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지는 자유의지의 정체 및 밈에 따른 집단의 형성 과정
어떤 사회적 밈이 파급력을 지니기 위해선 그 밈이 '유행'하고 있다는 가정으로써 이를 집단 내에 유행시켜야 한다.
농노제의 경우에서 일반 백성이 귀족과 왕에 대하여 생각할 때 가지는 어떤 시뮬라크르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시뮬라크르 속에서의 귀족의 이미지가 실체와 다른 것일지라도, 백성들의 시선에서 이미 귀족은 해당 시뮬라크르 안의 개인들로서 표상된다. 즉, 귀족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주안점이 되지 않는 것이다.(설령 귀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 백성들은 어떤 사회적 밈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하고자 할 때, 귀족들의 경우와 자신들의 경우로 집단을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을 당연시함으로써 집단 간의 밈이 나뉘어진다.(엄밀하게 말하자면, 밈의 분리로 인하여 집단이 나뉘어진 것이다.)
농노제의 경우, 분명 노예들이 이에 대하여 반발을 집단적으로 일으킬 수 있을 여지가 큰 것이었음에도, 장기간 인류 역사가 노예제를 폐지하지 못하거나, 강제적으로 폐지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내집단, 외집단을 서로 신분 및 그와 관련된 밈(시뮬라크르)들을 기준으로 밈의 분리가 이루짐으로써 해당 밈의 분리를 자신의 자아정체성으로서 확고히 믿는 개인들이 다수 존재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은 1)가족에 의해서 2)보다 큰 공동체 규모에서 이러한 밈을 숨김으로써 3)보다 큰 공동체 규모에서 이러한 밈을 없애기 위해 처형함으로써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반발이 쉽게 무산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노예제라는 밈을 긍정하는 개인의 수가 해당 공동체 내에서, 노예제라는 밈을 부정하는 개인의 수보다도 많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개인의 삶'이란 해당 공동체 내의 밈으로 이루어질 뿐이며, 밈의 선별적 작용을 통해 개인의 삶에 어떤 구분이 존재한다고 믿는 현상은 여전하다. 아직도 신분제는 법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이를 대체할 학벌, 금수저 등에 대한 사회적 믿음(밈)은 여전히 존재하고, 실제로 해당 밈들이 법을 압도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사실은, 사법 제도 또한 밈이고, 또한 개인에게 선별적으로 사법을 압도하는 밈 또한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2000년대 초반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구절로 대단히 비약적으로 표상될 수 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밈에 의해 형성되지만, 개인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여러 밈들 중 어떠한 밈이 가장 옳다고 가치판단 하에 해당 밈을 선택하는지는, 이전에 교육받았던 밈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로 인한 현실 상의 양상은, 밈의 선택이 개인에게 있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개인이 사회적 밈을 교육받은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개인은 마치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은, 개인은 해당 공동체 내에서 어떤 밈을 중요하게 여기고자 할 때, 그저 그 밈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선택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있음으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의지랄 것은 대단히 경량화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다.
(그럼에도 어떤 밈이 유행하기 이전에 최초로 어떤 밈을 선택하였던 개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던 것이 맞았으리라고 결과론적인 편향으로만 판단할 수 있겠다.)
또한, 현대에도 계급배반투표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며, 이에 따라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밈(사회적 계층의 구분)을 수용하고, 이에 대해 발전(시뮬라시옹)시키며, 이를 후손 세대들에게 교육시키고, 이러한 밈들의 변화가 야기할 사회 공동체 내의 불안요소를 없애길 희망한다.(설령 그 변화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일지라도 계급배반투표로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어떤 한 개인이 단지 무지해서 자신의 계급을 박차고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보는 판단은 결과론적인 편향에 의한 가치관일 뿐이다.
사람의 자아정체성은 사회적 밈에 의해서 형성되며, 하물며 해당 사회적 밈들은 이전 세대의 개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들이다. 그 상황에서, 사회적 밈은 마치 그것을 믿는 것이 '객관적'이고, '신빙성'있으며,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들로 절대적으로 믿어지기도 한다. 이 착각을 깨닫기 이전까지 개인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가질 가상의 이미지들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없으며, 이내 시간이 지나 이에 대한 피로의 누적으로 결국 자아성찰을 포기하고 만다.
그러한 개인이 대다수이며, 이를 설령 깨닫는다 할지라도(자신의 정체성은 결국 주변의 유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라도) 이를 비슷한 사회적 밈으로 묶여있는 개인들에게 다시금 알려주기는 쉽지 않은 까닭에, 사회적 밈의 유동성은 대단히 낮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떤 사회적 밈에 대하여 그것이 부당하다 가치판단하는 개인들이 왕당파와 귀족들의 머릿수보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유효한 사실이다.
왕당파와 귀족들이 어떤 엘리트주의를 표방한 빅 브라더로서의 정치를 해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편향일 뿐이며, 이는 해당 왕당파가 세습 군주를 지지하면서 엘리트라는 밈에 부적격한 자손마저도 왕위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체제는 궁극적으로 대다수에게 옳지 못하다고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루이 14세~16세까지의 부채는 결국 세리들에게 조세권을 사실상 넘겨주고, 절대적인 부를 착취한 귀족들에게 조세 부담을 지우지 않은 까닭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삼정의 문란은 마치 조선시대의 그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에 따른 반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일 것이며, 이에 대한 호응의 정도는 결국 어디서 온 것이냐면,
바로 상술하였듯이 해당 사회의 주류 밈과는 다른, 새로운 밈에 대한 대중들의 수용 정도가 더 컸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점은, 바로 일반화의 문제이다.
일반 백성들과 그들의 대표로서 국민의회를 자처한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왕당파 및 입헌군주제 옹호자들에 대한 일반화를 통하여 집단 대 집단으로서의 (혁명이라는) 사회적 밈을 적극 수용하고, 발전시키고, 퍼뜨렸기 때문이다.
만일 왕당파 및 입헌군주제 옹호자들이 일반 백성들과 같은 집에서 지내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식사를 하며 일만 다르게 했을 뿐이라면, 이러한 '일반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실제 귀족들의 행태는 백성들의 그것과 달랐고, 그로 인한 백성들 자신들의 시뮬라시옹으로 인한 귀족들에 대한 상상이 왕당파에 대한 창끝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밈은 처음 이전 세대의 개인에게서 비롯되고, 퍼져나가지만, 이것이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 밈을 수용한 내집단으로서의 집단적 정체성을 가져야 하고, 더불어 외집단에 대한 시뮬라시옹이 이루어져야 하며, 끝으로 외집단에 대한 일반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이윽고 내집단에 대한 확고한 밈의 유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점은, 이 '일반화'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고방식 중의 일환이면서도,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화 그 자체는 오류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유용한 논리회로이지만,
성급한 일반화로서 대단히 많은 오류를 내포하는 사고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前술하였듯, 사회적 밈은 내집단에 수용된 이후 시뮬라크르를 통하여 외집단에 대한 (주로 배타적) 일반화를 통해 고착된다. 이때 외집단에 대한 일반화는 설령 그것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도
1) 해당 일반화에 대한 오류를 감안하고 내집단을 결속시키고자 한다거나
2) 해당 일반화에 대한 오류를 모르거나
3) 해당 일반화에 대한 오류보다도 내집단의 결속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여
결과적으로 성급한 일반화 또한 일반화로서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여기서 1번과 3번은 논리회로가 얼핏 유사하나, 1번을 기준으로 내집단을 결속시킨다면 오류에 대해 구성원들이 주지할 수 있겠지만, 3번을 기준으로 그러한다면 오류는 자연스럽게 무시되고 더욱 배타적인 내집단으로서 결속될 수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여기까지 서술하자면 알 수 있는 것이, 사회적 밈이 그 자체로 집단이 되기 위한 과정이 1)수용 2)시뮬라크르 3)일반화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때 일반화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은 누가,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말인 즉슨, 일반화의 경우 반증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내집단이 존재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으로서 유효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를 분명하게 객관화시킬 수 있는 단서가 필요하다.
이때의 단서는 각자 개개인들이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해서는 내집단의 결속이 늦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개인들을 합리적이라 일단 가정할 때, 합리적 일반화의 과정은 모든 모집단의 원소들에 대해 고려해야하므로 이를 실행하기 위한 시간이 대단히 많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시간은 '엘리트'를 표방한 개인들이 등장함으로써 단축될 수 있다. 말인 즉슨, '엘리트'를 자처하거나, 타의로 점쳐지게 된 개인들이 하는 어떤 일반화는 해당 내집단에 들어갈 (후보자들) 민중들에게 '일반화'에 대해 빠르게 도출된 결과를 (경제적이라 판단하여)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개인이 각자 일반화에 대한 계산을 하는 것이 대단히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며, 개인은 일반화에 대한 엄밀한 계산에 들어가는 시간 및 도출 결과가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일반화의 합리성 및 도출 결과에 대한 파급력과 대비하여 좋지 않다고 결과를 내리면(심지어 그런 개인의 판단조차 '엘리트'들에 의해 유도된 것일지라도) 그것으로 개인들은 '엘리트'들의 의견에 따라갈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임을 이야기해준다.
이때 '엘리트'라는 개체들은 그 자체로 특출나다거나 어떤 절대적 존재가 점찍어준 인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집단이 될 수도 있으며, 중요한 정의는 "'일반화'에 대한 정의를 빠르게 내린 사람들"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
즉, '엘리트'들의 '일반화'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주장하는 밈을 개인이 수용하는 것이 경제적이기 때문이며, 이는 개인이 언제든지 해당 일반화에 대한 반례를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엄밀하게 '엘리트'들만의 일반화가 항상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엘리트'들의 일반화는 그 반증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해당 일반화를 신뢰하는 개인들의 수가 대단히 많으면, 그 일반화에 대한 반증가능성을 1)감안하거나 2)무시하고 내집단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의해,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된 내집단이 주장하는 일반화가, 대단히 배타적일지라도, 그에 대해 호응하는 개인이 다수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얼핏 해당 일반화가 신뢰할만한 것이라는 전도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현상이다.
프랑스 혁명과 같이 농노제의 혁파와 같은 역사적 시대에서,
백성들은 '일반화'에 대한 참, 거짓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당파와 입헌 군주제 옹호론자들에 대한 백성들의 시뮬라시옹의 결과는, "귀족들, 그리고 귀족들 옹호하는 쟤네들은 아주 더럽게 돈만 벌어먹은 하마들이 분명하고, 반면 우리들은 하루 벌어 먹고 살기조차 힘들다"는 일반화를 야기하는 '경향'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논리전개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보급된 이상, 시민들은 '일반화'에 대한 참, 거짓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 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를 다원화된 문제라고 보편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컨데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이 있겠다.
극단적 페미니스트라는 집단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해당 밈이 주창하는 극단적이고도 배타적인 사상은 선별적으로 개개인에게 수용되었을 것이지만, 해당 집단이 내세우는 '일반화' ("남자들은 잠재적 성범죄자")는 대단히 자극적이고도, 개인들의 자아정체성으로 작용할 수 있을만한 '유혹적인 것'(=개인이 사유할 수 있는 논리회로 상 연역, 귀납을 불문하여 가정/실례들로부터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가장 짧은 가설)이었기에, 그 반증가능성을 '무시하고' 일반화에 따른 내집단 형성이 고도로 결속되는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타성 및 anomy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일반화' 속의 선별적인 성범죄들의 양상이 그 잔혹성으로 인하여 개인에게 어떤 밈들보다도 우선시 되는(가장 먼저 배운) 도덕관념(밈)에 의한 판단(마치 해당 집단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할만한 여지)이 이루어지기에 이에 대한 반박하는 것은 마치 도덕관념을 부정하는 듯한 야만적이고 미개한 행위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성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사실판단 상, 어떤 특정한 성별이 이성에 대하여 자유를 빼앗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범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해당 사실판단 이후의 가치판단 상 어떤 특정한 성별을 지닌 개개인들이 모두 유의미한 범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일반화'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리는 부분은 바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그리고 일반화까지 붙어있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장치 상의 비약을 눈치채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지를 진행하기 위해 필자는 극단적 페미니스트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반박하지 않았고, 어떠한 주장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논지를 진행시키면서, 어떤 밈이 특정 내집단을 이루면서 필요한 단계들을 분석해보았을 때, 그 밈으로써 내집단을 형성하기에 필요한 '일반화'의 과정이, 오류가 있을만한 것이었는지만을 관측했을 뿐이다.
그 결과를 표현함에 이르러선, 필자는 강경하게 해당 내집단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표출한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면, 적어도 필자가 이야기하는 논지를 밈으로서 수용하는 집단이 나타나지 않은 반면, 극단적 페미니즘이라는 밈을 수용한 집단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밈의 수용 정도에 따라 필자의 밈(논지)에 따른 일반화(주장)는 대다수의 개인들에게 현재 시점에서 객관적이라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는 필자의 논지가 객관적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일 필자의 논지가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개인이 다수 존재하게 된다면, 훗날 집단 형성 과정에 대한 필자의 밈으로서, 외집단에 대한 '일반화'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개인이 늘어날 것이라 낙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