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tiness

금수저가 아니기에 슬픈 젊은이의 초상

Not-exist 2019. 6. 18. 15:28

 금수저라면 받을 수 있었을 여러 가지의 사회적 혜택들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다.

 현실 속에서 체감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든, 상상하지 못하든,

 실제로 많은 재산 그 하나만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의 여유는 분명 존재할 것이기에.

 

 그러한 것들은 자신이 실제 금수저가 아니기에,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랄뿐인, 휘발성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이 공동체를 살아가는 절대적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무기력감을 학습시키고 있다.

 

 

 그러나 명백하게, 금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다.

 그것은 더욱이 사람들에게 학습된 무기력감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의 명백한 사실로서 다가오게 만든다.

 

OOOOOOOOOOOOO 

OO

 

 그렇다면 흙수저는 흙수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심지어 현대에는 패션 문화에서부터 갑작스럽게 야기된, '가난 도둑'이 횡행하고 있다. "부자가 자신의 다채로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가난마저 모방하고 있다."

 흙수저들은 흙수저로서의 자신의 안타깝다는 사회적 밈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양상으로 변화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가 실제 흙수저이고 알뜰폰 5천원 요금제를 쓰고 군대 제대하고 7개월동안 치킨을 딱 한 번 시켜먹을 수 있었으며,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사주셨던 운동화를 어떻게든 5년 이상 신고다녔다고 해도,

 장차 미래에는 그 모습만으로는 '가난'이라는 밈에 예속된 '실제 흙수저'인지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필자가 이렇게나 혹독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부자 또한 '가난'의 밈을 모방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땟국물이 묻어있고 심지어 여러 군데 찢어진 명품(?) 운동화를 161만원에 사가는 부자들은 그것으로 가난을 모방할 수 있다.

 이것은 흙수저가 가난을 고유 독점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금수저'의 단어로서 표상된 현실 속에서,

 되려 흙수저가 가난을 독점하지 못하고 그 '금수저'들에게도 모방당하고 있다는 현실에 더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왜냐면, 부자가 그런 명품(?) 운동화를 사서 신고다니고, '나혼자산X'라는 프로그램에서 가난을 모방하고 있다고 하면,

 흙수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고 판단하여 분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흙수저만이 가난이라는 밈을 독점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것이 아이러니함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필자 또한 하루가 걸렸다. 도저히 부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부자의 생각은 일단 몰라도(부자가 아니기에), 흙수저의 입장에서는, 부자의 그러한 행동은 굳이 분개할만한 것이 아닐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면 그러한 모방 행위는 장기적으로 '부'와 '가난'의 밈의 구분을 타파할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가 가난의 밈 속에서 고통받는 것을 부자가 따라해본다면, 그것이 설령 일순간의 일일지라도 그 한순간만큼은 가난한 이와 부자의 외양을 제 3자(석기시대 사람이나, 원주민 등)의 입장에서는 구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로서의 모습과, 가난한 이로서의 모습은 사회적 밈에 불과하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은 전에 여러 번 서술하였듯 사회적 밈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기에,

 사람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부자의 모습과 가난한 이로서의 모습을 고정적으로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태어나면서 수저의 재질이 달라지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금수저는 가난한 이의 모습을 한순간 따라할지라도, 단순히 마음의 변화만으로 어마어마한 부의 소모를 만끽할 수 있는데도 흙수저는 일순간 부자의 모습을 따라할지라도, 압도적인 부의 차이로 인하여 평소에는 다시 가난한 이로서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인 까닭에 사람들은 서로 간의 모습을 따라하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밈으로 인한 자신의 정체성의 간극의  차이가 스스로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실상 사람이란 그 외양이 영장류의 모습을 닮았을 뿐, 그 안에 내재된 의식이라든지 도덕 관념을 비롯한 정체성은 온전히 사람 사회의 밈으로만 구성되어있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와 가난한 이라는 밈 하나만큼은 버리지 못하고 그저 그것대로 순응하며(심지어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에서부터 그 의식을 학습시키고 답습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정체성'이란 것을 '어떤 바뀌지 않는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고대부터 시작된 농노제가 근대에 이르러 타파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이며,

 '자연권'과 '인권' 등의 개념이 사회적 밈으로 학습되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의식'이랄 것에 대단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인간경시'라고 학습시키며 애써 무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역사적으로 어떤 도덕 관념을 가졌다 할지라도, 100년도 지나지 않아 독일의 나치라는 표본으로서 사람의 잔학함은 관측되었으며,

 그러한 학살의 와중에도 도덕 관념이랄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있었다는 점으로 하여금,

 사람의 정체성은 결국 해당 사회의 밈에 의해서 좌지우지됨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중략)

 

 

 

  2010년대 이후 갑작스럽게 등장한 '금수저'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재산'이라는 요소가 마치 DNA의 유전처럼 작동한다고 이해되기 시작하였는데,

 왜냐면 금수저로서 태어나지 못하면 일평생 금수저가 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합당한 사실이기도 한데, 설령 흙수저가 자수성가하여 금수저가 훗날 되었다 할지라도,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누려온 사회적 혜택을 해당 자수성가 금수저는 누리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자수성가의 비율이 날로 줄어가고 있고, 그 절대적인 비율 자체도 작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금수저라는 표현이 갑작스럽게 대두되고 사람들에게 압도적 무기력감을 주는 것은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명백하게 '재산'은 사회적 밈으로서, 그저 해당 사회에서 통용되기 위한 하나의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환율의 차이로 인해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얼마, 금 몇 그램을 기준으로 얼마 등의 본위제를 통하여 전세계적으로 통용된다는 점에서,

 재산이라는 가치는 해당 시대의 세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쟁이 일어난다든지의 위험성으로 해당 국가가 몰락할 가능성을 무시하는 인식이다.

 예컨데 우리나라가 경제적 위험뿐 아니라 가시적인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나라 돈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5000만원을 쏟아부어야만 빵 한 조각을 살 수 있는 지경으로 몰락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흙수저는 빵 한 조각마저 사지 못하긴 하지만,

 잠정적으로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세대 구분을 통하여 서로 간의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밈은 그자체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나 위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원천적으로 이를 차단하기는 어렵다.

 

 

 

 허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침팬지의 강력한 팔힘과 사자의 턱힘을 따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없듯이,

 DNA의 형질 발현에 있어서 어떤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대개 어리석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DNA의 유전처럼 작동되는 '재산'에 의한 '금수저' 발현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열망을 가져다준다.

 마치 자신도 '금수저'였다면..하고 망상을 하는 것으로 어떤 머릿속의 왕자님을 만나거나, 공주님을 만나는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어째서 침팬지의 팔힘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금수저의 재산은 부러워 할 수 있을까?

 그 둘이 다른 양상이 아니고 실상 동일하다는 인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면서 어떻게 후자의 것이 모순된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밈'과 'DNA'의 작동이 유사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허나 이는 사람이 '밈'과 'DNA'로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도약 발판이 됨과 동시에, 어떤 위험성 하나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바로 '도태'의 인식에 있다.

 

 DNA의 형질 발현에 따른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돌연변이 단백질 등으로 인한 특이 개체 등의 생존, 그리고 그러한 생존에 따른 해당 돌연변이 단백질을 우성적으로 발현시키는 DNA의 유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생존 및 도태는 여러 DNA 형질 발현의 난립 중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떤 개체가 도태되고 살아남는 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종일지라도 여러 DNA의 난립이 존재함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산' 등의 밈이 상속되는 양상은 어떠한가?

 '재산'은 살아가면서 축적할 수 있는 하나의 밈일 뿐이며, 그것이 후대에게 이어진다는 인식은 '상속', '증여' 등의 사회 제도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상속과 증여는 사실 DNA처럼 근본적인 사람이란 종의 원천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해당 사회의 밈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는 사람이 죽으면 해당 사람의 재산을 모두 사회가 세금으로써 흡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손은 다시 0원부터 시작하는 사회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속과 증여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재산'의 상속이 마치 DNA의 유전처럼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차설, 재산은 분명 살아가면서 축적할 수 있는 것이며, 부자와 가난이라는 또 다른 밈은 그저 한순간의 외양에 불과한 이미지에 불과함에도, 또 그 이미지를 반대 급부가 서로 모방할 수 있을만한 것임에도,

 재산의 상속이 이미 많이 이루어진 '금수저'와 그렇지 못한 '흙수저'라는 단어를 등장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재산'이 곧 DNA의 형질 발현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문제이다.

 

 사회적으로 도태되었다고 하는 것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있어서 '노숙자'라는 인식으로 퍼져있는데,

 실은 '노숙자'라 할지라도 해당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은 꼭 아니다.

 부자와 가난이라는 밈은 절대적으로 사람의 어떤 능력에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왕권주의 사회에서 선천적으로 '장애인' 왕은 항상 존재하였다. 이 점이 사람의 '능력'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잣대로서 사람을 부자와 가난의 밈에 예속시키는 것이 어리석다는 근거가 된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장애인 왕'이 없으니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유행하는 '금수저'에 합당한 가문에서도 선천적인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자 가문에서 항상 재벌 기업의 CEO를 맡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출생에서도 DNA의 형질 발현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고,

 선천적으로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 역시 사람으로서 해당 '금수저' 가문의 일원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의 보편적 인식 상 '재산'의 축적 정도가 사회적 도태의 척도가 되어있기에 문제가 된다.

 왜냐면, '재산'의 축적 정도를 삶의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해당 밈이 널리 퍼지게 되고 이는 어떤 '세대'마저 이루었기 때문이다.(88만원 세대)

 이는 어떤 신분제 상에서 고위 신분으로 올라가기 위해 과거제를 보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양상과 비슷하다.

 즉, 어떤 '재산'이라는 밈이 신분이라는 밈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면서, 가난한 양반과 부자 상인의 신분 교환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재산'이라는 밈이 되려 현대사회에서도 사라졌음이 분명한 어떤 '신분'을 역사적 사실로부터 억지로 연관지어 고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인 즉슨, '재산'이 곧 현대 사회에서의 신분이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사회적 도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은 '밈'의 합성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합성된 밈'의 구성요소들에는 개개인의 인생 영위와는 관계가 없다.

 신분이라는 밈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일생 바꾸지 못하는 이미지로 인식되고, 

 재산은 축적해나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금수저만큼의 재산을 쌓지는 못한다는 현실이 이미지로서 인식된다.

 이러한 합성에 의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라는 개념이 더욱 추상화되고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도태'라는 기이한 개념은 마치 자연 속의 동물들이 어떤 형질 발현으로 생존했는지를 분석한 것을 그대로 인간 사회의 인간 개체들에게 적용시킨 것인데,

 그 척도가 '재산'이 되었다는 것이 더욱이 기이한 것이다.

 아인슈타인같은 어떤 지적 능력이 해당 사회를 '발전'시킬 어떤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

 문과는 공무원 시험을 보고, 공대는 학점 낮으면 공기업이나 공무원, 학점 높아도 공기업, 아니면 대기업, 중견기업, 가난하고 급하면 중소기업, 40대에는 치킨집으로 간다는 대단히 기이한 '인생 스킬트리'가 정형화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대학원은 학벌에 연연한 사람이나, 교수되고 싶은 사람, 대기업 가기에 좀 더 좋은 스펙 쌓고 싶은 사람, 정말 연구하고 싶은 사람 등이 간다고도 하지만, 실상 '교수'나 '정말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해외 대학 중에서도 유수 대학을 가야 꼭 인정받는다는 인식 또한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공동체 안에서의 학업이 '재산'의 축적 정도를 불리기 위한 수단에 한정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인생 스킬트리'는 누가 만들었고, 해당 공동체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가 하나도 없이,

 그저 재산의 축적 정도를 늘리기 위한 방편임에도,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다.

 (그리고 필자도 이를 따라가고 있다. 심지어 따라가기도 버거워서 힘들어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도태'가 '재산'이라는 척도에 휘둘림에 의해 사람들에게 있어서

 '금수저'라는 태생은 그야말로 신이 내려주신 축복과 같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왜냐, 해당 '금수저'는 수능을 말아먹고, 대학교도 가지 않아도,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절대적으로 '사회적인 도태'에서 멀어진 개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해당 '금수저'가 몇백억을 떡락하는 가상화폐에 투자를 했다면 모를까, 이미 그정도의 금액이면 주변에서 말린다..

 '금수저'라는 태생이 그저 보통의 '인생 스킬트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기력감을 주는 원인은 이해할만하다.

 

 개체의 어떤 형질 발현에 따라 해당 개체가 더 오래, 길게, 더 많이 DNA를 퍼뜨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이러한 사회적 도태에서의 '재산 축적 정도'와 진화론에서의 '돌연변이 DNA-RNA-단백질 합성' 등이 유사하다고 사람들에게 인식된 것인데,

 무엇보다 '재산'은 하나의 밈으로서 살아가면서 축적하는 것이고, DNA의 형질 발현은 살아가면서 (아직까진) 절대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구분하여 인식함은 필요하다.

 

 그럼에도 인식되기로는, '재산'이 많으면 삶이 여유롭고 편하고 즐겁다는 것이다.

 이는 실상 신석기시대 농경 시작 이후부터 발생된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인식이다. 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금수저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그저 재산의 축적 정도만으로 '사회적 도태'가 결정되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며,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분석이 존재하지 않는 밈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정도밖에 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