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기 위해 사는 사람
실패를 지레 짐작하며, 자신의 일의 성취도를 떨어뜨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언뜻 제 3자가 보기엔 아무개가 매번 시험을 보기 전에 "아 난 안될 것 같아"하며 이야기함에도
만일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면 그것으로 "겸손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아무개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아무개는 실제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말인 즉슨, 어떤 시험이 있을 때, 그것의 실패를 지레 짐작하며 스스로 고통을 자아내는 아무개는,
그 시험이 다가오면서 자신에게 압박감과 부담감을 줌으로써 공부하거나, 연습하거나 하는 행동을 자아내고자 하는
마음만을 동기로 하기 때문에, 실제의 정신적 고통(이는 신체적 고통과 일맥상통한다)을 받으며 인내하게 된다.
만일 시험이, 세간에서 말하는 지적능력을 요하는 것이라면, 아무개의 '공부'는 진실로 고통을 수반하는 자해가 된다.
시험이라는 것에 크나큰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 시험 시험마다가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인생을 영위해나가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신기하게도, 졸업을 하고 자신이 백수의 생활을 지내게 되면 알 수 있게 된다.
왜냐면, 백수가 되어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내적인 욕망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회적 평가를 꼭 받고 싶어하는 모양새와 같다.
자신이 사회 속에서 어떠한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싶어 하는 욕구는
'자아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리다.
그 욕구는 곧,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서 표현되며, 어렸을 적부터 아래의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
1. 행동에 대해 평가를 받는 '시험'이 반복된다.
2. 평가의 수준에 따라 추후 삶의 퀄리티가 달라진다고 교육을 받고, 육안으로 확인한다.
3. 한 번 평가가 이루어지고 나면 다시 할 수 없는 종류도 있고, 재평가가 가능하나 시간이 소요되는 종류가 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모든 시험은, 중년, 노년에 들어 보기에 현실적으로 크게 힘들다. 고 인식한다.
4. 사회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특정 나이 이전까지 이룩해야 하는 발달 과업이 있다. 고 인식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능이라든지, 중간고사라든지, 기말고사라든지, 공무원 시험이라든지, 고시라든지, 자격증 시험이라든지,
인적성평가라든지, 심지어 내무사열이라든지, 재무조사라든지 하는 모든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적 유용성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무얼 말하느냐, "이 사람은 특정 집단에서 얼마나 잘 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단히 주관적인 평가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객관적인 평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피시험자의 입장에서 시험을 보는 횟수이다.
교육을 받아오면서 이 '시험'이라는 것은 곧 체로 사람을 거르는 역할을 한다.
A 집단은 어느 수준 이상을 요구하기에 A 점수까지만 받고,
타집단들은 또 자기 수준에 맞게끔 점수를 요구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과하게 학업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공부해나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회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설령 학업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한 번 어떤 '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재활용하여 다시금 새로운 평가를 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사팀에서 주장하는, "한 번 특정 영역에서 성과를 낸 사람은 다른 부서에서도 좋은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이러한 평가의 재활용은 '편리성'에 근거하여 사회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혀 있다.
따라서 학교에서 학생에게 어떤 어떤 내용이 실제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고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알려주는 것으로는 학생 입장에서 크게 와닿을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해당 학문의 실생활 응용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것일 뿐, 그것으로 해당 학문의 가치를 평가할 순 있어도,
그 학문에서 일정 점수를 성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많이 샜는데, 여기서 이야기하기로,
'재수강을 기약하며 어쩔 수 없이 보는 중간고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것은,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시험 점수'가(='평가'가) 이상하게 나올 것이라고 지레 짐작함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러한 짐작은 실제 고득점을 자주 성취하였던 사람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왜 생기는가?
2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1. 자신이 만일 좋은 점수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얻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얻게될 패널티에 대해 미리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충격 변화(=스트레스)를
오히려 줄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험 기간 내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더해
(혹시 몰라 이상한 점수를 받았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양은 더하면 같을 수밖에 없다.
말인 즉슨, 시험 기간 내내 즐거운 상상을 하며 고득점의 상상을 하다가 실제 시험 결과가 충격적일 때의 상황과,
시험 기간 내내 고통을 받으며 공부를 하다가 실제 시험 결과가 충격적일 때의 상황에서의 스트레스 총량은
같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스트레스'의 의미는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시험 기간 내내 시험에 대한 실패를 지레 짐작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나누어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혹시 몰라 이상한 결과를 받았을 경우의 '순간 스트레스'는 낮아질지 몰라도,
스트레스의 총량은 어느 경우에서건 같음을 확실히 하겠다.
(어떤 것이 나은가는 논외)
2. (궁극적으로) 자신이 하는 행동(공부)에 대한 동기유발이 오로지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중독자'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시험'을 위해 준비하는 기간에서 발생하는 자극을 상회하는 자극들을 이미 받고 있는 경우,
'시험'의 평가를 통한 결과(보상)가 심적으로 받아들이기에 크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기이하리만치 시험에 대해 공부는 하지 않되,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는 크게 받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대단히 감성적인 표현을 하자면,
이성으로는 사회적 평가, '사회적 유용성'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되, 감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아무리 우수한 성취를 거둔 사람이라도 갑자기 우울증에 걸렸다고 얘기를 한다거나,
혹자가 자살을 했다거나 하는 실례를 바라보면서 고려해볼 수 있다.
만일, 자신의 흥미 분야에 대한 시험이라면, 즐겁게 준비하며 큰 자극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시험, 사회적 평가가 들이대지는 것에 대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자명함으로부터 알 수 있다.
이 대단히 주관적인 서술+객관적인 가치평가가 쓰인 문장에 대해 보다 자세히 써보자면,
시험에 대해 가지는 스트레스가 자신의 흥미로 인한 스트레스 감소보다 크거나, 같거나, 작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1. 큰 경우
-시험 스트레스가 자신의 흥미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감소보다도 크다면,
동기부여가 '시험 스트레스'로 인하지는 않다고 하되, 시험의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2. 같은 경우
-시험을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고 판단함에도, 시험의 성과가 좋게 나올 수 있다.
시험에 대해 자신의 흥미 분야 이상으로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작은 경우
-시험 이전에 이미 자신의 흥미 분야로서는 대단한 성취를 이룬 다음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무엇보다도 필자는, 시험 스트레스가 매번 크다.
이는 '자신의 흥미 분야'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장기간 지속되는가
하는 여러 의문들에 걸맞는 무언가가 발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장래희망'으로 이를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장래희망에 대해 '언젠가' 성취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경우 이는 옳지 못하다.
'자신의 흥미 분야'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단기간에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좋다.
자신의 '흥미'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새로운 것에 대한 자극'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익숙한 것을 함'으로써 '스트레스가 늘지 않는다고 해도 될 정도'인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인체가 항상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발생된 스트레스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해소되기 마련인데,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스트레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이를 보고 스트레스를 고정적인 수치 게이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실제로는 생리적 욕구들을 해소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생리적 욕구들을 해소하는 것 자체에 의식을 쏟을 필요가 없어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문제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자신이 익숙한 것을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정도가 낮다면,
자신의 특정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사이클 속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의 양은 평균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고,
이는 긍정적인 자극에 대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객관적으로 볼 때 '좋아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흥미' 분야는 '그걸 대할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되려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 새롭고 재밌는 것
2. 이미 익숙한 것
따라서, '시험'으로 다시 이야기를 돌리자면,
자신의 시험과 자신의 흥미 분야를 접목시키고 싶다면,
천운이 따라주어 자신의 흥미 분야로서 '새롭고 재밌는 것'을 마구마구 발견해 자기가 즐겁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 '익숙한 것'으로 만든 것을 시험으로 보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이는 언뜻 보면 당연한데,
예습과 복습이 중요하다는 대단히 상투적이고 불필요한 말에 대해,
그래도 거기에는 중요한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시험 보면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고득점을 하는 재수없는 사람이 괜히 '시험 X됐다'라고 표현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1. 기만적인 판단일 수 있고
2. 실제로 시험 기간 내내 정신적 고통을 받고, 혹시 몰라 시험 결과가 이상하면 또 충격을 받을까 미리 걱정하는 것이고,
3. 실제로 시험 기간 중 시험 내용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는 자격지심일 수 있다.
말미에 여담을 하자면,
시험은 현실 속에서 충실히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잘 봐야 좋은 결과가 있는 그런,
애증의 대상이지만,
그리고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그것의 평가 결과로서 사람의 수준이 결정되고 이는 마치 신분제같고 그렇지만,
이를 떠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자신이 개질알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지는 잠재성은 없어지지 않으므로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지든 무조건적으로 존엄한 것이다.
존엄성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유용성과 결부되면 안되는 것이다.
이는 단호히 가치평가가 가능한데, 왜냐면 사회적 유용성과 결부된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경시풍조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컨데, 시험을 못 본 사람은 때려죽여도 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집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시험을 잘 본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사회의 기계 부품으로서 잘 작동되는 재료에 불과하다고 의미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유용성을 인간의 존엄성에 결부시키면 사람은 생명을 걸고 경쟁하다 죽을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허기, 부족한 수면 등으로 병에 걸려 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장려되거나, 장애를 가지거나 노환이 들면 살해가 이루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야기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결부되는 것의 위험성은 이토록 크다는 것이다.
실례는 우생학을 비롯한 나찌 집단, 영아살해를 자행한 스파르탄 등이 있다.
따라서, 시험에 어느정도 몰두하여, 설령 그 공부가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이라도 어쨌든 해당 학문에 익숙해져서
시험을 좋게 통과하면 사회적 유용성을 어느정도 담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를 넘어서 타인에게 '인생' 운운하며 좋은 성적을 강요하게 되면,
이는 극단적으로 낙오자 집단 자살 및 집단 정신병을 야기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