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가 곧 미덕인 사회
다른 사람을 향해 냉소적인 웃음을 띄우며 조소하기만을 목적으로 하던가,
움츠러드는 아무개의 어깨를 볼 적에 사뭇 말로 표현하기 힘든 쾌락을 얻고 흥분하여 그리 하기만을 좇던가?
타인의 필사적임을 비웃을 용기도 나지 않던 시간은 지나고
그저 타인이라 하면 그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냉소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즐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시니컬한 비아냥을 지성적이라 여기고 그것을 조언이라 여겨야 한다.
듣는 이 혹은 보는 이가 그러한 냉소를 보고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경청'이다.
오롯이 사람들의 냉소를 한 몸에 받고 그것을 조언이라 여겨야 하며, 끝까지 분노하지 않는 이를
정상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무리가 곧, 아무개들의 모습이다.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기도 이전에, 이미 아무개들은 그렇게 변질되어 있었다.
자신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더이상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는 판단 하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 불안의 표상을 그들의 입, 손가락을 통해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정감이라 함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야말로 모름지기 그 사회공동체의 '정상인'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의 결과는 대개 불안감으로 끝이 난다. 왜냐, 자신의 사회적 책임감을 정의지을 때에는 무조건적으로 공동체, 즉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모습으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 책임을 정의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건설적인 자신의 인생설계를 이루기는 커녕,
타인의 모습에 좌우간 부러움만 느끼며 자신의 굽어진 허리만을 보고 욕짓거리를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이면 아니던가
그러한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표출하고 다니느냐, 하지 않고 안으로 숨기느냐에 따라
그저 사회적 평판이 달라질 뿐이다.
평판, 그것은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분히 타인의 의지가 작용한다.
타인은, 오롯이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관심을 일체 가질 수 없다.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 가치관 등은 타인이 보기엔 그저 무의미한 비트의 나열 뿐이다ㅡbit와 beat에 차이 없다.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 속에서 추상적인 가치들을 내포하는 단어들을 학습한 결과물을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아무개가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면,
그것으로 아 왠지 그럴싸하다.
하며 사회를 그저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지성적이라 하더라..
진심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의 사례를 인식할 때, 언어의 나열로서 뇌로 이해한 다음
양이온들의 이동으로 인한 막전위차로서, 신경전달물질 및 호르몬의 분비로서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이라는 것에 시적 허용을 참고삼아 더 큰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보다 더 시니컬해지고 싶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실로서 공감은 별 것이 아니고... 그 감정을 느끼고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또 시니컬해지곤 하더라.....