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달라지지 않는 하루
내가 쓰고있는 일기들은 이미 내가 3년 전에도 썼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달라지지 않는 나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나의 굳건한 줏대를 표현한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동안 어떤 변화도 겪지 못한 나의 모진 부분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나는 언제까지고 매일, 여태껏 그래왔듯이,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참으로 딱하고 안타깝다.
나는 달라지지 않고, 죽기 전까지 어제를 후회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 눈에 보인다.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해준다면,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듯 그 방향을 향해 나의 몸뚱아리를 던질 것도 같다.
그러나 나의 감정적인 이러한 면모도, 나의 굳건한 이성에 의해 제지된다.
이는 마치 누군가의 장례식에 갔던 양상과 같다.
처음의 장례식에서 나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무수히 많은 위로를 받고 심지어 삶에 대한 조언까지 받을 정도로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을 자아낸듯 하다.
두번째 장례식에서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얼핏 처음의 장례식에서의 나의 모습이 무언가 철없어 보이기도 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의적 판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첫번째 장례식과, 두번째 장례식 모두, 식이 3일장이 끝난 이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오로지 유산만을 나누는데 급급하여 죽은 자의 허물없는 돈을 서로 뜯으려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산 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자의 돈을 뜯기 위해 산 자를 물어뜯으며 법적인 수단 외의 비정상적 수단을 경유하는 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그들이 죽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친척과 가족이 서로를 물어뜯을 것이며,
나 또한 내가 죽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가족을 물어뜯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가족 역시 혹여나 죽게 된다면 나 또한 그 뜯고 뜯기는 현장의 중심에 서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이나 나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장례식을 정상적으로 겪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던듯 싶다.
언제 장례식을 치르기 이전, 자신의 죽음을 기다렸던 어제 죽은 자가 자신의 가족들이 서로간에 물고 뜯고 악착같이 서로의 괴로움을 자아내기를 바랬던가?
죽는 것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죽으면 그 사람 주변의 관계는 강제적으로 끊어진다.
그 끊음의 수단은 돈이다. 돈이 투자된다면 끊음은 없던 일이 된다. 한편 끊음이 이루어지면 돈은 그대로 이동한다.
죽음은 산 자들에게 있어서 돈의 분배의 역할을 하는 건가?
날고 기던 억만장자와 백만장자를 비롯해 술병과 함께 묻히는 가난한 사람 모두 그 자신의 돈을 허공에 흩뿌리고 죽지는, 않는다.
돈이 무의미하여 기부를 하고, 선행을 하는 것은 좋을 것이나, 그것은 죽음에 대한 해탈로 인해 얻어지는 도덕적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은 돈에 집착하게 된다.
이름을 남길 정도로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어서 남는 것은 유산일 뿐이니.
그래서 나는 그 두 번의 장례식을 보고 스스로의 가치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충분한 돈이 없다고 생각되었기에.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가치가 없던 것이다.
죽어서도 주지 못하는 돈을 살아서 어떻게 주겠는가?
나는 이 심보가 나의 구두쇠적인 무언가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되도록 선행을 베풀고자 하였기에.
그러나 나는 가족을 만들 수 있을만큼은, 있지 않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내가 참으로 딱하다.
나는 내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못하면 그것으로 스러지는 무의미한 이름 한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기는 내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자신의 일기장 단 한 줄만큼의 가치도 없고, 레이놀즈가 점성계수 등을 포함한 수식을 레이놀즈 수라고 명명하였던 것처럼 내 스스로 남길만한 학문적 성취도 없다.
없는 것이 곧 내 자아정체성이 되어버리니, 나는 나의 주관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미 내가 없는데 나의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자본의 관점에서, 1을 2로 바꿀 수 있으되, 0을 1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 경로가 판이하다.
1을 2로 바꾸고 10을 20으로 바꿈에는 0을 20으로 만드는 것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이 0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바꾸기 위해 나는 어마어마한 노력을 했어야 했음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무지함을 목도하면서 그대로 버텨냈다.
그 굳건함은 오늘날에 있어서 '아싸'라고 불리우는듯 보이지만, 그것은 비속어나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아싸를 지칭하지만 진정 아싸인 사람은 없다.
자신을 참으로 0이라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자신의 이름값만큼의 무언가는 남아있다고 믿으니.
나는 그 이름마저 이제는 무의미한듯 보인다.
그 이름은 단지 볼펜 획 수 몇 번만으로 환원되는 그림이거나, 낙서일 뿐이니.
그렇기에 나는 바꾸기가 힘들어 바꿀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