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tiness

나무위키 검색 결과: 석가모니+인지심리학+동역학=?

Not-exist 2020. 4. 20. 03:02

 1.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자임에도 노인, 병자 등을 만나며 사람들의 고난을 보았고,

 자신이 왕자로서 아무런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던 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출가했다(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2.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여러 선인들을 만나며 눈이 움푹 패이고 뼈마디가 보일 정도의 고행을 하기도 하고, 스승을 바꾸자마자 일주일만에 무아의 경지*에 이른 적도 있었으나 결국 해탈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혼자 고행하기 시작했다.

*무아: "나는 존재한다"는 상견, "나라는 건 없다."는 단견 모두 그릇되고, 단지 중도만 있다는 진리(물론 이때 '진리'는 단지 스스로 체험하고 이해한 뒤에 붙을 수 있는 단어이다).

 

 3. 고타마 싯다르타는 6년동안 육체적 고행을 단련하는데, 이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무덤가에 가서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내 몸을 가렸다. 그때 안타촌 사람들이 와서 나뭇가지로 내 귓구멍을 찌르기도 하고 콧구멍을 찌르기도 했다. 또 침을 뱉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흙을 내 몸에 끼얹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을 지켰다. 또 외양간에 가서 송아지 똥이 있으면 그것을 집어먹었고, 송아지 똥이 없으면 큰 소의 똥을 집어먹었다. (중략)

그러자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기고 피부와 살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내 머리는 깨진 조롱박 같았다. 내가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물속에 별이 나타나듯 내 눈도 그러했다. 낡은 수레가 허물어지듯 내 몸도 그렇게 허물어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엉덩이는 낙타 다리 같았고, 손으로 배를 누르면 등뼈가 닿았다. 몸이 이처럼 쇠약해진 것은 다 내가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략)

나는 이렇게 6년 동안 애써 부지런히 도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가시 위에 눕기도 했고, 못이 박힌 판자 위에 눕기도 했으며, 새처럼 공중에 몸을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태우기도 했고, 몹시 추운 날에 얼음에 앉거나 물속에 들어 가기도 했다. 알몸으로 지내기도 했고, 다 해진 옷이나 풀로 만든 옷을 입기도 했으며, 남의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리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길러 몸을 가리기도 했고, 남의 머리카락을 머리에 얹기도 했다."

 

<<증일아함경 제23권, 증상품 제8경>>.

 

 4. 고타마 싯다르타는 몸에 고통을 주는 수행은 순전히 반복되는 고통을 깨닫기 위한 생고생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몸을 지혜롭게 쓰는 것이 곧 수행에 이르는 길임을 깨달았다(인생의 진리는 40일 간의 단식, 6년간의 고행 등을 이룬 끝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걸쳐 열반에 이르러야만-비약적으로, 죽기 직전에야- 깨우칠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5.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에 '공양'을 인생 처음으로 받고(단순히 금식으로 굶어 죽는 것은 열반에 이르지 못하고 고통을 다음 생에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 수행을 계속 하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며 초지일관의 금욕(=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이 과정은 마왕 '마라 파피야스'와의 전쟁으로 은유된다).

 

 

-------------------개인적인 여담이니 보지 않아도 무방---------------------

마라 파피야스: "수행을 그만두어 부처의 자리를 포기하면 너는 틀림없이 전륜성왕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정복하고 온갖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을 누릴 것이며 오히려 전륜성왕의 덕으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내가 보기에 대단히 합리적이었다. 확실하게 이성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온갖 부귀영화'는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거니"하고 무시해도 되지만, "왕이 되어야 일단 중생을 구제할 수 있지 않냐?"고 되물어본다면 확실히 그렇다. 애초에 중생들을 구원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보았던 노인, 병자부터가 사실 자신의 나라, 카필라바스투의 주민이었지 않은가? 왕이 된다면 금욕주의적인 삶을 결합하여 국정 운영에 방만함이 없도록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로서의 '나'의 이미지에는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라는 이미지도 있고, 훗날 왕이 될 것 또한 당연히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이미 마라 파피야스가 유혹할 당시에 그는 무아의 경지를 깨우친 다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사의 경계를 아우르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과 비교하면, 이번 생에 한 순간만 존재했던 '왕자'라는 이미지는 자신의 수행을 깨뜨릴만한 유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라 파피야스와의 전투(자신과의 고뇌)에서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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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타마 싯다르타(이때부터 석가여래)께서 '사성제'와 '팔정도'(전자는 이론적 배경, 후자는 실험 방법)를 가르치시니 교단이 스스로 성장하였고, 수많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역설하시고 종래에 열반에 이르니, 오늘날까지 성인으로 신성시되고 있다(단, 이는 비약적인 설명으로,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깨우침에 이를 수 있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중요시하고, 그보다 누구나, 스스로도 깨우칠 수 있다는 사실-방향만 옳다면 이미 깨우쳐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이후 개인적인 여담만으로 채우도록 하겠다.

 

 1) 내가 전에 여러 차례 썼던 "자아정체성은 없다."는 결론이 단지 쇼펜하우어의 회의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는 이미 불교에서 '단견'이라 이야기하며 경계하던 것으로, 혼자 생각했던 참신한 아이디어였던 것이 실은 2500년 전에 이미 부정되었던 것이었음에 대단히 놀라웠다.

 

 2) 그러면서도, "자아정체성은 없다."는 말을 꼭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고정적인 나'는 확실히 없다. 내가 생각했던대로, '나'의 이미지는 무수히 많은 타인들의,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한 순간순간별로 그 위상이 나뉘어져 있을뿐인 것이다(이는 과거에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로 부르던 개념과 유사하다). 그 수많은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하나의 시스템처럼(마치 뉴런이 전신에서 모여 하나의 신경망을 이루듯이) 여겨질 뿐인 덩어리가 '나'의 정체인 것이다.

 

 3) 심지어 '나'는 '주변의 사물들의 위치 정보'만으로도 성립한다.

 -역학적으로 내 무게중심의 질점(혹은 유한요소)에 대한 속도 벡터가 어떤 기준점(고정/운동 관성계)에서 어느 상대속도로 움직여 가속하는지를 고려한다면 '나'는 우주 규모의 중력장 속에서 사물들과 무수히 많이 상호작용하는 에너지(겸 질량)일 뿐이다.

 -인지주의: 현대 심리학에서는 과거 (섹슈얼 시그널로 모든 게 다 해석되는) 프로이트는 뒷전으로, 행동주의 심리학(동물의 행동-조건반사-으로 인간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는 관점)을 넘어 인지주의 심리학이 연구되고 있는데, 이는 쾰러(Köhler)의 통찰 학습(insight learning) 연구(1925) 때문이다. 기존 행동주의에서는, 일단 자극에 따른 반응(행동)이 교육되면 그게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관점이었는데, 해당 실험에서 침팬지들은 교육받지도 않은 행동을 스스로 실행해서 먹이를 쟁취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에 말마따나, "침팬지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기초적인 손기술이나 지식을 조합할 수 있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답안으로 인지주의가 대두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극-블랙박스(정보처리)-반응'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심리'의 정체가 곧 인지주의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블랙박스'에 있다고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ㄱ) '계산주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블랙박스가 컴퓨터의 알고리즘에 유사하다 가정하였고, 이에 따라 '딥러닝' 등을 통해 '인간의 심리, 판단, 이성'을 모사하려는 시도를 한다(단, 아직 데이터를 모으는 것(빅데이터)과, 고차원 데이터-사진, 영상-를 전처리하는 것, 인공신경망을 구성하여 연산시키는 것에서 대단히 많은 시간,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다소 늦바람이 불고 있다).

 

 (ㄴ)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관점에서 블랙박스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마음은 뇌 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에 뻗어 있는 신경계)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 기존의 정보처리적 접근과는 다르게 인간의 마음에 기호화된 형태의 계산단위나 표상 따위는 개입하지 않는다 봐야하고, 오히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동적인(dynamic) 시스템으로 보아야 한다.

 

 (ㄷ) '분산된 인지'(Distributed Cognition) 관점에 이르러선 블랙박스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이 신체와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환경마저도 사고의 한 부분이다." 

 

 위의 세 가지 관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현재 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인지주의 심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 마음, 정신이랄 것은 단순히 정적으로 자극에 반응하는 즉각적인 행동을 야기하는 중간 과정이 아니라, 신체 전체에 뻗어있는 신경세포들을 하나의 system으로 보거나 혹은, 신체 외부의 사물 간의 위치 정보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system으로서 구성되어 인간의 행동을 조절(교육받지 않은 자극에 대해서도, 기존에 알고 있는 행동을 조합하여 해결할 수 있게끔)하는 정보처리 과정(=블랙박스)인 것이다."

 

 

 

 4) 위의 1~3번을 종합하면, '나'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 혹은 사물과 물리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질량(겸 에너지)인 동시에,

 -타인 혹은 사물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외부 이미지(=사회적 이미지=페르소나=대외용 자아정체성)들 그 자체이며,

 -위처럼 '행동'에 대한 간섭으로 정의되는 '자아정체성' 이상으로, '마음'에 대해 정의되는 '자아정체성'은 인지주의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불교적인 관점에서 '타인 혹은 사물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순간순간의 동적인 system'인 것이다.

 

 (*)인지주의 심리학은 위에서 설명하였으니 '동적인 system'에 대해 그 어구가 왜 쓰였는지 알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적 관점에서 '나'는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해야 하겠는데, 그 답은 직관적으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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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난존자의 어디가 그토록 좋은가?”
“저는 아난존자의 눈도 좋고, 코도 좋고, 입도 좋고, 귀도 좋고, 모두가 다 좋습니다.”
여인의 대답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희대의 독설로 답하셨다.

“눈에는 눈곱이 있고, 코에는 콧물이 있고, 입에는 침이 있고, 귀에는 귀지가 있고, 몸에는 피고름이 흐르는데, 그것이 좋단 말인가?”

-석가모니 앞에서 아난다와 결혼하겠다고 고백하는 마등가의 여인과 석가모니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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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석가여래 다음으로 잘생겼다고 하는 아난다에 홀린 여인이 석가여래께 결혼 상담을 받는 장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난다의 모습(비약적으로 말해 아난다의 정체성)에는 '여인이 반할만한 조각같은 외모'도 있지만, '누구라도 기피할만한 눈곱, 콧물, 침, 귀지, 피고름' 등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얼 뜻하냐면, 바로 아난다의 정체성은 석가여래, 여인 두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만큼이나 그 개수가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난다의 정체성을 1차 집회 때의 500명의 아라한에게 묻는다면, 적어도 500개 이상의 '아난다'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마찬가지로,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내가 살면서 만나본 수 천, 수 만의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것이다.

이 글을 글쎄 혹시 몰라 볼지도 모를 당신 역시 '나'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일기를 쓸 때든, 보고서를 쓸 때든 그럴 것이다. 당신과 나(필자)는 '나'라는 인칭 대명사에 계속 낚여서 한글 '나'를 처음 배웠던 유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가 고정된 것인 줄로만 아는 것이 필연적인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나'의 모습, 이미지, 정체성, 마음, 심리, 정신, 지능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나'의 정체는, 단지 이름 석자, 직업, 직장, 대학교 학벌, 연봉, 직책, '나'라는 인칭 대명사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의 신체, 이 글을 보고 있는 눈 앞에 보이는 모니터 혹은 스마트폰 액정의 위치, 주변에 있는 가구들 위치, 나아가 타인과 맺은 사회적 연결고리 그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하는 system인 것이다. 이뿐만이랴, 위에서 언급하였듯 동적이기까지 하다. 어제와 오늘의 '나'를 이루는 system은 똑같아 보이지만 그게 아니다. 하루만큼 나이를 먹었고, 피부는 노화되었으며, 체중이 달라지고 있고, 친구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며, 가구 인테리어를 바꾸기도 했고, 책을 펴서 공부를 하기도 했으며, 운동을 하기도 했고, 게임을 하기도 했고, 영화를 보면서 눈물도 흘린 만큼 수분도 날아가고 그만큼 갈증을 느꼈으며, 소변을 누기 위한 호르몬이 분비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system의 시간에 대한 변화율은 변동한다(이 모든 변수를 비선형 주기함수로 shrink 시킬 수 있을까?).

 

 여기에 더해, 불교적 관점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으리라 본다.

 첫째, 아라한(깨우친 자)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이미지들 중 세속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공양을 받으며 해탈하여 종래엔 열반에 이르거나(이때 세속적인 것을 버리는 것은 '대외용 자아정체성'을 버림을 뜻한다. 현대인들은 이것이 없으면 끝이라는 '단견'에 빠지기 쉬운데, 위에 서술하였듯, '나'라는 동적인 system은 순전히 대외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일반적인 중생의 삶을 살되, '살면서 겪는 모든 고통, 괴로움'이 순간순간 지나갈 것임을 인정하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에 '고정적인 나'를 대입하며 좌절하지 말아야 하겠다.

 일생에 존재할 고통-이때 고통은 잠깐의 행복, 기쁨도 포함한다. 영원하지 못하기에 더 행복을 갈구하는, 그 중독이 또한 고통을 부르기 때문이다-을 인정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나의 이미지들 속에서 명확히 관찰하며, 나의 불필요한 이미지를 삭제한 채로 고통만을 담담하게 관찰하고 "금방 지나가겠지"하고 수용하는 것이 '수행'의 본질이며, 또, 자신에게 부여된 불필요한 이미지를 모두 삭제하여 고통마저 없앰을 '열반'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때, '나의 불필요한 이미지'와 '필요한 이미지'를 구분함에 있어 중요한 것이 '팔정도'이다.

 '올바른 교육, 판단, 행동' 등이 이루어져야 올바른 방향성 하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열반을 위한 수행에 대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여, 방일하지 말지어다.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에 이르렀나니,
나의 한량없는 모든 올바름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에서 연유하였을 따름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일 뿐이나니
그대들이여, 이것을 언제나 유념할지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당부이니라.

 

<<디가 니까야 16경 <대반열반경> 및 <불설장아함경> 중 '유행경(遊行經)'>>

 

 위는 석가여래의 '고타마 싯다르타로서의 유언'인데, 이것이 위의 '불교적 관점에서 할 일'을 모두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일체의 모든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일 뿐이나니"를 통해 '나'의 정체는 동적인 system, 이미지들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방일하지 말지어다."하는 것으로 행동요령 단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방일'은 선을 행하는 것을 게을러 함을 의미한다. 즉, 올바른 이미지를 교육받고, 올바른 이미지에 맞게 행동해나아감이 중요하다 역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이미지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만큼, 그 방법 중 한 가지를 위의 예시를 다시 들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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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난존자의 어디가 그토록 좋은가?”
“저는 아난존자의 눈도 좋고, 코도 좋고, 입도 좋고, 귀도 좋고, 모두가 다 좋습니다.”
여인의 대답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희대의 독설로 답하셨다.

“눈에는 눈곱이 있고, 코에는 콧물이 있고, 입에는 침이 있고, 귀에는 귀지가 있고, 몸에는 피고름이 흐르는데, 그것이 좋단 말인가?”

-석가모니 앞에서 아난다와 결혼하겠다고 고백하는 마등가의 여인과 석가모니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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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처럼 하면 된다. 미인으로부터 노인을 내다보고, 기쁨으로부터 고통을 내다보며, 이를 반복한 끝에 생명으로부터 죽음을 바라보기까지를 할 수 있다면, '나'의 이미지 속에 속세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은 어떤 학문적 가치도 없는 단순한 비트들의 나열일 뿐임을 밝힌다.

 

 ------------2020-4-21 수정하기를-------------

 위의 생각(공사상과 유사)에 더해 문득 추가적인 아이디어가 들어 서술하겠다.

 

 '나'는 비어있어 아무것이나 될 수 없지만, 아무것이나 따라할 뿐(동적으로 system 째로 사회 흐름과 같이 흘러나가므로)이라는 것이 위의 사상이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되, 다소 허무주의로 흘러 들어가는 경우가 잦은 것 같다. 나 역시 방금까지도 그러하였다.

 

 확실히, '나'는 비어있고, 갖은 고통을 견디는 수행을 한다고 할지라도 어쩌면 생고생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인 사람은 열반에 들지 못한 채로 죽어갈 확률이 높다. 동시에, 열반에 든다는 것은 꼭 진리를 깨우친 다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진리는 이 세상에 없고, 이 세상에서 '의미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지 자신의 마음가짐으로 수많은 욕구에 대해 해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기에, 계속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며 죽어갈 것이 자명하다. 행복도 한순간의 물거품일 뿐이기에 사람은 언제나 괴로울 따름이다. 또, 상기하였듯 단견과 상견 어느것도 옳지 못해 '나'는 어느것도 될 수 없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상대적인) 답이 바로 이것이다. "그저 계속 관찰하며 자신에게 알맞은 한순간의 이미지들을 갈아끼울 따름인 것이다."

 

 계속 계속 관찰해야 한다. 옳고 그름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으나,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옳고 그름의 이미지를 계속 관찰하고 나만의 이미지(정체성)를 장착해야 한다. 또, 나만의 이미지 역시 절대적이지 않기에 계속해서 나의 이미지가 낡은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관찰해 나아가야 한다.

 

 최고선은 언어의 정의상, 상상 속에나마 존재하고 있을지 몰라도,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나눌 수 없는 문제들에는 선이 무엇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시대가 지나서, 공동체가 바뀌어서 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언젠가 바뀔 선'에 대해 무시하며 방탕해지면 아니 된다. 언제까지고 우리는 '선'에 항상 따를 따름이나, 지속적으로 그것이 무엇으로 바뀌는지 인식을 계속 갱신시켜야 할 뿐인 것이다.

 

 공사상은 나뿐 아니라 이 세상 만물에 실체, 본질이 없고 무의미함을, 명색이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사상을 왜곡하여 모든 것을 허무하게 보거나(허무주의), 비관적으로 보거나(비관주의, 회의주의)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말 그대로, 우리는 비어 있기에 계속해서 (나를, 주변을) 관찰하며 나만의 이미지를 매번 갱신시킬 따름인 것이다. 그러니, 허무하다 하여, 무의미하다 하여 "생각을 멈추는 것은 오히려 틀린 것이다."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계속 관찰해야 한다. 명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가만히 눈을 감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모습은 실상 그러한 '척'을 하는 것일 뿐, '명상을 한다는 이미지'와 '명상을 하는 와중이라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을 뿐임을 유념해야 한다. 내 안에서 진리는 찾을 수 없을 뿐더러, 그전에 이미 진리라는 단어에 1:1 대응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명상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잠을 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생각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그저 놓기 위한 일탈 행위로서 명상을 삼으면 안 된다.

 

 명상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가장 기초적으로 자신의 호흡, 허리의 꼿꼿함, 눈동자의 움직임 등 내 안의 것, 나를 '관찰'하는 연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절대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잡생각,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는 것은 당연하나, 자신의 현 상황을 직시하고 자신의 호흡, 자신의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은 앉아서 자는 것과 다른 것이다. 

 

 명상은 굳이 어떤 자세를 취하면서 고요한 곳에서 무언가에 집중해야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눈을 뜬 채로,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키보드를 누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은 절대 무언가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단지 관찰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온 신경을 집중해 키보드 ㄱ,ㄴ,ㄷ 자판을 누르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이 관찰이고 그것이 명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하기는 쉽지 않다. 일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수많은 바쁜 일을 해야 하는 와중에 키보드를 누르는 나의 모습을 관찰한다는 건 말 그대로, "바빠 죽겠는데 뭐하는 짓"이 된다. 그렇기에 따로 명상을 하기 위한 이미지로서 가부좌 자세와, 고요한 배경음 세팅, 혼자만의 공간 등을 삼은 것일 뿐이다. 만일 명상의 핵심 아이디어를 눈치챈다면, '관찰'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을 더욱 더 살펴보려 할 뿐일 것이다. '관찰'을 위해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상을 영위하면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갱신시켜 나가는 것으로도 수행함에 있어 충분하다. 오히려 일상을 영위하며 직접적으로 고난과 부딪혀 가며 괴로움을 알고, 관찰하는 것이 더욱 수행에 적합하다.

 

 

 마지막으로, 상기한 '관찰'이란 단어에 꼭 집중할 필요는 없음을 밝힌다. 누구든지, '나'가 이야기한 '관찰'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그 유사한 단어를 다른 곳에서 빌려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관찰'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심리, 행동을 자행하는 것은 항상 절대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관찰'에 준하는 무언가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스스로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것이리라 본다. '나'는 나에게 말할 뿐이다. "관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