 겪지 않은 비아무개는 창문이 멀쩡하였을 것인데..
프레스기를 누가 눌렀느냐 하면,
12번째 손가락
13번째 손가락
17번째 손가락
18번째 손가락
19번째 손가락
아무개는 기억은 한다. 기억은 하지만,
아무개는 빗물에 그저 지리멸렬한 머릿속의 경멸과 환멸을 지워내 버리고 싶을 뿐이다.
아무개의 창문에 쓰여진 낙서를 보고 비웃음을 연상하였던 아무개는
아무개의 깨진 창문에마저 조롱해대는 손가락들의 모습을 보고 역겨움을 느꼈다.
아무개의 머릿속은 빗물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깨진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은
깨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빗방울들과 벌레들
16. 7. 17
모기새끼의 죽음
늪지대 속 장구벌레는 아무개의 혈액을 빨기 위해 자신의 목숨 부지를 하고 자빠져 있어 지구 상의 산소 거반 대부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식물성 플랑크톤을 흡입하다시피 게걸스럽게 쳐먹어 대고 있는 와중이다. 어떠한 아무개의 아무개의 아무개들도 그런 벌레 새끼가 성장하고 아무개의 아무개의 아무개들의 피를 빨기 원하질 않는 것임에도, 그와 같은 벌레 새끼들은 자연적으로 그러하게 되어있는 것인지 저혼자 날고 기며 스스로 자라날 뿐이다. 어찌하면 그들은 자연의 의지만이 존재할 뿐, 스스로의 죄악감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을 수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장구벌레가 훗날 피를 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을 욕한다면,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의 목숨줄을 끊어 놓고 게걸스럽게 쳐먹어대거나 뺏어 먹거나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져가 혼자 먹거나 하는 일련의 행동들 모두를 욕할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허나 이는 육식동물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수에 비하여 병자의 피를 빤 모기들로 인해 죽는 사람이 보다 더 많기에 모기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 또한 분명한 것이다.
어차피 생각이랄 것도 하는 것 없어 보이고 자신을 납작하게 터뜨리거나 다리나 날갯죽지를 뜯어내거나 하기 위해 다가오는 아무개들의 손짓을 피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에만 의지한 채 아무개의 피를 빨고 그러는 벌레 새끼가 무어라고 생명을 존중할 가치가 있겠는가? 죽어 마땅한 존재이다.
그 사실은 모기가 설령 아무개의 피를 빨기 이전에는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식물들의 수분을 도와준다는 명백한 사실이 있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 보았자, 옆집 사는 김 아무개씨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모기가 없어짐으로 인해 생겨나는 생태계의 변화'에는 아무개도 관심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두가 다들 지금에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을 한순간의 이벤트라고 여기고 있지 않은가? 핵폭탄의 위험성을 알려줌으로써 강제력을 꾀하는 것은, 그렇다면 핵폭탄을 모두 없앨 수는 없는가 하는 것에 어떠한 이해관계없는 답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모기 새끼 한 마리의 죽음은 한 일가족에게 행복감과 안심을 줄 뿐이다. 거기서 나아가 모기라는 생물종 하나의 멸종이 이루어진다면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행복감과 안심을 줄 수도 있을 것이리라. 실제적인 고통이 사라지면 그깟 눈에도 보이지 않으리라 믿는 생태계의 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수는 그 변화를 공부하고 직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걱정에 비할 바도 되지 못한다. 애초에 그 이전, 이미 전쟁 중 살포된 고엽제와 갖은, 사람을 말살시키기 위해 고안된 살인 무기 등으로 인해 멸족 가능성이 수없이 높아진 여러 식물종들과 동물종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이미 현 상황에 익숙해진 터라 한 종의 멸종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를 연구하고 직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걱정들은 위선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심지어 같은 사람의 죽음에도 위선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그깟 모기새끼 한 마리의 멸종이 무슨 대수일까.
비단 모기새끼뿐일까. 사이코패스에겐 자신의 고집을 들어주지않는 타인 또한 모기새끼로 볼 수도 있다.
비단 정신병자뿐일까. 자신은 정상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마저 술을 먹으면 정신병자가 되고, 술을 먹지 않은 상태라 하여도 국가에서 정해주는 모기 새끼들을 처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비단 정상인뿐일까.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의사들과 교수라 할지라도 자신의 권위 뒤에 몇 마리 혹은 몇 십마리의 모기새끼들의 죽음을 묵인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멀리 돌아온 까닭에 어느 순간부터 모기새끼들에 비교되는 삶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아무개의 생명의 시간을 갉아먹는 모기새끼들이 존재한다.비단 모기가 되기 위해선 권위와 능력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자신의 부모에게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을 빨아 먹으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성인 모기새끼들도 존재한다. 한 가정에서조차 모기에 비견되는 삶이 보여질 수 있고, 그런 삶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장구벌레일 뿐이라면, 부모들의 시간을 빨아먹는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생물학적인 발달 과정 자체와 사회의 구조 자체가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주어야 그들의 자식을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허나 성인이 되어도 그들의 남은 시간을 빨아먹고 그들의 삶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예속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결국 모기새끼로밖에 보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모기는 어떻게 처리할까. 진짜 모기새끼는 눌러 터뜨려 죽인다. 종교나, 국가에서 정해주는 모기집단은 전쟁으로 말살시켜 왔던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기새끼같은 존재라고밖에 여기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모기새끼같은 결말을 낳을 수 있나?
그렇게 모기가 죽어가도 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 할 수도 있다. 성인 모기새끼기 죽음으로 그렇게까지 키워낸 기회비용이 너무나 막심해 혼란이 올 수도 있으나, 아무개의 말처럼 그것으로 슬퍼하는 것을 위선이라고까지 표현한다면, 모기의 죽음은 모기답게 잘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옆집 김아무개 씨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변화'를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는 전사회적으로도 무관심으로 끝날 일일 것이다.
모기의 죽음은 마땅히 죽어도 되는 존재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16. 7. 18
안 그랬어요
해명이란 단어가 가지는 모순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그런 취지로 말한 적이 없다."고 배설하는 데에 있어서, 그것은 참 자신한테 듣기 좋은 말인 것이 확실하다.
그런 식의 말과 글을 듣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을 따름인 것이다.
처음에 말과 글을 읽어내려 갔을 때, 배설자가 말하는 '본연의 취지'를 얻어낼 단서가 단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설자가 아무 생각없이 덮어놓고 말한 뒤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자위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위로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사람들이 많고도 많지만, 그것이 교육적으로 옳은 일인가 함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보증할 수 있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모기새끼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주변에서 윙윙거리며 시끄럽게 말을 하거나 글을 써내려가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영양소도 없이 눌러 터뜨릴만한 당위성이 존재하는 모양새이다.
하등의 가치가 없이 나불거리는 모습은, 자신의 진위고 뭐고 처음에 내뱉은 말과 글을 감싸기 위한 방파제를 하나하나 축조하는 모습과도 같다.
어떤 것도 해명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위하며 자신의 가치를 땅에 떨궈내 버린다.
그럼에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거나, 그것으로 하여금 선동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 자위의 가치가 없어지진 않는다.
이런 일이 가능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줏대가 전혀 없이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삶의 의의인 사람인 경우밖엔 없다.
그리고 그 유별난 케이스는 분명 드문 경우여야 할 것인데, 신뢰성없는 여러 매체로부터 유입된 정보를 그대로 철썩 믿어버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파장이 크게 번져나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는 SNS가 크게 동조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괜한 의혹을 받아 파장을 이는 케이스도 있다.
허나 이 경우는, 사실상 악의를 가지고 파장을 일으킨 것이기에 그에 대한 대처가 가능하긴 하다.
연예인이라면 자신의 명성에 크게 흠집이 나는 경우이겠지만, 발원지, 발상지에 대한 조사가 가능할 것이고
무고죄라든지 심하면 명예훼손이라든지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뚜렷하다면 말이다.
사실 고소를 일으키는 경우까지 갈 필요는 없다.
그 정도로 파장이 크다면 사실 해명이고 뭐고 서로에겐 독밖엔 남지 않는다.
그저 평소에 어떠한 족적을 남겨왔고 그것에 대해서 가식적인 말뽐새로 교묘하게 꾸며놓는 행위, 자위밖에 더 되지 않는 행위를 해왔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그 경우는, 증거와는 무관하게 설득될만한 필요성이 생김과 동시에 사건이라 할 것도 무마될 수 있다.
특히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의 경우 그러하다.
가장 심각한 곳은 군대 내부일 것이다.
마뜩찮아도, 무마할 필요성이 있다면 모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꼬매버리게 만든다.
설령 그것이 '평소부터', 고소를 일으킬만한 사건을 무마하는 것일지라도, '평소부터' 그렇게 해왔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장 교육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중,고등학교의 교무실에서도 무마되는 '사실'들이 존재하는데,
그리고 그것을 학생회였던 본인 또한 간단하게 무마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사실 대강 눈치챈 대다수의 학생이 존재하였음에도, 무마되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으로 하여금,
교내의 상황을 사회 전체의 상황으로 확장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우울증에 걸리기 바로 전 시점에서 깨달았다.
16. 7. 18
안와전두피질이 쭈글쭈글해진 아무개들
아무개의 안와전두피질은 파삭파삭 경화되어 아무개의 내일과 모름지기 찾아올 미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짓을 했더이다.
아무개가 모욕죄를 선고받을 때, 아무개의 어미와 아비는 컴퓨터를 컴퓨터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아무개를 바라보며 아무개는 그래도 예전에는 괜찮은 아이였는데 하고
안타까워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비단 아무개가 그런 몰골이 된 것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개는 아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더욱이 안타깝다.
아무개는 자신의 미래를 앗아가버린, 자신에게 빨간 줄을 긋게 만들어버린 그것을 끊지 못하고,
여전히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재수를 하고 있더이다.
재수를 하는 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하겠지만,
아무개의 처지를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은 알겠더이다.
그 아무개는 언젠가 나를 만났을 때 길고도 길게 자신의 신세를 설명하며 우스갯소리로 나와 멀어지지 말아달라 말을 하였다.
우스갯소리였을까
아무개의 안와전두피질이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신피질과 변연계의 상호작용 대신, 전전두엽피질을 잘라내 버리고 변연계만을 자신의 지성의 근간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더이다.
아무개는 분명, 착한 아이였을 것인데, 어쩌다가 나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쁜 어른도 되지 못한 인생의 실패자라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대체 어쩌다가 그리 되어버린 것일까.
아무개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평가하였다.
인생의 실패자라고, 그렇게 평가하였다.
아무개는 그런 미래를 설계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변연계의 흥분 때문이었다. 한순간의 감정적 격정을 참지 못하고 그만 손가락으로 걸레를 쥐어짜버린 것이다.
걸렛물이 키보드에 타탁하고 튀어 그만 검은 구더기의 나열을 만들어 버렸고 그것에 속이 상한 다른 아무개에 의하여
고소를 당한 것이렷다.
아무개의 안와전두피질이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감정과 이성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감정 가는대로 그저 욕짓거리를 내뱉다가 벌금형으로 자신의 몰골이 함몰되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하더이다.
그야말로,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다가 인터넷이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에 이렇게나 심각하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일까.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 중 한 아무개는 컴퓨터를 보고 켜지도 않은 채 그저 무거운 상자로밖에 쓰지 않을 터인데,
지금에 아무개가 그렇게 법정을 들락날락 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아무개들이 그런 사용법으로 자신의 도의적인 가치를 저버리면서까지 행동하는 것을 보며 과연 그들이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이 하는 자연 그대로의 사용을,
과연 컴퓨터 하나 쓰지 못한다 욕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사는 그들 아무개는 그들 나름대로 도의적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저버리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처벌도 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아무렇게나 자신의 부모에게 욕짓거리를 하는 자는 쉬이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부모에게 욕짓거리를 하는 경우도 적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들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 것임 또한 분명하다.
헌데 어찌 문명화되었다 자부하는 아무개들은 그 도의 하나 지키지 못하여 저버리는 것인가
비단 부모욕 하나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이 자연적이지 않은, 대단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그런 용어의 사용 행태에 대해 의문이 간다.
그렇게나, 자신의 분노를 격정적으로 표출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나,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공감시키고 싶은 것일까.
과연 아무개는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표출한다고 하여 그 분노의 대상이 된 다른 아무개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가축에게 하는 행태이다.
이는 가축으로 사용되는 동물에 대한 생명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타인, 사람인 존재를 그렇게나 격하시키고 심지어 부모욕까지 하는 것을 보며,
과연 그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고도 그 이후 주말마다 교회를 가고, 혹은 자기 나름의 신을 믿으며
혹은 타인을 가르치고, 타인에게 교육받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그렇게. 할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중엔 자기 자신 스스로 속죄한다고 마음가짐을 고치면,
그것이야말로 위선인 것이며, 썩어빠진 자기합리화인 것이며, 그는 안와전두피질까지 송곳을 찔러 후벼파낸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인권을 보장받겠다고 설치다니,
스스로 차버린 것이 무엇인지,
자기자신에게 그것이 가지는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진정으로 미리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눈으로는 절대로 자신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타인의 잘못만을 세세히 지적한다.
그렇게, 자신은 사람인 것이다.
타인의 가치를 자기만큼이나 깎아 내려야 그것은 사람일 수 있다.
그것은 매체에서 보는, 구전으로 듣는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자신일 수 없음에 체념하고,
자신의 가치를 찾지도 못해 시간을 버린 탓을 타인에게 하며 분노를 표출하다가
끝내 도의적 가치까지 저버리면서까지 격정을 내어 그저 불타 사라지는 것이 그의 존재가치이다.
지금에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치 못하는 망나니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에는,
중학교 도덕 교과서 하나를 제대로 정독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는 것 또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필시, 아무개의 안와전두피질은 그때에 다시 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